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쇳돌
사라지는 세계, 사라지는 노동, 사라지는 목소리를 채굴하기
이라영
동녘 2026.02.20.
베스트
사회비평/비판 96위 사회비평/비판 top100 8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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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D 한마디

사라진 광산촌, 위령의 기록
한때 대한민국 경제의 한 축을 담당했던 광산업. 지금 광산촌은 한적하고, 25년 마지막 국영 탄광 삼척 도계광업소는 문을 닫았다. 이 책은 광산촌에서 자란 저자의 개인적 경험을 사회적 통찰로 확대한 매혹적인 논픽션이다. 광산촌을 지탱했던 여성의 목소리를 복원해낸다.
2026.03.13. 손민규 사회정치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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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서문 “다 죽었지” 37

1부 철광산을 중심으로 살펴본

어느 가정의 노동이동사
1장 광산촌 49
. 자철 광산, 양양광업소 49
. 장승리에 오다 52
2장 선광부 56
. 땅속의 여자들 56
. 쇳돌 고르는 여자들, 선광부 60
. “거기 맨 젊은 여자지” 63
. 어둠 속, 여성의 밝은 노동 66
. 보물 같은 정조와 돌봄 70
. 가출하는 여자들 : 영희, 성미, 금숙, 미영 그리고…… 73
3장 잡역부 77
. 폐석장 77
. 광석이 다니는 길 81
4장 채광과 궤도부 86
5장 진짜 일을 구할 때까지만 92
6장 연좌제, 비국민 만들기 98
. “다 지켜보고 있어” 98
. 미아리고개 101
. 제 아버지를 사망자로 만들기 104
. 비국민 희생자 서사 109
7장 노조로 향하기 116
. 노조에 미쳐서 116
. “그때는 다 어용” 119
. 삼겹살과 5 ·17 122
. 정화조치 125
. 노조에 자리하기 129
8장 여자들의 부업 133
. 인형 옷 만들기 133
. 구멍가게 135
. 뜨개질 138
9장 폭력과 배신, 억울함 143
. “서러워 마라” 143
. 출장 146
. 1987년 148
10장 속초항 153
. 철광석이 떠나는 항구 153
. 철광석을 나르는 트럭 157
. 감시 159
11장 양양을 떠나기 166
. “광산과 노조에서 너희를 분리시키려고” 166
. “여기서는 말조심해야 해” 172
. 양양하와이 178
. 대물림의 고리를 끊기 181
12장 하숙촌 185
. 라스베가스의 여자들 185
. “내 밥 먹은 애들” 195
13장 들불처럼 번지는 노동자대투쟁 201
. 그때 분위기 201
. “그때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 나” 207
. 첫 민주 노조 위원장 214
14장 언니들 219
. 미스 혹은 양 219
. “말은 안 하지만 다 보고 있었지” 221
15장 밥상의 민주화 225
. 점심을 달라 225
. 도시락 노동 227
. 돼지고기 232
. 광부 밥상이라는 소재 237
16장 땅속의 시간과 공간의 정치 242
. “우리는 언제 해를 보냐!” 242
. 값싼 수입 철 247
. 석탄산업합리화 250
17장 광산이 닫히다 254
. 소문과 희망 254
. “똑똑한 사람들은 다 떠났지” 258
. “이제 다 같이 전사하는 거야” 261
. “부인들이 다 나와 있었지” 267

2부 광산 이후의 삶

1장 직업을 바꾸며 277
. 실직 277
. 차를 닦다 280
. 주택관리사 283
. 어머니의 밥, 밥, 밥…… 287
2장 스스로 위로하기 290
. 나만 겪는 일이 아니야 290
. 서울 사람 되기 293
. “우리는 공동체를 생각해” 296
. 일상의 싸움 298
. 나의 쓸모를 증명하기 302
. 서 있는 자리가 변하면 306

