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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제1장 남명의 문인 및 사숙인 Ⅰ. 머리말 Ⅱ. 남명의 문인 Ⅲ. 남명 사숙인 제2장 최영경이 설계한 덕천서원의 공간과 명칭 Ⅰ. 머리말 Ⅱ. 창건경위와 공간명칭의 의미 1. 덕산서원과 덕천서원 2. 경의당(敬義堂) 3. 진덕재(進德齋)와 수업재(修業齋) 4. 광풍헌(光風軒)과 제월헌(霽月軒) 5. 유정문(幽貞門)과 시정문(時靜門) 6. 방당(方塘) 7. 세심정(洗心亭), 취성정(醉醒亭), 풍영정(風詠亭) Ⅲ. 공간에 투영된 남명사상 Ⅳ. 경의당에서 떠올리는 남명학의 지결(旨訣) Ⅴ. 맺음말 제3장 김우옹이 지은 「남명선생행장」의 서사 Ⅰ. 머리말 Ⅱ. 남명 행장 및 묘도문자 찬술배경 Ⅲ. 「남명선생행장」의 서사적 특징 1. 정인홍이 지은 행장과의 비교 검토 2. 묘갈명「묘지명과의 비교 검토 Ⅳ. 「남명선생행장」에 대한 후대논변 Ⅴ. 맺음말 제4장 정구의 경학관과 학용해석(學庸解釋) Ⅰ. 문제의 소재 Ⅱ. 공부론과 경학관 1. 공부론 2. 경학관 Ⅲ. 『대학』·『중용』의 해석성향 1. 『대학』해석의 일면모 2. 『중용』해석의 일면모 Ⅳ. 맺음말 제5장 곽재우의 절의정신(節義精神) Ⅰ. 머리말 Ⅱ. 절의정신의 사상적 기반 1. 사상의 근간을 이룬 춘추대의정신 2. 춘추대의를 천양한 「장준론(張浚論)」 Ⅲ. 절의정신의 현실적 대응 양상 1. 김수(金수)의 문제에 대한 대응 2. 임해군(臨海君)의 문제에 대한 대응 3. 영창대군(永昌大君)의 문제에 대한 대응 4. 기타의 경우에 대한 대응 Ⅳ. 절의정신의 현실적 충돌과 괴리 Ⅴ. 맺음말 제6장 곽재우의 춘추대의론 Ⅰ. 머리말 Ⅱ. 곽재우 춘추대의론의 연원 1. 조식(曺植)의 「엄광론(嚴光論)」 2. 곽월(郭越)의 「소식론(蘇軾論)」 Ⅲ. 곽재우의 춘추대의론 1. 춘추필법과 곽재우의 춘추대의론 2. 춘추대의를 드러낸 「장준론(張浚論)」 Ⅳ. 맺음말 제7장 성여신(成汝信)의 생애와 학문 Ⅰ. 머리말 Ⅱ. 성여신의 생애와 학문 1. 가계 및 생애 2. 사회적 역할 3. 학문성향과 문학관 Ⅲ. 작품세계 및 정신지향 1. 시세계 2. 산문의 세계 Ⅳ. 맺음말 제8장 정온(鄭蘊)의 절의정신 Ⅰ. 거창지역의 유학 전통 Ⅱ. 정온(鄭蘊)의 절의정신 Ⅲ. 맺음말 제9장 박여량(朴汝樑)의 지취(志趣)와 문학 Ⅰ. 머리말 Ⅱ. 지취와 학문정신 1. 삶의 여정과 지취 2. 학문정신 3. 인물성격 Ⅲ. 시문학의 세계와 특징 1. 시문학 개관 2. 시세계의 특징 Ⅳ. 맺음말 제10장 박태무(朴泰茂)의 삶과 시세계 Ⅰ. 머리말 Ⅱ. 현실대응과 삶의 지취(志趣) Ⅲ. 관물우의(觀物寓意)와 존심양성(養心養性)의 문학 Ⅳ. 시세계의 주요 특징 1. 이상과 현실의 갈등 2. 자연과의 합일, 그리고 은거자락 3. 독서감흥과 심신수양 Ⅴ. 맺음말 제11장 곽종석의 「입덕문부(入德門賦)」에 대하여 Ⅰ. 문제의 소재 Ⅱ. 시대상황과 창작배경 1. 시대상황 2. 창작배경 Ⅲ. 「입덕문부」의 구성방식과 작가의식 1. 구성방식 2. 작가의식 Ⅳ. 맺음말 찾아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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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 조식은 우리 역사상 가장 성공한 교육자라고 알려져 있다. 조선의 성리학이 활짝 꽃피기 시작할 때, 그의 문하에 130여 명이 찾아가 학문을 질정하고 강론하였다. 요즘말로 하자면 남명의 문하에서 박사가 1백여 명쯤 배출된 것이다. 오늘날 아무리 대단한 학자라 할지라도 문하에서 박사를 1백여 명 배출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더 특이한 사실이 있다. 남명이 살던 시대는 한 마디로 사화로 전형화 할 수 있다. 사화기를 살던 지식인들은 자신의 존재방식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였고, 권간(權奸)과 외척(外戚)의 전횡에 대해 맞서며 시대정신을 고취시켰다. 이런 사화기의 시대상황 속에서 한양에서 청풍으로 이름이 난 젊은 선비 최영경(崔永慶)이 천리 길을 멀다 않고 지리산 산속에 은거하고 있던 남명을 찾아 내려온 것이다. 최영경은 남명을 찾아와 며칠 이야기를 나눈 뒤 그의 학덕에 매료되어 제자의 예를 갖추었으며, 지리산 덕산으로 이사를 하였다. 이는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사회기에 나타난 엄청난 사건이다. 그것은 한양 최고의 젊은 학자가 지방으로 유학을 온 제1호였다는 점이다. 전통시대에도 지금처럼 부와 권력은 물론 정보와 지식이 모두 수도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래서 모두 한양으로 유학을 하고, 한양에서 벼슬살이하기를 희망하였다. 그런데 한양 출신으로 명성이 자자하던 젊은 학자가 지리산 산속으로 유학을 온 것이다. 학문의 지방화시대를 연 장본인이 바로 남명이었으니, 가장 성공한 교육자가 아니겠는가. 남명이 일찍이 경상우도에 은거를 하여 1백여 명의 박사급 제자를 길러냄으로써 이 지역은 일시에 학문이 울창하게 일어났다. 그리고 퇴계도 만년에 안동 도산으로 물러나 후학을 양성함으로써 경상좌도에도 동시에 학문이 크게 일어났다. 퇴계와 남명, 이 두 분에 의해 16세기 경상도 전 지역이 우리나라 제일의 학문의 고장이 되어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 불리게 되었으니, 우리 역사상 이는 3천 년 이래 일대사건이 아닐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