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 드라마로 김희선의 폭탄 머리가 유행하던 시절, 염색에도 관심 없던 나는 모아 둔 용돈을 들고 미용실에 갔다. 장장 4시간에 걸쳐 파마를 마치고 나왔을 때 길가에 있던 모든 사람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그렇게 튀는 게 싫었던 나인데, 이 헤어스타일은 정말 마음에 들었다. 폭탄 머리를 하고 집에 들어간 나를 보고 아버지는 별말씀이 없으셨다. 그러다 3일 후에 나를 불러 앉히고 침착하게 말씀하신다. “머리 묶고 다니면 용돈 50% 올려줄게!” 그런 아버지에게 지금의 용돈으로도 충분하다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렇게 반년 정도 내 머리는 벼락 맞은 것 같기도 하고, 미친년 같기도 한 그런 상태였다. 머리를 감고 말리면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 360도 사방으로 나풀거렸다. 그 기분은 뭐랄까…. 머리카락이 뻗은 방향만큼 사방으로 자유로운 느낌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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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반찬 있는데, 같이 먹을래?” 반찬이 뭐냐고 묻지도 않았는데 남자아이는 음흉하게 씩 웃으며 자신 있게 도시락을 열어젖힌다. “으아아!” 도시락 안은 밥풀 하나 없이 깨끗하고, 갓 지은 밥이 있었던 자리를 티 내듯이 도시락 안쪽에 이슬이 총총 맺혀있을 뿐이다. 그 사이에 장수풍뎅이 한 마리와 사슴벌레 한 마리가 마주보고 자리잡고 있다. 여자아이들은 기겁하며 뒤로 나자빠진다. 그걸 본 남자아이들은 배를 잡고 껄껄 웃어젖힌다. “하하하! 야, 사슴벌레 처음 보냐?” 혼비백산한 여자 친구들 사이에서 남자 친구는 사슴벌레와 장수풍뎅이를 조심스럽게 추스르기 바쁘다. 도시락 너머로 나가려는 사슴벌레와 장수풍뎅이를 그 작은 손으로 다치지 않게 조심스럽게 잡아, 다시 도시락 뚜껑을 살짜쿵 덮는다. 섬세한 손동작에 얼마나 집중하는지 앙다문 입술 사이에 장난기 어린 표정은 이미 온데간데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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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좋다! 그런데, 삐삐가 오면 길고도 긴 공중전화부스에 서서 기다리고 음성메시지을 확인하고 또 상대방에게 메시지를 남기면 상대방이 확인하고 보낸 2차 음성 메시지를 또 확인하러 가야 하는 정말 번거로운 과정이 반복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 한 명이 으쓱한 웃음과 함께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보였다. “얘들아, 이게 뭐게?” 자랑스럽게 꺼내 보인 것은 다름 아닌 휴대폰이었다. 우리는 존경의 눈빛을 발사하며 주위에 모여들었다. 당시 휴대폰은 고가의 제품으로 잘 나가는 사장님 정도는 되어야 가질 수 있었다.
“뭐야? 오~ 휴대폰 샀어?”
“아니! 이건 시티폰이야!”
우리는 의아한 눈빛으로 이구동성 묻는다.
“그게 뭔데?”
“휴대폰이랑 다르게 시티폰은 받는 전화는 안 되고 거는 전화만 돼! 삐삐로 전화번호가 찍히면 찍힌 번호로 전화를 거는 거지.”
“아….”