3부 주검 위에 쌓은 문명

1장 광물은 캐도 시신은 캐지 않기 311
. 노동자의 주검 311
. 증산보국增産保國 315
. “이미 다 죽어서” 319
. 조력자 아내, 금기의 대상인 여성 323
. 귀신이 되어 327
. 생환이 주는 감동 331
. 위령제, 죽음을 사회적으로 기억하기 336
. 죽음과 동료애, “언제 사망할지 모르니까” 339
2장 노동의 몸 346
. 기침과 위장병 346
. 보람에 산다 350
. 우리는 산업폐기물이 아니다 352
3장 광산문학에서의 재해 357
. 분노의 도화선이 되는 사고 357
. 〈인두지주〉: 비인간으로서의 노동자, 몸과 말 361
. 혀가 없는 인간 365

4부 목소리들, 들을 수 있을 때 듣기

1장 이중기, 1943년생: “죽어도 여기서 죽지” 375
. “보청기 빼면 아무것도 못 들어” 375
. 전쟁의 기억들 377
. 광업소 훈련생 379
. “다들 그렇게 어렵지” 382
. 양양을 떠나지 않기 384
. “그냥 아내라고 해주세요” 386
2장 이인수, 1952년생: 광업은 내게 하늘이 준 직업 389
. 48년의 광업 인생 389
. 백운석 광산 392
. 채굴노동자에서 현장을 관리하는 소장으로 396
. 광산은 하늘이 준 직업 401
. “노동자의 노 자도 싹 잊었어” 405
. 다슬기국을 먹으며 407
. ‘인수 아줌마’ 김주영, 1957년생 410
3장 김기영, 1947년생: “고한의 산증인이죠” 415
. 라미란은 어떻게 고한 금융권에서 날렸을까 415
. “고한의 산증인이죠” 417
. “노가다 일을 엄청 했죠” 420
. “하필이면 이 광산촌 골짜기에” 422
. “강원랜드가 내 인생에서 최고 황금기” 424
. “가끔 교실에서 공부하는 꿈을 꿨었어요” 428
. “출세하면 고향에 가지 말라 그랬어” 430
. “지금은 터를 잘 잡았다 생각하지” 434
. 900항 앞에서 437
4장 김신애, 1984년생: “광부의 딸, 나를 찾아 돌아왔다” 441
. 귀향의 엘리트적 서사 441
. 물닭갈비를 먹으며 443
. 탈출하고 귀환하기, “나를 찾아서 돌아왔다” 446
. 정신적 유전 449
. 보이지 않는 문턱 452
. “광산은, 함부로 건드릴 수 없어요” 454
. 강원랜드 이후 457
5장 그리고 광부댁들: 빨래터 수다를 증언과 연대의 목소리로 462
. “정선아리랑 다 할 줄 알아요” 462
. 서울의 봄과 탄광촌의 봄 466
. 전국의 모든 광부댁 470
. 고통의 연대, 기억의 연결, 이산이 연대가 될 때 473
. 우리 이야기 477
6장 지금. 여기의 광산 481
. “요즘은 안전점검 나오는 사람들도 여자야” 481
. 마늘과 석회석 482
. 생산 원가의 구조 486
. “광산에 사람이 부족한 게 아니라, 사람이 광산을 기피하죠” 489
. 스마트마인? 무전이 중요해! 494
. 인식 개선의 필요 495
. 어둠이 아니라 암흑 499
. 산초 두부를 먹으며 507

5부 ‘없어질 직업’의 사람들

1장 노동이동 511
2장 “어차피 없어질 직업” 515
. 사라지지 않는다 515
. 막장, 노동의 장소가 윤리적 비난의 언어로 519
3장 닫히는 광산, 열리는 광산 524
. 정동진, ‘성공적으로’ 사라지다 524
. 광명, 황금 동굴이 되다 529
. 동해, 거대한 테마파크가 된 노천 광산 531
. 철암, 남겨야 하나, 부숴야 하나 535
. 보령, 꽃 피는 탄광마을 539
. 정선, 기억은 문화가 되어 541
. 문경, 생태를 화두로 546
. 도계, 반복되는 폐광 투쟁 550
. 철강왕을 만들어낸 붉은 땅 554
. 채굴은 멈추지 않는다 558
4장 함께 가지 못하는 정치 562
5장 부고들: 다들 일찍 죽었어 570
6장 살아가는 사람들 577

