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서문 … 11
1933년 밤의 송가 … 16 밀치기 … 19 얼처우 예술 … 22 우연히 쓰다 … 25 박쥐를 말하다 … 29 ‘차오바쯔’ … 33 ‘바이샹 밥을 먹다’ … 37 중·독의 국수보존 우열론 … 40 중·독의 분서 이동론(異同論) … 43 ‘타민’에 대한 나의 견해 … 47 서문의 해방 … 52 불을 훔친 또 다른 사람 … 56 지식과잉 … 58 시와 예언 … 62 ‘밀치기’의 여담 … 66 묵은 장부 조사 … 69 신새벽의 만필 … 73 중국인의 기발한 생각 … 79 호언의 에누리 … 83 발차기 … 88 ‘중국 문단에 대한 비관’ … 92 가을밤의 산보 … 97 ‘웃돈 쓱싹하기’ … 100 우리는 어떻게 아동을 교육했는가? … 103 번역을 위한 변호 … 106 기어가기와 부딪히기 … 111 각종 기부금족 … 115 사고전서 진본 … 118 초가을 잡기 … 122 식객법 폭로 … 125 등용술 첨언 … 128 귀머거리에서 벙어리로 … 132 초가을 잡기(2) … 136 남성의 진화 … 141 동의와 설명 … 145 문인 침상의 가을 꿈 … 149 영화의 교훈 … 153 번역에 관하여(상) … 157 번역에 관하여(하) … 161 초가을 잡기(3) … 165 예 … 169 인상 물어보기 … 173 교회밥을 먹다 … 177 차 마시기 … 182 사용금지와 자체제작 … 185 마술구경 … 188 쌍십절 회고·민국22년에 19년 가을을 돌이켜 보다 … 191 33년에 느낀 과거에 대한 그리움-1933년에 광서 말년을 기억하다 … 199 ‘과거에 대한 그리움’ 이후(상) … 204 ‘과거에 대한 그리움’ 이후(하) … 211 황화 … 216 돌진하기 … 220 ‘골계’의 예와 설명 … 224 외국에도 있다 … 229 헛방 … 233 ‘함께 보냄’에 대한 답변 … 247 중국 문장과 중국인 … 255 야수 훈련법 … 258 되새김질 … 262 후덕함으로 돌아가다 … 265 난득호도 … 269 고서에서 살아 있는 어휘 찾기 … 273 문호를 ‘협정하다’ … 276 청년과 아버지 … 279 후기 … 283 해제_『풍월이야기』에 대하여(이보경) … 333 |
魯迅,본명 : 저우수런(周樹人), 자 : 위차이(豫才)
루쉰의 다른 상품
이보경의 다른 상품
|
중국이 낳은 세기의 대문호 루쉰을 만난다!
―‘풍월’을 말하지 않는 풍월이야기 -1933년 6월~11월 사이의 잡문 64편이 수록된 『풍월이야기』 1933년 5월이 되면 『자유담』에 대한 국민당의 탄압도 거세져 편집인은 “앞으로는 풍월을 더 말하고 불평을 덜 드러내기를 호소한다”며 고충을 토로한다. 당시 국민당이 가장 적절한 글로 간주한 원앙호접(鴛鴦胡蝶)류의 연애담이나 풍류에 중점을 두고 루쉰이 쓰는 것과 같은 시사 비판적 글은 자제하겠다는 의지였다. 그러나 루쉰은 필명을 계속 바꿔 가며 풍월을 말하는 것과 비슷한, 즉 풍월에 준하는 이야기인 척하며 글을 발표한다. 박쥐를 비유로 들며 논적을 공격하는 것(「박쥐를 말하다」)처럼 우화를 활용하기도 하고, 독일의 상황을 중국과 비교하며 양국가를 모두 비판하기도 하며(286~292쪽), 지식의 과잉으로 인해 세계 경제공황과 같은 상황이 중국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교묘히 비꼬기도 한다(「지식과잉」). 정치적 현안에 관한 평이 『거짓자유서』에 비해 줄어든 듯하지만 여전히 도저한 세태 비평으로 비판의 칼을 휘두름에 변함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밀치기’와 ‘발차기’, ‘속임수’와 ‘뺑소니’로 민중이 죽거나 다치는 세태, 경멸과 고통 속에서 다른 사람의 종노릇을 하는 타민(墮民)이 자유가 아닌 억압을 욕망하는 세태 등을 풍자한다. 이러한 민중들에 대한 풍자는 루쉰 스스로 “분명 사람들로 하여금 구역질나게 하지만, 이로 말미암아 그것의 중요성을 더욱 잘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중국 대중의 영혼’이 지금 나의 잡문 속에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풍월이야기』, 「후기」)라고 말한 것처럼 그 속에 숭고한 인간애를 깔고 있는 것이다. 『자유담』에 기고를 하며 “적막한 이들을 위하여 소리치기 위해서”(「서문」)라고 했듯, 루쉰은 소외된 자들의 고달픈 삶을 드러내 보이며 중국인의 각성을 촉구한 것이다. 주로 신문·잡지에 기고한 짧은 단편을 가리켜 잡문(雜文)이라 일컫는데, 루쉰은 잡문집을 살아생전 14개나 편찬할 정도로 잡문을 세상과 소통하는 창으로 활용했다. 의학을 버리고 문학으로 전향할 때부터 죽기 바로 직전까지. 이렇게 평생을 함께한 잡문을 가리켜 전기작가 왕스징은 “어둠 속에서 전투의 빛을 발하는 비수”였다고 말한다. 짧지만 강렬한 은유와 풍자성을 띠고 있는 그의 잡문들은 지식인들에게는 논쟁적이었고, 당대 사건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으며, 민중과 약자들에 대해서는 애틋함을 표현하고 있다. 루쉰의 잡문집은 그가 불의에 굴하지 않는 ‘전사’였음을 보여 준다. 그는 권력의 무도하고 잔학한 행위에 분노했고, 그 권력에 빌붙어 아첨하는 무리에게 창끝을 겨누고 물러섬 없이 대결해 왔다. 억압받는 민중의 편에 서고자 했고, 특히 아이와 여성의 해방을 부르짖었다. 5·4운동과 좌익작가연맹에서의 활동 등 새로운 근대 중국을 건설하기 위한 노력에도 쉼이 없었고, 청년작가들을 양성하고 판화운동을 펼치는 등 문화운동에도 투신했다. 이런 그를 마오쩌둥은 민족 영웅이라 극찬하며 이렇게 말했다. “루쉰은 중국 문화혁명의 우두머리 장수였다. 위대한 문학가였을 뿐만 아니라, 위대한 사상가였으며, 위대한 혁명가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