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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
연단 교실 광장 거리 쇼핑센터 여행지 장례식장 화장실 일터 헬스클럽 파티장 회의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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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가 의미 있으려면 소속감을 느끼고 나를 인정받는 곳이어야 한다. ‘소속감’을 느끼려면 동료가 있어 야 한다. 나의 부엌에는 그런 것이 없었기에 끔찍한 고립의 장소였고, 거기서의 경험은 나누거나 전승할 수 있는 경험이 아니라 신세 한탄이 될 뿐이었다. “나 이렇게 힘들었어”라고 운을 뗄 때마다 ‘또 시작이네’라는 눈총을 받는 이야기는 경험으로 전승될 수 없다. 바깥사람, 바깥일 하는 사람은 ‘돌아갈 집’, ‘기다리는 집밥’을 생각하며 버틴다지만, 부엌에 매인 사람에게는 돌아갈 곳이 없다. 안락을 낳는 장소에서 거기에 속한 사람은 정작 안락이 없다.
--- 「부엌」중에서 긴장 속에서 연단에 설 때마다 두려움과는 다른 어떤 울렁거림도 있다. 그건 연단의 역사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연단에 등장할 수 있기 위해 숱한 이들이 모욕감과 두려움의 자갈길을 밟아 왔다. ‘물러나는’ 것으로 사회 안에 머무르는 것을 허락받는 삶을 버리고, ‘튀어나오는’ 도발을 멈추지 않았기에 지금 나의 자리가 연단에 마련될 수 있었다. 여성들은 무리를 지었고, 금지된 장소를 점거했고, 문제의 장소를 원래 정해진 것과 다른 방식으로 사용했고, 어떤 장소를 버리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연단에서 끌려 내려온 일은 얼마나 많았던가. --- 「연단」중에서 내가 자라면서 본 할리우드 영화들 속에서 여성들의 여행은 부자 애인을 만나 결혼하기(신데렐라 되기), 사랑의 도피행(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는), 혹은 폭력 남편이나 죽음의 위협 등 절박한 위험으로부터 도망치는 ‘장소 벗어나기’였다. “여기서 나가자( get out of here)”가 할리우드 영화에서 제일 많이 쓰인 대사라는데, 여성들 여행의 시작도 ‘일단 여기를 벗어나자’가 아니었을까. --- 「여행지」중에서 빈소는 글자 그대로의 뜻으로는 ‘상을 당하여 상여가 나갈 때까지 관을 놓아두는 곳’이다. 하지만 나는 그 글자에서 ‘텅 빈’ 장소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비어 있는 곳에서 벌어지는 장소 투쟁, 역할과 지위의 투쟁이라니, 뭔가 허탈하다. 상호 평등에 기초해 구성되고 유지되는 관계가 아니라 지정된 역할에 따른 차별적인 관계가 더 불거지는 곳, 사람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장소를 둘러싼 싸움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인가? --- 「장례식장」중에서 모든 혐오는 ‘제 장소를 벗어나 있다’고 느끼는 데서 시작된다. 모든 것에는 제자리가 있기에 벗어난 것 은 뭔가 오염되고 불결한 것이 된다. 오랜 세월, 집 ‘밖’에 나가 일하는 여성은 제 장소를 벗어난 존재로 취급됐고, 일하는 당사자는 ‘바깥’ 노동을 수치스럽게 받아들여야 했다. 여성이 밖에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은 충분히 부양받고 있지 못하다는 신호였고, ‘안’에 있어야 할 것이 ‘밖’에 있는 것은 뭔가 이상한 것이 돼 버린다. “일 나간대”라는 말이 여성과 붙어 쓰이면 무슨 ‘탈선’의 증거인 양 수군거려졌다. ‘직업여성’이란 희한한 말이 통용되기도 했다. 이 말은 성매매에 종사하는 여성을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제 장소에 있지 않다고 지목된 여성과 제 장소에 있는 여성(‘주부’)을 가르는 말로 ‘직업’이란 게 쓰였다는 게 괴이하다. --- 「일터」중에서 그런 자리에서 여성은 전통적으로 남성이 여성을 갈라 온 이중 잣대인 ‘창녀’와 ‘요조숙녀’ 사이에서 갈등한다. ‘파티 걸’ 역할을 잘하는 여성을 보면, 묘한 이중 감정을 느낀다. 질시와 거북함이 교차한다. 여성은 잘 끼어 놀아도 욕을 먹고 안 끼어도 욕을 먹는다. 사회적 유대와 관계의 장에서 배제되는 건, 내 개별성 때문이 아니라 여성이라는 사회적 지위 때문임을 실감하게 된다. --- 「파티장」중에서 |
일상을 보는 다른 관점