나오며 다시 장승리에서 584
이 책을 쓰기까지 아래로부터, 변두리에서, 경계선의 역사 594
감사의 글 622
참고자료 627
찾아보기 636

저자 소개1

LEE Ra-Young

예술사회학 연구자. 문화평론가. 예술과 정치, 그리고 먹을 것을 고민한다. 지은 책으로 『말을 부수는 말』, 『환대받을 권리, 환대할 용기』, 『진짜 페미니스트는 없다』, 『타락한 저항』, 『정치적인 식탁』, 『폭력의 진부함』, 『여자를 위해 대신 생각해줄 필요는 없다』 등이 있다. 『비거닝』과 『여자를 모욕하는 걸작들』에 공저자로, 『우리는 다 태워버릴 것이다』에 공역자로, 연극 [식사]에 공동 창작자로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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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6년 02월 20일
쪽수, 무게, 크기
640쪽 | 832g | 150*215*35mm
ISBN13
9788972972006

책 속으로

세상이 변화하고 발전하면서 직업도 사라지고 새로 생겨난다. 어떤 직종은 어차피 ‘없어질 직업’이기에 사라지는 수순으로 가는 게 자연스럽게 여겨진다. 그러나 직업이 사라진다고 해서 그 일을 하는 사람이 사라지진 않는다. 직업은 사라져도 사람들은 사라지지 않고 어딘가로 꾸준히 이동한다. 그들이 다 죽을 때까지 사회가 그들의 이동 경로에 무심할 뿐 사람들 대부분은 사는 동안 꾸준히 일을 바꿔가며 생존한다. 무언가를 ‘이루는’ 삶이 아니라 ‘견디는’ 삶은 이름 없이 소멸하고, 이 삶의 경력은 무수한 노동으로 채워진다.
--- p.46~47

광업소와 여성 일자리를 연결 짓기는 어려웠다. 거기에서 젊은 여자가 뭘 하냐고 물으니 아버지는 당연하다는 듯 “거기 맨 젊은 여자지”라고 대꾸했다. 쇳돌 고르는 작업은 거의 여자들의 일이었다. 바로 선광부다.
--- p.54

“아니, 할아버지가 왜 서대문형무소에 갔냐니까?”라고 재차 물어보면 “그게 다 관련이 있는 거야”라며 거대한 역사 속에서 제 아버지의 위치를 해석하려 애쓴다.“ (중략) 개인의 삶을 역사 속에서 해석하고 이해하는 방식이 아버지에게는 꽤 익숙해 보인다. 나는 이 점이 남성 중심의 역사와 문학적 서사를 다양하게 접한 개인이 체득한 말하기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고모나 어머니는 상대적으로 그렇지 않았다. 고모는 숨으려 했으나 흘러넘치는 분노의 말을 주체하지 못해 끝내 붕괴되고 미쳐버렸다. 어머니는 지금도 “옛날 이야기 하기 싫다”라며 외면하는 선택을 한다.
--- p.100~101

나는 동네에서 정말로 가사만 하는 여성을 거의 본 적이 없다. 농사를 짓거나 시내에서 장사를 했다. 가게나 논밭이 없는 보통의 여성들은 대부분 집 안에서 부업을 했다.
--- p.141

