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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너무나 오랜 세월 생각에 물들어버린 나머지 자기 자신을 잊어버렸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한다. 너무나 익숙해서 귀기울이지 않았기에 까마득히 잊어버린 것이다. 너무나 익숙해서 너무나 낯선 것들에 대한 기억들을 되살려야 한다.
--- p.29 참선을 하는 것은 삶의 지복감을 누리는 것이 아니다. 그런 지복감이라던지, 행복이라던지, 불행이라던지, 괴로움, 환희, 선과 악, 미와 추, 그 모든 것들이 결국 하나의 이야기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임을 알게 되는 것’은 우리를 이야기와 직면하게 해줄 뿐 이야기로부터 떠나게 해주지는 않는다. 참선은 모든 것과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세계의 날 것, 삶의 날 것, 죽음의 날 것, 행복의 날 것과 불행의 날 것, 괴로움의 날 것과 즐거움의 날 것 그 양쪽을 모두 마주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낭만적인 영성이나 달콤한 힐링 같은 것이 없다. 여기에는 그저 그러함이 있을 뿐이다. ‘그저 그러함’. 그것이 이것의 전부다. --- p.88 몸이 있고 삶이 있다면 때론 웃고 울고 또 때론 기뻐하고 슬퍼할 수 있는 것이다. 인연이 그러하면 또 때로는 치졸할 수도 있는 것이고 변명할 수도 있는 것이고 비겁한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수행을 이야기하며 희노애락을 두려워하고 삶을 두려워한다. 수행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삶에 폭력을 가한다. 삶이 도대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허파는 스스로 호흡하고 위장도 스스로 운동하며 뇌 또한 스스로 생각을 만든다. 모든 것들이 스스로가 알아서 흘러가고 있는데 정작 스스로가 그것을 붙잡은 채 놓지 않을 뿐이다. --- p.91 불교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많은 선사들이 선을 이야기하고 깨달음을 이야기하며, 이 선의 정신으로 세계의 전쟁과 가난과 범죄를 불식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세상에 만연한 갈등이 선으로 융해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선사들은 정신을 개벽하자고도 이야기했고, 깨달아서 이 세계를 극락정토로 만들어야 한다고도 이야기했다. 글쎄, 나는 이런 이야기들에 조금 회의적이다. 일본의 깨달음을 얻은 선사이자 스즈키 다이세츠의 스승이었던 소엔은 톨스토이의 러일전쟁 반전운동 제의를 거절했다. “양립할 수 없는 것들 사이에 조화를 일으키는 수단으로 살생과 전쟁은 필요한 것이오.” 소엔은 그렇게 살인과 전쟁을 정당화했다. 실제 태평양전쟁 당시 꽤나 많은 ‘깨달은’ 선승들이 군국주의를 찬양하고 전쟁을 선전했다. 삼보교단의 창시자였던 야스타니 하쿤 선사 또한 대표적인 군국주의자였고, 별로 보지도 못했을 지구 반대편의 유대인들을 극렬히 증오하기도 했다. --- p.118 “고기가 용이 됨에 비늘을 바꾸지 않고, 범부가 성인이 됨에 얼굴을 고치지 않는다.” 깨달음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은 깨달음을 통해 자신을 바꾸려 한다. 자신의 심리상태라던가, 현실적인 문제들, 인격적인 부분, 도덕성, 생리학적 습관들마저도 바꾸려 한다.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깨달음 뒤에도 긴긴 수련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깨달음이란 번뇌를 끊는 일도 아니고 욕망을 절멸하는 일도 아니다. 깨달음은 번뇌의 바탕, 욕망의 바탕, 모든 것들이 발 딛고선 그 바탕을 눈치채는 것이다. --- p.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