페미니즘프레임 오늘날 페미니즘은 그것을 옹호하든 배격하든 우리 사회에서 완전히 외면할 수 없는 세계관이 되었다. 한편 여전히 왜곡되거나 오해되고 있다는 점에서 더 많이 말해지고 더 깊게 탐구되어야 할 담론이기도 하다. 우리에게는 학문이나 운동으로서의 페미니즘뿐만 아니라 다양한 위치와 상황에서 경험되는 구체적인 서사로서의 페미니즘도 필요하다. 낮은산에서 새롭게 출간하는 ‘페미니즘프레임’은 우리 자신과 일상을 ‘페미니즘’이라는 프레임을 통해 다르게, 더 깊게, 정확하게 들여다보려는 인문 시리즈이다. 몸, 장소, 결혼, 식탁, 이미지, 사물 등 익숙한 주제들을 젠더 관점으로 낯설게 봄으로써 일상 곳곳에 밴, 너무 자연스러워 오히려 지나치기 쉬운 불평등들을 짚어가고자 한다. 여성들이 종종 경험하는 개운치 않은 느낌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차별과 혐오가 우리 삶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아가는 한편, 우리 자신과 세계를 보는 새로운 시선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같은 공간에서 다른 장소를 살아가는 사람들 페미니즘프레임 시리즈의 각 권 목차는 심플하다. 권 주제와 연관된 13개 내외의 키워드가 하나하나의 독립적인 소주제이자, 책의 뼈대이다. 첫 번째 권 『여자들은 다른 장소를 살아간다』는 일상의 ‘장소’들이 성별이나 계층에 따라 어떻게 다르게 펼쳐지는지 살펴본다. 부엌, 연단, 교실, 광장, 거리, 쇼핑센터, 여행지, 장례식장, 화장실, 일터, 헬스클럽, 파티장, 회의장 등 일상에서 누구나 머물고 경험하는 장소들이 ‘페미니즘’의 무대가 된다. “장소는 인간 삶에서 중립적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는 쾌적하고 편리한 공간이 누구에게는 지긋지긋한 곳일 수 있다. 동일한 공간을 무대로 하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아주 다른 ‘장소’를 살아간다. 장소는 경험이 일어나고 무르익는 곳인데, 성별?나이?계층 등에 따라 특정 공간에서 맺는 관계와 역할이 다르기 때문이다.” 밥 먹으러 가는 사람과 밥 해주러 가야 하는 사람의 부엌은 같을 수 없다. 같은 거리라도 활보의 자유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건 아니다.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한국 여성들에게 공중화장실은 언제든 살해당할 수 있다는 공포를 일으키는 장소다.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이면서 “노는 존재(호모 루덴스)”라지만, ‘논다’는 말이 칭찬이 되는 성별이 있고, 낙인이자 비난이 되는 성별이 있다. 살아남은 자들과 죽은 자들이 ‘겹치’는 장례식장에서조차 상실과 애도의 평등은 요원하다. 어디든 갈 수 있고 어디든 나의 장소로 삼을 수 있다 여성이 ‘다자(the many)’라는 말은 여자들이 서로 다르며 다양하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누구도 ‘일자(the one)’가 아니며 다양한 정체성을 지닌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책의 저자 류은숙은 인권활동가이며 연단에 서는 사람이자 여행하는 사람이다. 14년간 식당 노동자였고, 비혼 여성이며, 매일같이 피트니스에서 몸을 단련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저자는 상황과 위치에 따라 겪는 장소 차별과 폭력을 개인적인 경험으로 풀어내면서도, 묵직한 문제의식을 솜씨 좋게 연결해 나간다. 식당 동료들이 가장 싫어하는 ‘진상’ 손님이 “밥때 지 집 가서 밥 안 하고 식당에서 밥 먹고 있는 여자들”이라는 경험에서 저자는 “여성은 ’먹이는‘ 사람이지, 남이 해 준 음식을 ’받아먹는‘ 사람이 아니”라는 질긴 규범과 여성이 있어야 할 곳을 지정하는 폭력의 정점을 본다. 혼자 여행을 갈 때면 “남편 어디 두고 왔어요?”라는 질문을 받거나 자살 시도자로 취급받으면서 느끼는 모멸감을 이주자, 망명자, 난민 등 장소를 떠난 몸들이 갖는 취약성에 대한 사유로 이어 간다. 저자는 여성은 “숭고하거나 존경스럽지도 않고 마냥 불쌍하거나 가련한 것도 아니”라면서, “슈퍼우먼, 알파걸이 아니라” 평범한 여성들이 ’자기 장소‘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희생자도 영웅도 아니다. 생계를 위해서나 내 삶의 가치를 위해서나 이곳이 필요하고, 나는 이곳에서 맺는 관계에서 정당한 대접을 원한다. 나는 제 장소를 벗어난 것이 아니라 어디든 갈 수 있고 어디든 나의 장소로 삼을 수 있다.” ’여성‘과 ’장소‘ 사이에 놓인 주목할 만한 사유의 다리 장소는 물리적인 공간만 가리키지 않는다. 거기서 맺는 관계를 포함하면서 그것을 무대로 펼쳐지는 상호작용에 따라 ‘출렁이는’ 공간이다. 그러니 어떤 장소에 ‘등장’했다고 온전히 자기 장소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장소를 가지려면 다양한 분투가 요구된다. 여성들은 의자를, 화장실을, 연단을 쟁취하기 위해 숱한 싸움을 해왔다. 말하기 위해 온 사회를 회의장으로 만들어온 것은 여성운동의 역사이기도 하다. 어떤 장소는 박차고 나오기 위해, 어떤 장소는 온전히 속하기 위해 이중의 투쟁을 여전히 지속 중이다. 그렇기에 여자들에게는 사회 전체가 커다란 부엌이고, 일터이며, 광장이다. 이 책에서 저자 류은숙은 인권활동가로서의 오랜 연구와 다양한 개인적 경험을 페미니즘 관점으로 빚어 여성이 일상의 장소 곳곳에서 어떻게 ‘다르게’ 살아가고 있는지 유려하게 풀어냈다.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언어로, 쉽지 않은 주제인 ‘여성’과 ‘장소’ 사이에 주목할 만한 사유의 다리 하나를 놓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