노조라면 진저리를 치는 어머니는 단지 노조라는 것뿐만이 아니라 ‘광업소 노조’라서 더욱 불편해했다. 더불어 “이북이었다, 이남이었다” 했던 양양과도 선을 긋고 싶었다. 어머니가 표면적으로는 “애들 교육 때문에”라고 말하지만 그것이 실제로는 양양/광산/노조와 거리를 두기 위한 방편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 p.168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오래전 지독하게 현실에서 겪은 사람의 뇌리에서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제도는 사라져도 권력은 보이지 않게 지배의 흔적을 남긴다. 어머니 입장에서 자식을 ‘노조와 분리’시키기는 거의 생존을 위한 사명과도 같았다. 어머니는 자식들이 사회에 관심을 가질까 봐 두려워했다. 아이들이 매일 ‘투쟁’을 외치는 노래를 듣고, 아버지 가방에서 나온 머리띠를 가지고 놀고,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오는 아버지를 목격하고, “블루칼라와 화이트칼라가 뭐냐?”라는 질문을 하는 상황이 불편했다.
--- p.171

지금도 간혹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자식들이 살아있으니까 여기에서는 말조심해야 해”라고 주의를 준다. “전쟁 끝나고는 손가락질만 하면 끌고 갔잖아. 국군이 와서는 빨갱이 앞잡이였다고 총살했어”, “양양 사람들이 영악스러워. 살기 위해서 이북에 맞추고 이남에 맞추고 그래야 했잖아. 홀딱 벗겨놔도 30리는 간다 그래. 생존 능력이 강하다고”, “지금도 앞잡이 자식이 있대, 반공 자식도 있고. 그 자식들은 자연스레 원수같이. 지금도 그런 이야기 함부로 하면 안 된다고”.
--- p.178

“이전에는 그렇게 안 했거든. 직선제는 무서운 거야. 내 뒤에 노동자들이 있잖아. 회사가 함부로 못 한다고. 나는 직선제로 된 사람이니까, 나는 회사에 양보하지 않았어.” 아마도 다른 시대를 살아온 탓인지 나는 솔직히 민주 노조의 성과를 들으면서도 뭔가 싱거웠다. 그렇게 어렵게 투쟁해서 직선제로 뽑힌 노조 위원장이 되었으니 “그래서 아빠는 뭘 했어? 뭔가 획기적인 거, 그런 거 없어?”라고 물어볼 때 나는 어떤 답이 듣고 싶었을까. 나는 아버지가 자신의 성과를 과시하기 위해서라도 어떤 확실한 변화를 줬다고 강조하진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뭔가 획기적인 건 없어. 꾸준하게 싸우는 거지”라는 다소 밋밋한 답을 했다.
--- p.226~227

새벽 세차를 하고 돌아와 아침 식사 후에 아버지는 학원에 갔고 집에 와서도 내내 공부했다. 아버지는 마흔아홉 살이었다. 이 나이에 집중해서 새로운 공부를 한다는 게 쉽지 않다는 걸 나도 이제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학원을 계속 다니기에는 경제적으로 부담이 있어 종합반을 2개월만 다녔고, 회계원리만 따로 한 달을 들었다.
--- p.285

양양에서 인형 옷을 만들거나 뜨개질을 했듯이 어머니는 서울에서도 가내수공예로 일을 시작했다. 좁은 방 안에는 알록달록 다양한 색깔의 종이 끈 뭉치가 쌓여 있었다. 한 켤레에 20원 하는 이 장식용 신발을 하나라도 더 만들기 위해 마무리 리본을 묶는 일은 나와 아버지가 담당했다. 티브이를 보면서도 우리는 손에서 종이 끈을 놓지 않았다.
--- p.260

그해 여름 쌍용차 투쟁이 뉴스로 전해졌다. 아버지는 그들의 투쟁을 부정적으로 말했다. 15년 전 아버지도 그렇지 않았냐고 하자 그저 웃었다. 요즘은 노동자들이 많이 좋아졌다며, 우리 때와는 다르다고 한다. 나는 달라진 것은 아버지라고 했다. 나는 그때 한 달간 한국에 머물렀는데, 그 한 달 사이에 우리 가족은 다시 인천의 작은 빌라로 이사했다. 함께 이사를 하고 나는 다시 프랑스로 떠났다. 아버지의 생각이 조금씩 변하고 있음을 느꼈다.
--- p.307

