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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리치의 일본 미학

도널드 리치의 일본 미학

: 경계인이 바라본 반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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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08월 08일
쪽수, 무게, 크기 344쪽 | 468g | 135*195*21mm
ISBN13 9791169090247
ISBN10 1169090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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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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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3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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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을 극히 중시하는 일본의 태도는 주로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에 반영되어 있다. 의례라는 것은 인간에 의해 변형되고, 윤리라는 것은 즉흥성에 의해 훼손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일본에서는 패턴을 눈에 보이는 형태로 만들고, 이름은 글로 써서 읽을 수 있을 때에만 기억된다. 귀로 듣는 것은 신뢰하기 어렵고 눈으로 보는 것이 확실하다. 일본은 명함과 온갖 광고의 나라다. 아마추어 화가들과 사진가들의 나라이기도 하다. 모두 그림을 그릴 줄 알고 사진을 찍을 줄 안다. 시각적 감각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아는 것이다. 마치 절대음감과도 같다.
--- p.18

일본의 전통 영화들을 보면 이들은 현실이란 겉으로 드러난 것이 전부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듯하다. 뒷면에 숨겨진 현실이라든가 가치 판단에 대한 고려가 느껴지지 않는다. 일본인은 개인으로서의 죄책감은 없으나 사회적 수치심은 갖고 있는 사람이라고들 하지 않던가. 이와 대조적으로 서양에서는 드러난 현실만이 유일한 현실이라고 믿지 않는다. 개인적 양심을 강조하고, 뒷면에서 배회하는 현실에 주목한다. 따라서 서양인들은 사회적 수치심을 거의 느끼지 않고 대신 개인적인 죄책감에 훨씬 민감하다.
--- p.29

이런 조그맣고 공허한 순간들은 오즈의 영화에 숨 쉴 공간을 제공하는 모공과도 같다. 그 공허함으로, 그 존중과 배려로 영화를 규정한다. 오즈의 이런 솜씨를, 일단 플롯의 전개가 끝나면 가차 없이 장면을 끝내버리는 보통의 감독들과 비교해보라. 마치 등장인물이 아니라 플롯 자체에만 관심이 있다는 듯한 태도가 아닌가. 이들은 그렇게 플롯만을 중시하다가 해당 장면의 가장 의미 있는 부분을 놓쳐버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 p.35

일본인들은 단어의 뉘앙스에 민감한 만큼 단어가 어떤 글씨체로 쓰였는지에 대해서도 민감하다. 서양에서는 출판업이나 인쇄업에 종사하지 않는 이상 누구도 글자의 다양한 폰트와 스타일이 주는 영향에 그다지 민감하지 않다. 뉴스의 헤드라인을 굵은 글씨로 쓴다거나 결혼 청첩장에는 화려하게 굴린 글씨체가 쓰인다는 것을 아는 정도일 뿐이다. 그리고 요즘에는 거의 모든 커뮤니케이션이 기계로 인쇄되었거나 화면에 타이핑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손글씨의 섬세한 뉘앙스에 둔감해져 있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서법이 여전히 중요한 위상을 차지한다.
--- pp.54~55

파친코는 다른 모든 주요한 몰입 활동들과 마찬가지로 겉보기의 모습이 전부가 아니다. 파친코의 진정한 목적은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거대하다. 그것은 바로 다름 아닌 소멸이다. 자기 소멸은 지극한 쾌락의 경지다. 이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그 상태가 무한히 계속된다. 여기 도달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잘 맞는 기계를 찾아야 한다. 그런 기계는 나에게 맞춰 반응해주는 것 같은 조용한 벗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신과 기계 사이의 이런 말없는 교감은 당신을 망각으로 이끈다. 당신은 지금 하고 있는 행위를 반쯤만 의식하게 된다. 파친코 기계 앞에서 겉으로 행하는 행위의 목적은 의식하고 있지만, 동시에 진짜 이유는 기꺼이 망각해버린다. 파친코 업소에서 나올 때는 기운을 되찾은 새로운 모습으로 나온다.
--- p.68

다도의 마지막에 손님들이 고개 숙여 인사하고 집으로 돌아가듯, 영화가 끝나가면 의미들이 흘러왔다가 사라진다. 공간이 아닌 시간에 있어서 비어 있음의 풍부함이라고 할 만하다. 소멸의 불멸, 영원의 찰나. 사례는 넘쳐난다. 정성 들여 이어붙인 깨진 찻잔, 손을 타서 변색된 은빛 차항아리, 한순간을 영원히 박제하는 하이쿠. 모두 시간의 작용 그 자체로부터 만들어진 사물들이다.
--- p.143

이 모든 것은 이제 지나간 얘기다. 이키는 ‘쿨한 것’으로 변했고, 자연은 잊혔으며, 방법은 수단으로 전락했다. 그러므로 역사의 긴 복도를 되돌아보는 일은 가치가 있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던 세상, 아름다움의 특징들을 분류하던 세상, ‘미학’이라는 단어가 필요 없던 세상을 돌아보는 일은 가치가 있다.
--- p.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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