거는 게 안 되는 전화라니! 우리는 아리송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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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세대는 삐삐에서 시티폰으로, 시티폰에서 PCS로, 2G 휴대폰에서 최초 영상통화가 가능했던 2.5G 휴대폰으로 그리고 현재의 스마트폰까지 모든 무선통신을 먼저 경험한 세대이다. 그도 그럴 것이 X세대에서 ‘얼리어답터’라는 단어가 생길 정도로 먼저 경험하는 사람을 신세대라고 생각하는 문화가 있었다. 빠르게 발전하는 그 무엇을 먼저 경험하고자 하는 열정도 충만했다. 그 시절 시티폰을 가방에서 꺼내 보이며 ‘이게 뭐게?’라고 자랑했던 친구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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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선생님이 지시하신 임무를 나름으로 열심히 수행했다. 사실 손걸레에 손을 넣고 마룻바닥을 문지르는 단순노동은 초등학생이 좋아할 만한 작업이다. 가뜩이나 몸이 근질근질하고 에너지가 넘쳐나는 초딩이들은 손걸레를 바닥에 대고 엉덩이를 흔들면서 아무 생각 없이 박박 문질러대기 시작했다. 점점 반짝여지는 마룻바닥을 보며 미소를 띤다.
“봤지? 내 마룻바닥이 제일 반짝반짝하잖아!”
“아니야! 나도 열심히 닦았어.”
서로 자랑하며 초 칠을 더 섬세하게 한다. 그러면 코팅이 더 잘 살아나기 때문이다. 이런 스킬은 다년간 마루를 닦은 경험과 말랑말랑한 초의 노하우에서 배어날 수 있는 고급 스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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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1학년 때 무선 이동통신만큼 발전을 거듭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PC 통신이다. 입학 후 며칠 지나지 않아 PC통신 가입을 유치하는 사람들이 교내에 들어왔다. 같이 다니던 친구들과 함께 ‘나우누리’에 가입했다. 함께 음주, 가무를 하지 않으면 우리는 PC 통신에서 만났다. 난생처음 접해보는 사이버상에서의 만남은 새롭고 재미있었다. PC통신에서는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 있었고, 대부분 우리 또래였던 탓에 거리낌 없이 대화를 나누었던 것 같다. 처음엔 친구들을 기다릴 때만 타자방에 들렀는데, 한두 번 하다 보니 1등이 좋았다. 공부로는 욕심 내본 적이 없는데 타자방에서는 누구에게도 지고 싶지 않았나 보다. 그렇게 몇 달을 자판을 치다 보니, 경지에 이른다. 한글 타수는 1,000타가 넘어 최고 기록은 1,300타까지 찍어봤다. 영어 타수는 평균 800타에 최고 1,000타를 찍기에 이른다. 이쯤 되면 손가락이 자판 위를 날아다닌다고 보면 된다. 어느 날은 손가락이 날아다니는 작은딸을 아버지는 신기한 웃음을 지으며 쳐다보셨다.
“그게 뭐 하는 거니?”
“응! 타자방이라고 여기 올라오는 글을 그대로 쳐서 올리면 타수가 나오는 거야.”
‘타수’며 ‘타자방’을 아실 리가 없었지만, 아버지는 더 이상의 질문 없이 한참을 바라보다 가셨다. 아마도 작은딸이 뭔가를 열심히 하나보다 하셨던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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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연령대가 있는 어떤 모임에서 최근 이런 말을 들었다. “왜 학번을 얘기해요? 나이를 얘기하지!” 40대인 우리는 학번으로 나이를 말하고 있었다. 사실 그랬다! X세대는 아직 40대를 이야기할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에 접한 태영이의 소식은 내게 심리적인 변화를 주기에 충분했다. 젊은 시절, 함께 했던 누군가가 유명을 달리한다는 것을 경험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나는 이제 나의 중년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동방에서 만나면 종종 태영이와 농구를 같이 하던 태성이는 그의 관을 들어주었다고 한다. 이름 한 글자가 같아 형제 아니냐며 놀림당하던 태영이와 태성이는 졸업 후에도 종종 어울렸던 것 같다. 농구를 함께 하던 그때 태성이는 알고 있었을까? 25년 후에 저 녀석의 관을 들게 되리라는 것을…. 촌스러운 기지 바지를 입은 태성이와 헐렁한 면티를 입은 태영이의 어깨동무하고 가는 뒷모습이 붉게 내려앉은 저녁노을 사이로 번지던 그때가 떠오른다. 촌스러운 로보트 태권 V를 닮은 퀴퀴한 냄새와 추억이 함께한 동방 친구들은 그렇게 내 기억에 저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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