노동자의 이주는 엘리트 지식인의 이주와는 다른 경험을 제공한다. 지식인의 이주는 뿌리 뽑히는 경험이 아니라 세계가 확장되는 경험이다. 구사할 수 있는 언어가 늘어나고 다양한 고급 문화를 체험하며 세계 시민으로의 위치를 다지게 한다. 한국의 엘리트는 자국 노동계층보다 서구의 지식인과 문화적으로 더 가깝다. 그들은 ‘동시대인’의 감각을 공유한다. 다른 자원이 있을수록 고향에 덜 집착한다. (중략) 지역민들의 이동 경로를 추적하고 노동자들을 만나 이야기하면서 내가 기존에 지녔던 향우회에 대한 생각이 조금씩 바뀌어갔다. 향우회는 노동 디아스포라가 만들어낸 산물이다.
--- p.344

노동자의 이동은 꾸준히 한 사회의 보이지 않는 세계를 오가며 보이지 않게 문명사회를 받쳐 든다. 노동계층의 이주는 특정 산업에 의지하는 구조이다. (중략) 외국인 지식인은 유치 대상이지만 외국인 노동자는 노동의 역할만 할 뿐 우리 사회에 뿌리 내리지 못하는 구조를 만든다.
--- p.345

2025년 기준 전국 16개 진폐 요양병원에서 진폐 환자들이 치료받고 있다. 이런 제도를 만들기 위해 진폐 환자 당사자들의 길고 치열한 싸움이 있었다. 질병에도 관심 없고, 이 투쟁의 역사는 모른 채 그저 소문으로 “아무개가 보상을 얼마 받았다더라”가 들릴 뿐이다. 이 소문은 마치 보상금으로 한몫 잡은 듯한 인상이 추가되어 “그랬대”라는 말로 떠돈다.
--- p.354~355

미래가 없는 산업에 종사하며 현재에서 소외당한 이들은 과거의 영광을 그리워한다. 환경단체에 대해서도 불편한 마음을 드러냈다. 그는 말을 조심하면서도 지금은 광산노동자가 투명한 노동자가 되어버린 현실에 서운함을 표했다. 사회가 진보하는 듯 보이고, 그변화 속에서 노동자의 개념이 확장되어갈수록 광산노동자들은 잊혀지고 제대로 보상도 받지 못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화이트칼라와 대기업 노동자들이 노동자의 위치를 점유한다는 생각에 한때 산업의 중심에 있었던 자신들은 오히려 정치적 관심에서 밀려났다는 감정을 품고 있었다. 2000년대 이후로 그는 스스로 노동조합과 거리를 두었다.
--- p.405~406

1976년생인 내가 1987년의 공기를 기억하듯이, 1984년생 김신애는 1995년 3·3투쟁 당시 지역의 분위기를 기억했다. 중앙로에 사람들이 가득 모였다. 정확히 뭔지 모르겠지만 그가 어린 시절 목격한 감정은 분노였다. 분노의 목소리가 지나간 뒤 정선 사북에는 ‘하이원’, ‘강원랜드’라 부르는 리조트와 카지노가 들어섰다. 지금 시점에서 그는 양가적 감정이 든다. 가까운 지역에 카지노가 들어서면서 지역민들이 경제활동을 이어갈 수 있지만 도박중독으로 인한 우울한 이야기도 많이 접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태백에 돌아와 문화 기획을 위해 이런저런 지원 사업 공모에 많이 참여하면서 그는 자신이 받는 지원금이 강원랜드에서 많이 나온다는 걸 알게 되었다. 카지노 때문에 망가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카지노 덕분에 지원금을 받아 새로운 활동을 이어가는 사람들도 있다.
--- p.457~458

