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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둘 바를 알게 하는 권력?
푸코의 문제제기 : 서구의 근대 주체를 형성하는 권력 장치 권력을 보는 관점들 근대적 신체를 만드는 규율의 기술들 신체를 훈련시키는 권력 장치 완벽한 감시를 위한 장치-전면감시장치 생명을 관리하는 권력-성의 문제 틀 계몽주의에 대한 비판적 태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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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삶에서 다양한 감시장치들이 피할 수 없는 생활의 일부가 되고, 우리는 이런 장치 안에서 사는 법을 익혀야 하는 것은 아닌가? 나의 신용상태, 내가 구입한 상품들의 목록, 나의 학업성적, 내가 하는 일, 나의 신분, 내가 만나는 사람, 내가 다니는 곳을 누군가 추적할 수 있다면 나는 그런 기록들 안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 p.8
위계질서적 감시(la surveillance hirarchique)는 일정한 위계질서에 따라 감시함으로써 생산과 통제를 통합한다. 이것은 개인들을 규율적 공간에 배치하여 ‘가시적’으로 만든다. 이것은 모든 사물들을 조명하는 광원이 되어 그늘진 어떠한 곳도 남기지 않으면서 신체를 노려보는 ‘권력의 광학’이다. 이 모델은 군대, 대규모 작업장, 공장, 감옥, 학교, 노동자 기숙사 등에서 가시적 공간을 구성하여, 통제하고, 효율을 높이고, 질서를 만든다. --- pp.40~41 푸코는 계몽의 선입견을 지적하기 위해 ‘이성적 능력의 확대가 개인들의 자율성과 자유를 증대시키는가’를 질문한다. 이는 계몽적 기획에 능력과 권력 사이의 역설이 있기 때문이다. 18세기 계몽주의는 사회계약을 통해 이성적인 공동체를 건설하려 했고, 개인들 상호간의 균형 있는 성장을 추구했다. 서구 역사는 능력을 획득하고, 자유를 얻기 위해 투쟁하였다. 그런데 계몽의 믿음과 달리 능력의 성장이 자율성을 증대시키지는 않았다. 실제 역사에서 개인적 능력의 성장이 그들을 자율적인 존재로 만들어주기보다는 그들을 예속시킨다.(같은 책, 72) --- p.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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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둘 바를 알게 하는 권력?’
푸코와 들뢰즈, 그리고 리오타르 등 현대 프랑스 철학자들에 대한 생산적인 저술들을 끊임없이 내놓고 있는 소장 철학자 양운덕 교수가 이번에는 푸코를 정면으로 다룬다. 그것도 두껍고 전문적인 저술이 아닌, 일반 독자들을 향한 외침으로 말이다. 푸코는 더 이상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철학자이기는 하지만, 사실 무어라 표현하기 어려운 복잡한 실타래를 갖고 있는 철학자이기도 하다. 이 복잡다단한 푸코를 양운덕 교수는 ‘권력’이라는 열쇠를 가지고 우리에게 열어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의 저자 양운덕 교수는 고려대에서 ‘헤겔’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고려대 철학 연구소 연구부교수로 재직중이다. 주로 포스트 구조주의자들을 연구하고 많은 논문을 써왔으며, 이 책을 통해서는 ‘권력에 대한 계보학적 분석’을 가지고 중기 푸코를 풀어내고 있다. 정상적인 자기가 어떤 지식의 배치를 통하여 마련되는지에 대한 분석을 푸코의 초기라고 본다면, 중기에는 니체의 권력, 힘 개념을 재해석하면서 근대 사회에 작용하는 미시권력의 다양한 장치와 테크놀로지를 추적한다. 권력에 대한 사고를 근본적으로 전환시킨 이런 분석은 근대 사회의 일상생활을 비롯한 다양한 국면에서 근대 주체를 만드는 힘들을 그물망을 제시함으로써 기존의 진리와 이성에 바탕을 둔 계몽주의 전략을 재검토하도록 이끈다. 근대인이 어떻게 태어나는가라는 질문에서부터 푸코는 권력이야기를 시작한다고 양운덕 교수는 설명한다. 즉 서구 근대 주체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작업이 권력에 대한 푸코의 논의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으로 푸코는 규율 지키기와 몸 길들이기를 통해서 근대를 살아가는 ‘주체’가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즉 권력이 근대 주체를 만들어낸 장본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체는 이제 더 이상 역사를 뛰어넘는 본질이 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특정 단계에서 특정하게 형성되는 것일 뿐이다. 그럼 이러한 권력은 어떻게 작용하는가? 푸코는 개인의 몸에 작용하는 일정한 관계망 속에서 권력의 작용을 살필 수 있다고 말한다. 즉 푸코에게 있어 권력은 어떤 개인, 집단, 기구가 소유하는 실체가 아니라 관계망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권력은 우리가 쉽게 상상하듯이 단순히 금지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양운덕 교수는 바로 이점을 강조한다. 푸코에게 있어 권력은 작용할 대상을 일정하게 형성하고 그 대상이 스스로 권력을 수행하게 된다고 말한다. 즉 권력은 억압하고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 생산적, 긍정적인 힘인 것이다. 이러한 예는 서양 근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원형감옥’에서 살펴볼 수 있다.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권력, 어떠한 그늘도 남기지 않는 ‘권력의 시선’을 구체화한 것으로, 수감된 내가 저 망루 위의 감시자를 볼 수는 없지만, 감시자는 언제든 나를 볼 수 있다는 구조는 수감자로 하여금 감시자가 있건 없건 간에 감금된 자의 모든 행위가 원리적으로 노출되어 있다는 점을 통해 스스로 행동을 제한하고 규정하게 만드는 힘을 갖게 된다. 흥미롭게도 감금된 자가 이장치를 작동시키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푸코는 전면감시장치가 권력의 작용을 자동적인 것으로 비인격적인 것으로 만드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그리고 양운덕 교수는 이러한 장치가 보다 효과적인 학습법, 보다 생산적인 노동과정, 보다 효율적인 치료를 위해 사용되기 때문에 우리는 반휴머니즘적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계속적으로 승인해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미심장한 의문을 제기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