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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제1장 중국 역대 수도의 유형과 사회변화: ‘당송변혁기’를 중심으로 Ⅰ. 문제제기: 수도의 유형 Ⅱ. 장안형: ‘근거지’로서의 경기경영 Ⅲ. 개봉형: 경제수도 Ⅳ. 도성구조의 변화: 통제도시에서 유통도시로 결론 제2장 분열시대 각 왕조의 수도 선정과 그 의미: 위진·남북조시대의 낙양과 업도 서론 Ⅰ. 낙양과 업도: 그 상쟁의 400년 Ⅱ. ‘천하지중’과 천험의 조건 Ⅲ. ‘근거지’와 경제적 선진지대 Ⅳ. 호·한 종족문제와 수도 결론 제3장 『주례』 고공기의 ‘영국’ 원칙과 전한 장안성의 구조 서론 Ⅰ. 『주례』 고공기·장인·영국조의 내용과 그 현장 Ⅱ. 단성구조와 ‘자연’도성으로서의 전한 장안성 결론 제4장 후한 낙양성의 구조와 도성 포국: 정전 숭덕전(崇德殿)의 위치를 중심으로 서론 Ⅰ. 후한 낙양성의 축조와 구조적 특징 1. 낙양 대성의 축조 2. 남·북 양궁체계의 성립과 그 우월문제 Ⅱ. 숭덕전의 위치와 당시상황 결론 제5장 위왕국(魏王國)의 업성(업城)과 그 성시구조: ‘궁북(宮北) 도성’구조의 개시론에 대한 검토 서론 Ⅰ. 업의 성시로서의 성장과 왕도(王都)·제도(帝都)문제 1. 성시로서의 업의 역사 2. 조조(曹操)의 정치적 지위와 업성의 건축물 Ⅱ. 업성의 규획과 구조 1. 규획상의 구조 2. 중축선과 종묘·원구 3. 이방(里坊)의 문제 Ⅲ. 군진(軍鎭)으로서의 업성 1. 삼대(三臺)와 전군동(轉軍洞) 2. 사가(士家)제도와 업성 결론 제6장 위진·북위 낙양성의 궁성 위치와 도성 포국 서론 Ⅰ. 조위 낙양성과 남·북궁문제 Ⅱ. 고고발굴과 그 결과: 위진·북위 태극전의 유지 발굴과 위진 태극전 위치의 문제 Ⅲ. 조위 낙양궁 건설과정에서의 건시전의 존재형태 Ⅳ. 조위 명제 때의 태극전 건축 위치와 남·북궁문제 Ⅴ. 덕양전 터의 태극전 건축설과 그 문제점 Ⅵ. 위진 낙양성 태극전의 위치와 선양문 Ⅶ. 위진?북위 낙양성 궁성의 변동과 그 의미 결론 제7장 동진·남조 건강성의 도성구조: 오호십육국·북조·수당계열왕조의 도성과 비교하여 문제제기 Ⅰ. 건강성의 입지와 경영방식 1. 건강성의 입지조건 2. 건강성의 성곽구조 Ⅱ. 건강성의 내부구조와 그 특징 1. ‘궁북시남(宮北市南)’의 구조문제 2. 금원의 기능문제 3. ‘방장제’의 실시여부문제 Ⅲ. 북위 낙양성과 건강성의 관련성: 장소유(蔣少游)가 그려 온 도화의 내용 결론 참고문헌 中文摘要 찾아보기 |
朴漢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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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왜 중국왕조의 도성이 장안에서 개봉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는가? 당초 한이 장안에 수도를 정하였을 때는 전국 인구의 거의 3/10이, 재부의 6/10이 관중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나 장안을 둘러싼 관중의 경제력이 전국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현저하게 작아지기 시작했다. 인구는 늘어나는데 생산력은 여러 가지 요인으로 줄어들었다. 이미 그곳에 거주하는 인구를 먹여 살릴 수도 없을 정도였다. 그 경제력을 가지고는 통일국가를 통치할 수는 힘, 즉 경제력이 되지 못할 뿐만이 아니라 웅크리고 있을 수도 없는 것이다. 전국이 고르게 개발이 되었고, 특히 강남의 경제 비중이 막중해져 갔다. 개봉은 운하교통의 중심에 위치했다. 전국의 경제력을 집합시킬 가장 적합한 장소였다. 개봉에 수도를 둔 송은 소위 ‘재정국가’답게 자연의 험[以山川爲險]에 의존하기보다, 경제력으로 병력을 증가시키는[以兵爲險] 방식으로 변화를 시도하였다. --- p.53
다음으로 전한 장안성의 구조를 보면 『주례』의 4원칙 가운데 ‘후시’의 원칙을 제외하면 거기에 부합하는 것이 별로 없다는 점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전한 장안성의 성문의 숫자 및 배열 도로의 배열 등 성곽구조에서는 『주례』의 원칙에 부합했고, 후세에 많은 영향을 준 것은 확실하다. 평면적으로 방형이고 경위가 상등하며 12개 성문이 사면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고, 각 면마다 3개의 성문이 있고, 성문마다 3조의 문도가 있고, 그 너비가 거궤로 계산된 것도 『주례』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즉 전한 장안성은 『주례』의 원칙이 어느 정도 작용한 것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전한 장안성의 구조를 검토할 때 가장 먼저 감안해야 할 점은 그것이 계획도시가 아니고 자연도성이었기 때문에 건설의 대원칙을 먼저 세웠다 하더라도 그것이 일관되게 준수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여겨졌다. 아울러 성곽 복성구조를 취했던 수당 장안성과 비교할 때 전한 장안성은 단성구조였다는 점이 양자 사이의 큰 차이였다. --- p.144 이와 같은 소위 삼투성의 출현이 유목민족의 중원진입과 연관시켜 설명되고 있다는 점이다. 북위 낙양성 이후 동위-북제 업도 남성도 궁성-내성-외곽으로 구분된 삼투성의 형태를 보이고 있다. 즉 삼투성은 북위 평성에서 명확하게 보이기 시작하여 수당 장안성에서 완성된 모습을 보이게 된 것이다. 이처럼 삼투성은 북위 평성→낙양→동위·북제 업도→수당 장안성으로 연결되는 호족계열 도성의 특징적 형태였다. 이처럼 궁전이 북쪽 중앙으로 밀린 것은 인주가 직접 인민에 둘러싸여 포위되지 않기 위한 구도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궁성과 황성을 거쳐 외곽성을 양분하는 중축선이 설정되고 인민의 주거지역에 방장제가 실시되어 온 도성이 질서정연한 규격을 갖게 된 것이 북위 평성에서 시작하여 북위 낙양성에서 어느 정도 확실해졌고 이런 형식이 수당 장안성으로 연결되었다고 할 수 있다. --- p.3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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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대 도성 가운데 도성의 대명사라고 불릴 만큼 독특한 위치를 점하는 수당 장안성의 도성구조는 호한체제적인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저자는 수당 장안성이 중국고대 도성의 유산을 물려받았지만 동시에 외래적인 호(胡)적인 요소를 받아들여 새로운 도성 양식을 완성시켰다고 보았다.