탄광노동자들이 검은 분진에 시달리는 것은 사실이지만 요즘은 손과 얼굴을 씻고 밥을 먹을 수 있음에도 관념 속의 광부를 재현하기 위해 그는 시커먼 얼굴로 밥을 먹는 정치적 퍼포먼스를 했다. 1980년대 이후의 광산은 전혀 대중에게 알려져 있지 않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폐광촌에 마련된 과거의 광산 모습을 본다. 1980년대 탄광에서 집단의 기억은 멈춰버렸다. 경제성장과 기술 발전 속에서 과거가 되어버린 광업은 이처럼 현재의 광업을 보이지 않게 만든다.
--- p.496

서울 중심, 중산층의 목소리가 과잉대표되는 동안 어떤 목소리들은 밀려나고 사라졌다. 목소리 내지 않았던 적이 없으나 꾸준히 그들의 목소리는 철거되었다. 굵직한 역사 속에서 가지치기 된 잔가지 같은 이야기들을 함부로 버리고 싶지 않다.

--- p.593

출판사 리뷰

한 가족의 노동이동사로 좇는 구체적인 노동의 얼굴과 목소리

이 책은 광산노동자의 가족이자, 양양광업소의 마지막 노조위원장의 자녀인 저자가 자신의 가족(그리고 광산업에 종사했던 이들)의 삶에서 출발해 기록한 광산, 폐광, 그리고 폐광 이후의 이야기다. 저자는 자문화기술지의 방법으로 자신의 가족의 노동이동사와 함께 우리 사회에서 충분히 기억되고 기록되지 않았던 광산의 목소리, 삶, 싸움, 노동을 채굴한다. 성의 없고 단편적인 재현에 그친 광산의 이미지가 아니라, 실재하는 세계를 지탱해온, 또 지금도 지탱 중인 노동과 삶의 기록이다.

한편 이를 저자의 가족사로만 본다면 조모, 부모, 저자에 이르기까지 3대의 이동과 삶을 보는 셈인데, 이 속에서 역사와 구조는 개인의 삶에 어떻게 접혀 들어가는지를 확인하게 된다. 일제강점기에 만주에서 결혼해 한국으로 돌아와 지내다 자신과 자식의 일자리를 찾아 광산이 있는 양양에 흘러들어온 조모, 한국전쟁통에 남로당 활동을 했던 조부가 ‘행불’이 되는 바람에 나라의 감시를 받으며 긴 기간 연좌제의 피해자로 살아야 했던 부친과 고모의 삶, 폐광 후 서울/수도권으로 이동해 그 안에서 수없이 이사하며 직업 전환을 해낸 부모의 삶이 기록된다. 이 가족의 노동이동사는 이 사회가 노동자의 삶에 얼마나 무책임한지를 드러내는 동시에 역설적으로 그럼에도 이 세계는 떠받치고 있는 것은 “변화하는 산업 지형과 소멸하는 직업 속에서 견디고 이동하는” 이들이며, 또 그들의 구체적 노동이라는 점을 드러낸다.

1부는 광산, 특히 양양의 철광산을 중심으로 어떤 이들이 어떻게 광산에 모여들어 어떤 일을 어떻게 했는지, 광산노동자와 그 가족들은 어떤 모습으로 살았는지, 당시 광산을 둘러싼 사회 분위기는 어땠는지, 그에 따라 광산노동자들은 어떤 싸움을 했는지 쇳돌을 캐고 고르던 이들의 노동과 삶을 구체적으로 그려나간다. 2부에서는 폐광 이후 저자 부모의 직업 전환 과정과 터전의 이동을 담는다. '없어진 직업' '사라진 산업'을 지탱했던 이들은 당연히 사라지지 않고, 이산해 다른 노동을 하며 삶을 꾸려간다. 3부에서는 광산노동으로 인한 질병과 죽음을 담았다. 거기까지도 노동의 일부이며,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가 누군가의 구체적인 노동과 삶으로 구성된다는 것을 직면하게 되는 순간들이다. 책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자신의 가족이 아닌 다른 구체적인 목소리들을 찾아나선다. 4부에서 저자는 양양광업소 출신으로 양양에 남은 사람, 양양을 떠난 사람, 직업을 바꾼 사람, 직업을 이어가는 사람, 양양 철광산이 아닌 석탄 광산 노동자와 노동자의 가족 등 다양한 목소리를 담고, 이어서 5부에서는 강릉, 동해, 광명, 보령, 정선, 태백, 문경 등 여러 폐광지의 다양한 모습을 스케치해 담았다.

