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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피투성이 연인 7
호텔 유호, 1203 87 성스러운 봄 125 비소 여인 163 나릿빛 사진의 추억 199 달은 스스로 빛나지 않는다 237 작품 해설│강유정(문학평론가) 291 어둠의 편에서 보는 빛의 자리 |
鄭美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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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있었고 내가 있었다. 둘 사이엔 깊은 우물이 있었다. 그가 옆에 있을 땐 우물의 존재를 몰랐다. 너무 가까이 있는 건 보지 못하는 게 인간의 시력이니까. 그 심연 속에 많은 것들이 있었다. 사랑도, 결핍도, 원심력도, 구심력도, 피로한 감정의 순간도, 은닉된 삶의 조각들도. 그 조각들을 다 맞추어도 기어이 떠오르지 않는 지난 생의 밑그림. 끝내 찾을 수 없는 몇 개의 조각들이 여기 있다. 둘 사이의 우물은 너무 깊고 어둡고 그리고 차갑다.
--- 「나의 피투성이 연인」 중에서 병실 복도에서 의사가 수술과 처치 과정을 설명하며 비용을 말했을 때 나는 처음에 분노했다. 아내보다 내가 더 분노했다. 비용이라니. 네가 나를 어떻게 보고. 아이를 살릴 수 있다면, 그 아이를 살릴 수 있는 데 드는 돈은 그때 내게 비용이 아니었고 그 비용은 문제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내와 나의 미래가, 아니 내 나머지 생의 전부가 일순에 사라지려는데 어떤 부모인들 목숨이라도 걸지 않으려 하겠는가. 비용은 문제가 아닙니다. 나도 그렇게 말했다. 아이가 입원해 있던 1년 반 동안 많지 않던 예금은 사라졌고 카드빚은 여기서 빼서 저기를 막아야 했지만 그때 내게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중엔 빌릴 수 있는 모든 곳에서 돈을 빌려야 했다. 아픈 아이의 치료비로 전세금까지 날아가 버린 걸 안 주위 사람들은 그때부터 전화기 속에서 나를 확인하는 순간 목소리의 톤이 달라졌다. --- 「성스러운 봄」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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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하고 질긴 농담과 직감
표제작 「나의 피투성이 연인」은 사고로 목숨을 잃은 소설가가 남긴 내밀한 일기에서 시작되는 이야기이다. 지금에 와서야 읽는 이에게 차라리 질기고 독한 농담이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게끔 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농담이라고 하기에 이 직감은 무척이나 날카롭다. ‘유선’은 “바위 같은 사랑”을 주었다고 믿었던 남편의 컴퓨터 파일에서 불륜의 흔적을 발견한다. “모든 게 좋아, 너의 모든 것.” 이라는 문장이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님을 직감한 유선은 불현듯 가려움증에 시달린다. 유선의 남편이자 세상을 등진 인물 ‘김주현’이 작가이기에, 이 소설은 어쩔 수 없는 기시감을 준다. 그러나 소설은 기시감을 뛰어넘는 사실과 구체를 남긴다. 떠난 자가 아닌 남은 자의 삶을 지독하고 차분하게 부려놓는 것이다. 정미경 소설에서 삶의 밀도는 유난히 높다. 남편의 부정을 추측함은 가려움증이라는 증세로 몸에 나타나고, 남편이 없는 삶의 빈궁함은 딸에게 뱉는 유선의 말로 발화된다. 이토록 정미경의 독한 농담과 직감은 그럼에도 삶은 계속될 것이라는, 냉정한 진실과 다름 아니다. 서늘한 자본과 뜨거운 인간 『나의 피투성이 연인』은 정미경 작가의 소설적 관점이 넓게 구현된 작품집이다. 후에 작가가 펼친 정교하고 꼼꼼한 세계의 씨앗이 여기에 담겨 있다. 작가 정미경은 소설 속 인물을 사랑하지만 결코 동정하지는 않는 방식으로 서늘하게 그려 낸다. 