저자는 이 논지를 증명하기 위해 먼저 중국고대 도성이 어떤 이론과 원칙에 의해 건설되었는가의 문제를 다루었다. 중국 고대 도성 건설의 이론으로서 『주례』 고공기 장인 영국조 원칙이 제시된 바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도성이 그 모델이 되었는가를 이 책에서 살펴볼 수 있다. 아울러 수당 장안성의 궁성위치가 편북(偏北)하게 된 요인을 한인 전통 도성에서 찾으려는 최근의 학계 움직임에 대하여 그 부당성을 서술하고 호족적인 요인이 더 많았음을 강조하였다. 아울러 육조(오-동진-남조)도성의 형제가 북조-수당 도성 형제에 영향을 주었다는 기존 학자들의 주장에 대해 그렇지 않다는 점을 논술·반박하였다. 이 문제를 다각적으로 검토하기 위해 저자는 중국 고대도성이 어떤 지형적 조건을 택하여 위치하게 되었는가를 살펴보았다. 저자는 중국 역대왕조들이 건축한 도성들이 당송변혁기를 기점으로 입지의 유형이 완전히 변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자연적인 조건을 배경으로 하여 도성이 강간약지(强幹弱枝)정책을 바탕으로 그 왕조 흥망의 ‘근거지’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장안형이라면, 병력에 의지하여 수도를 방어하는 평원형의 도성을 개봉형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근거지란 국토의 일부분이 일시적으로 반란에 휩싸이더라도 도성이 지닌 힘으로 다시 원상회복시킬 수 있는 지역을 지칭한다. 반면 평원형은 도성이 국토의 중앙에 있어 경제활동의 중심으로 사통팔달하는 지역으로 도성과 국가 운영의 비용을 낮출 수 있는 지역이라는 것이다. 낙양은 장안형에서 개봉형으로 바뀌어 가는 과도기적 도성의 입지여건을 가지고 있다고 파악했다. 아울러 분열시기에 선택된 도성의 입지에 대해서도 논술하였다. 중국 도성 형태와 입지 변화의 원인 저자는 이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자면 중국고대 도성이 어떤 원칙에서 건설되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고 보았다. 한족 중심의 왕조에서는 『주례』 고공기 장인 영국조 원칙에 의거해 궁궐 북쪽에 시장이 있고 궁궐은 도성의 중앙에 있는 형태로 도성 건설이 이루어졌고 그 대표적인 것이 동주의 도성(낙양성)과 전국시대 제국의 도성(임치성)이라 보았다. 그러나 『주례』 고공기의 형제는 전한 장안성의 성문 수 등 일부에 반영되었지만 고착되지 못하였다,.그런데 오호십육국에서부터 새로운 변화가 시작되어 북위의 낙양성, 동위-북제의 업성을 거쳐 수당 장안성에 이르면 궁북시남(宮北市南)의 형태와 도성북쪽에 대규모 원유가 있는 형태로 바뀐다는 것이다. 이 점의 원인에 대해 기존 학자들은 한인전통에서 찾다보니 일관적이고 합리적인 설명을 할 수 없었다. 박한제 교수는 이 점을 호한문화의 융합으로 해결하였다. 즉 농경민과 다른 유목민의 전통과 습성이 도성의 형태를 변화시켰다는 것이다. 즉 약탈경제적 특성을 지닌 북방호족이 중원에 진입하면서 군주의 안전을 도모하는 차원에서 궁궐을 유사시 적대적 인민에게 포위되지 않도록 도성의 중앙이 아닌 북방에 배치하였고 궁의 북쪽에 대규모의 원유(苑?)를 두어 군대를 주둔시킴으로써 유사시 군주의 피난과 대외출병의 전초기지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호십육국뿐만 아니라 수당의 도성도 호족(胡族)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위진시대에는 성북에 시장이 존재하였는 데 비해 북위 낙양성은 성북에 시장이 없고, 성벽 앞까지 궁관이 건축되어 있었다는 고고발굴에 주목하며 궁성이 도성 북쪽에 위치하게 된 것은 북위 낙양성부터라는 기왕의 학설을 유지 보완하였다. 반면 오-동진-남조의 건강성은 외형적으로 궁북시남처럼 보이지만 사실 계획적으로 설계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건강성은 천험(天險)의 방어조건을 갖춘 도성이었음을 논증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