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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10월 25일
쪽수, 무게, 크기 280쪽 | 338g | 133*200*20mm
ISBN13 9788954695190
ISBN10 8954695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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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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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사과를 빚졌어, 하고 미노리가 말했다. 너를 좋아하지 않았어. 왜냐하면, you and me, 미노리가 말했다. We are like, 음, we are like…… 미노리는 그뒤에 붙일 단어를 고르지 못하고 있었다. 나도 알아. 우리는 지구의 다른 한쪽을 떠받치고 있는 사람들이지. I know, 나는 말했다.
---「미노리와 테츠」중에서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선 어둠 속에 자신을 내버려둘 용기가 필요한 게 아닐까. 너무 어두워서 도무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다가도, 시간을 견디면 결국에는 아주 느린 속도로 시야가 밝아지듯이. 캄캄한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일.
---「변산에서」중에서

커다란 유리병이 다 비어가도록 둘 중 누구 하나 안색이 변하지 않았다. 그 엄마에 그 딸이었다. 내가 삼대째 물려받은 것은 알코올에 대한 내성, 돌아온다는 약속, 어쩌면 사랑. 우리는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랫말에 오랫동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오! 상그리아」중에서

다만 후에 내가 알게 된 것은, 그날 할머니는 자신이 가진 최선의 것들을 몸에 걸치고 나왔다는 사실이다. 최선의 것들이자 유일한 것들을. 단 한 벌의 코트, 하나의 모자, 하나의 목도리, 한 켤레의 장갑. 나는 뒤늦게야 그녀가 살아온 삶의 방식을 감히 짐작해볼 수 있었다. 최소한의 최선. 그것이었다.
---「내 할머니의 모든 것」중에서

그리고 나는, 천국과 지옥을 믿지 않아. 그는 나를 보지 않은 채 고해성사하듯 허공에 대고 말했다. 방금 신을 믿는다고 했잖아. 안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하지만 내가 믿는 신은 천국에 살지 않아. 나는 지금, 여기의 아름다움만을 믿어. 나는 상상했다. 지금, 여기의 신. 작은 것들의 신을. 안와가 조용히 한마디를 덧붙였다. 나는 가끔씩 내 삶이, 필름이 들어 있지 않은 카메라로 셔터를 누르는 것처럼 느껴져.
---「너무 늦지 않은 어떤 때」중에서

진공 상태로 떠오를 때가 아니라 붙잡혀 돌아올 때. 지구는 나를 이토록 끌어당기는구나. 놓아버리지 않는구나. 기울어진 채 멀리 수평선에 돋아 있는 낮은 섬들을 바라보노라면, 발 딛고 있는 대지가 얼마나 단단하고 안온한 것인지 깨닫게 되곤 했다고. 언젠가 룸메씨가 내게 해준 그 얘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바로 지금이, 룸메씨가 바이킹을 타야 하는 시점이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어쩌면 나도. 한껏 끌어당겨지고 싶었다. 삶 쪽으로.
---「고래 사냥」중에서

나 역시 가만히 있었다. 만약 내가 누구에게랄 것 없이 저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면, 론도 누구에게랄 것 없이 손을 들어 화답해주었을까. 나는 그가 나만을 위한 인사를,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방식으로 내게 건넨 것이기를 바랐다. 나는 흔들리는 배 위에서, 흔들리면서, 점점 멀어지는 네버랜드의 해안가를 한참 동안 지켜보았다.
---「네버랜드에서」중에서

우린 아마 평생 이러고 살겠지. 갈대처럼 흔들리면서. 근데 갈대 괜찮지 않나. 지나가는 바람에 한껏 몸을 누이면 되니까. 한참 엎어져 있다가 슬그머니 몸을 일으키고, 또 엎어지고. 누가 누구를 일으켜줄 수는 없지만, 같이 엎어져 있는 건 참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우림에게 말하고 싶었는데 그냥 속으로 생각만 했다.
---「지나가는 바람」중에서

검고 두꺼운 암막 커튼을 쳤는데도 이 방안은 왜 이렇게 어둡지 않을까. 눈을 감고 안대를 썼는데도 왜 어떤 잔상이 망막에 매달려 떨어지지 않는 걸까. 묻고 싶었다. 우리가 잠들 수 없는 것은 그래서일까. 우리가 우리에게서 빛의 기미를 완전히 떼어놓을 수 없기 때문에. 자리에 누운 채 어슴푸레한 사물의 윤곽을 눈으로 더듬는 동안, 어디선가 읽었던 니체의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한낮의 빛이 어둠의 깊이를 어찌 알겠는가.’ 그러나 밤의 어둠도 한낮의 빛을 알지 못한다.
---「한낮의 빛」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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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다른 한쪽을 떠받치고 있는 사람의 그림자를 알고 그를 향해 기꺼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정오의 태양과 이글거리는 불꽃 대신 캄캄한 그늘 속에 스민 희미한 빛과 미약한 온기의 가치를 알고 응원하는 작가가 있다. 인물이 지닌 최소한의 최선을 발견하고 무대를 마련한 뒤 스스로 말하도록 한 걸음 물러서는 소설이 있다. 서로 신념과 신神이 다른 너와 내가 하나의 믿음 아래 함께하는 것이 가능할까? 문진영의 소설은 그 자체로 최선의 대답이었다. 덕분에 나는 계속 말할 수 있다. 왜 소설이고, 여전히 소설인지.
- 정용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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