가령 라디오 방송 작가로 일하며 시를 쓰고 싶지만, 소비의 욕구에 복무하여 자신을 망가뜨리는 여성,(「호텔 유로, 1203」) 어린 딸을 비극적으로 잃은 채 뚜렷한 목표 없이 보험 업무를 이어가는 남성,(「성스러운 봄」) 관계를 맺고 그것을 말소시키는 방식으로 삶을 이어가는 여인,(「비소 여인」), 이웃 사이에 정이 흐르는 골목으로 보이지만, 끔찍한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곳에서의 여러 군상들(「달은 스스로 빛나지 않는다」)이 모두 그렇다. 가족의 투병과 죽음은 ‘빚’이라는 생활고를 불러 오고, 옛 애인에 대한 쓸모없는 그리움은 지금 이곳에서의 협박과 폭력으로 바뀐다. 세상은 냉정한 것이다. 무서울 만치 차갑고 아프도록 어둡다. 그것을 자신의 최후에까지 비추어 그려 낸 작가의 고독한 투쟁을 미루어 짐작하기에, 그의 첫 소설집 『나의 피투성이 연인』은 하나의 등사불이 될 것이다. 한국문학의 새로운 고전, 오늘의 작가 총서 5종 동시 출간!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가 새로운 시작을 알린다. [오늘의 작가 총서] 시리즈는 김동리의 『무녀도·황토기』를 비롯해 손창섭의 『잉여인간』, 이문구의 『우리 동네』, 박완서의 『나목·도둑맞은 가난』, 한수산의 『부초』, 선우휘의 『불꽃』, 조성기의 『라하트 하헤렙』 등의 작품을 통해 해방 이후 한국 소설사를 대표하는 작가의 초상을 그려 왔다. 이는 과거를 통해 미래를 가늠하려는 문학의 현재적 질문이기도 한바, 2020년인 오늘날에도 그 질문의 무게는 유효할 것이다. 오늘의 독자와 끊임없이 재회해야 할 한국문학의 정수를 모은 [오늘의 작가 총서]가 갱신할 질문들에 기대가 모인다. 2000년대 이후 출간작 중, 문학적 가치와 소설적 재미가 풍부함에도 불구하고 여러 사정으로 독자를 만나기 어려웠거나, 다시 단장할 필요가 있는 5종의 소설을 동시에 선보임으로써 오늘의 독자에게 한국문학의 새로운 고전을 소개한다. 또한 새로 잇고 다시 읽어야 할 한국문학 작품을 꾸준하고 면밀하게 찾아 시리즈의 다음 자리에 초대할 예정이다. 예측 불가능의 시대, 기존의 관습과 가치관이 수정되는 시대에 고전은 더욱 빛을 발한다. 지난 시대를 살았던 구체적 인간과 다음 세대에 스몄던 총체적 세계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작가 총서]는 먼 곳의 언어가 아닌, 지금 여기의 언어로 된 한국문학의 고전이다. [오늘의 작가 총서]는 질문의 결을 다양하게 하고, 응답의 몸피를 두텁게 할 한국문학의 근간이자 좌표가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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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경의 소설은 도발적인 희생양들이 쓴 21세기의 고현학(考現學)이다. (……) 그들은 오디세우스의 항해가 아니라 파우스트적인 제의를 통해 유혹적이고도 위험하게 ‘가짜’와 ‘진짜’를 문제 삼는다. - 김미현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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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박한 산소마저 꺼뜨리고 호흡을 불허하면서 독자를 코너로 몰아넣는 문장들은 이윽고 환멸을 흡수하고 감광하여 패배와 은닉의 순간을 인화지에 옮긴다. 필름이 사라져 가는 시대에 다시 만나게 된 송곳 같은 투시의 기록들이다. - 구병모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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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만 있고 대답은 없는 세상에서, 덫이 되어 버린 이 세상에서, 정미경의 소설은 하나의 길이 되어 준다. 어둠 속에서 바라보는 빛이란 아마도 이런 것이리라. 『나의 피투성이 연인』에 담긴 소설들은 정미경 세계의 압축이자 예언이다. - 강유정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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