3. 망각되고 누락되어온 누군가의 노동과 삶을 존중하는, 실천으로서의 쓰기

변방과 경계의 자리에 주목하고 미처 감각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마련인 어떤 불편함과 입장을 짚어온 이라영은 이 책에서도 광산의 노동, 투쟁, 문화 등을 채굴하면서도 그것을 낭만화하는 것을 경계한다. 그러면서도 서울 수도권 중심의 지식인 엘리트들이 노동계급의 문화를 폄하하는 태도에도 경고를 보낸다. 누군가의 세계를 피상화하거나 단편적으로 이해하고 거기에 말을 얹는 무례를 범하지 않으려는 엄격함이다. 책은 저자의 기억과 인터뷰, 일반 문헌자료는 물론 당대의 문학을 비롯한 수많은 문화예술 작품을 동원하는데 이는 피상적으로 재현되거나 누락되거나 지워져온 삶과 세계를 다시 구체적으로 재구성하고자 하는 치열한 노력과 다름없다. 이 노력은 어떤 노동과 세계에 대한 저자의 존중이자 예의다.

저자는 ‘혀가 있지만 없었던’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았던’, ‘담고 있는 이야기는 많으나 들어줄 귀가 없었던’ 이들의 목소리에 주목하기에, 광산이라는 산업을 중심으로만 기록하지 않는다. 책에는 그 안에서도 더욱더 지워졌던 여성의 노동과 목소리, 강원도/양양 지역을 중심으로 한 비수도권 지역의 목소리, 특권을 인식하지 못한 과잉대표되어온 이들의 모습, 모순되는 정치적 입장들과 같은 이야기가 제각각 드러나기도, 중첩되고 얽혀서 드러나기도 한다.

광산에 기대어 살면서도 자식은 광산과 거리 두기를 원하는 욕망, 노조 안에서의 배신과 서러움, 수많았던 여성 광산 노동자의 존재, 함께했던 노조 동지들을 생각하면 금방 뜨거운 눈물이 차오르지만 동시에 지금은 노동의 노 자도 꺼내고 싶지 않아진 마음, 노조 투쟁에 함께해왔고, 늘 ‘부업’이라는 이름으로 가사노동에 더한 이중노동을 해왔던 남성 광산 노동자의 아내들, ‘막장 드라마’니 ‘막장 인생’이니 하는 ‘일상적 표현’이 명치 끝에 걸리는 누군가, 민주 노조 건설을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동지였으나 기록으로는 정확히 남지 않은 여성 노동자들, 강원도 말씨를 두고서 북한 말씨 같다고 히죽거리던 서울 사람의 농담에 웃을 수 없는 누군가가 담겨 있다. 따라서 이 책이 채굴하는 이야기들은 단순하지 않고 또렷하지만도 않다. 저 얽힘 안에서 교차하며 발생하는 불화와 선명히 설명할 수 없는 욕망도 기록한다. 다시 말해 이 책은 누군가를 누락하지 않으려는, 누군가의 단순한 재현을 거부하고자 하는 분투이자 아래로부터, 변두리에서, 경계선의 역사를 기록하고자 하는 저자의 치열한 글쓰기의 결과다. 동시에 한국 사회가 관습적으로 누구의 얼굴과 목소리만을 향하고, 누구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지에 대한 성찰, 변방에 감응하는 감각을 요구하는 동시대적 요청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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