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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01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208쪽 | 278g | 123*201*13mm
ISBN13 9788960908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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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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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내 인생은 ‘절대’나 ‘반드시’ 같은 결의에 찬 단어보다 ‘어쩌다 보니’가 훨씬 더 잘 어울린다. 좀 우습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괜찮다. 우습게 보이는 것은 조금 슬픈 일이지만, ‘절대’나 ‘반드시’라는 말로 스스로 만든 벽처럼 무서운 것은 아니니까. 슬픈 것과 무서운 것 중 하나를 고르라면 차라리 슬픈 것을 택하겠다.
--- p.24

글쓰기가 문장을 무덤 속에 파묻으며 언젠가 그것이 집이 되기를 희망하는 일이라면, 번역은 누군가 단단하게 세운 집을 부서뜨리고 그것의 잔해를 옮겨 와 재건하는 일이다.
--- p.33

프랑스에 온 이후 4년 정도는 말 그대로 언어와의 전쟁이었다. 어디를 가도 언어는 나의 장벽이었고, 말을 알아들을 수 없어서 할 수 없던 일들, 말을 제대로 못해서 억울하게 감내해야 했던 일들이 많았다. 그곳에서 외국인에게 언어는 권력이었고, 그래서 나는 프랑스어를 잘하고 싶으면서도 또 동시에 전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언어를 사랑하게 되는 순간들이 분명히 있었다. 이민자들이 각기 다른 억양으로 노래하듯 프랑스어를 말할 때, 외국인들끼리 완벽하지 않은 프랑스어로 서로의 말을 알아들으려 애쓸 때, 가장 간소한 말로 더듬더듬 사랑을 고백할 때, 내게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이었다.
--- p.38

엄마의 꿈이 지긋지긋할 때도 있었다. ‘다 잘될 거야’라는 무책임한 긍정의 말이 폭력적으로 다가왔던 시절의 이야기다. 그때 내가 자신에게 보낼 수 있는 가장 다정한 위로는 ‘괜찮아’ 정도였고, 그 말 속에는 어떻게든 지금, 이 현실 속에서 ‘괜찮을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의지 같은 것이 있었는데, ‘다 잘될 거야’라는 말을 들으면 이상하게 힘이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 말을 들으면 다 잘되는 날은 어떻게, 언제 오는지를 따져 묻고 싶어졌으니까. ‘괜찮은’ 정도로만 살고 싶다고, 미래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고, 신의 계시도, 꿈의 의미도 필요 없다고 얼마나 많은 날에 엄마에게 눈빛으로 따져 물었던가. 엄마의 그 이상한 꿈이 나를 지치게 한다고 몇 번이나 침묵의 비명을 질렀던가. 그 시절 내게는 눈앞에 없는 모든 것이 다 거짓이었다.
--- p.64~65

그들을 보고 있노라니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이유가 혼자서는 절대 찾아낼 수 없는 서로의 아름다움을 발견해주기 위해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 각기 다른 모습으로 아름답다.
--- p.69

꿈에서 걸어 나와 그 바깥을 사는 내게 중요한 것은 간절히 원하는 것을 이루는 방법이 아니라, 간절히 원하지는 않았지만 내 앞에 나타난 이 현실을 유쾌하게 끌어안는 법이다.
--- p.72

어떤 도피는 비로소 우리를 살게 한다. 이 모든 것이 어디론가 향하는 여정이며, 자신과 대면할 수 있는 여행이라고 생각하면 굳은 마음이 조금씩 물러진다.
--- p.107

이제 막 장사를 시작했던 엄마는 누구한테 돈을 뺏길까 봐, 사기를 당할까 봐 현금을 품에 꼭 안고, 내 손을 꼭 쥐고 조심스럽게 걸었다. 그때 태어나 처음으로 겁먹은 엄마의 얼굴을 봤다. 글쓰기가 다시 살 수 없는 시간으로 돌아가는 일이라면, 나는 지금 동대문 앞으로 돌아가 그때의 엄마를 꼭 안아주고 싶다.
--- p.112

시장을 떠나 살면서 나를 제일 가난하게 했던 말은 “엮이지 마”였다. 누군가를 만나 서로의 뿌리와 가지가 엉키는 일이 고통이나 불편이 되는 관계를 맺으며 나는 얼마나 약하고 외로운 사람이 되었는지……. 다시 돌아와 사람과 ‘엮는 일’, ‘엮이는 일’을 배운다. 이곳에서는 우리의 얽힌 뿌리와 가지가, 어느 날 도끼 같은 불행이 우리를 내리쳤을 때 쉽게 잘려 나가지 않도록 서로를 지탱해주는 힘이라는 것을 안다.
--- p.129

내게 섬유유연제는 방패였다. 나는 누군가에게 ‘이상한 냄새’가 나는 외국인이 되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빨래를 할 때마다 섬유유연제를 듬뿍 넣었다. 김치나 된장찌개 같은 한식도 잘 먹지 않았고, 한겨울에도 오랫동안 창문을 열어두었다. 나는 다치고 싶지 않았다.
--- p.164

글을 쓰는 나는 무언가를 얻고, 잃고, 부서뜨리고, 붙이며 나아간다. 내 글은 언제나 상처와 흠집의 기록이고, 내 문장은 여전히 흔들리지만, 거기서부터 회복이 시작되리라는 것을 안다. 오늘의 마침표는 완전한 끝이 아니다. 내게는 늘 다음 문장이 남아 있다. 나는 그렇게 계속 쓰는 사람이 될 것이다.
--- p.198~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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