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우리가 외계 문명을 바라보는 태도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을 인간의 눈으로 바라보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생명과 마음, 문명과 기술의 본질은 물론, 공동체의 운명에 관한 우리의 고정 관념을 버려야 한다. 간단히 말하면,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라는 것이다.
--- 「1장」 중에서
생명의 기원에 관한 가장 까다로운 질문은, 그게 ‘어떻게’ 시작됐는가 하는 것이다. 이 답을 어렵게 만드는 게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우리가 아는 가장 단순한 생명은 이미 대단히 복잡한 형태를 띠고 있었기 때문에 우연히, 저절로, 단 한 차례 변형을 거쳐 나타났을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 「2장」 중에서
일반적으로 생물은 시간이 지날수록 복잡해지기 마련이다. 처음부터 방향이 정해져서가 아니라, 다양한 가능성을 모색하다 보니 그렇게 된다. 이런 변화는 대부분, 처음보다 더 복잡한 방향으로 진행되기 마련이다. 굴드는 다윈이 처음 도입한 생명 나무의 비유 때문에 더 큰 오해를 불러일으킨다고 믿었다. 나무가 자라는 방향은 너무나 분명하고(위), 오히려 관목이 더 적절한 비유일 것이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생명을 그저 “가는 대로 자라게 내버려 두라.”라고 누군가 말할 수 있으리라. 지성은 그 변화를 이루는 한 가지 요소일 뿐이다. 우리가 세티에 관해 궁금해 하는 것은, 생물이 (술주정뱅이처럼) 진화 경로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채 우연히 지성을 갖게 될 확률이 얼마나 될까 하는 것이다. 그 확률은 낮을까, 높을까? 아니면 전혀 가능성이 없을까?
--- 「4장」 중에서
섬뜩한 침묵이, 우주에 우리만 있음을 의미하는(우리가 우주에서 유일한 지적 생명체라는) 중요한 증거라면 생명이 지성체로 진화하는 과정은 대단히 확률이 낮은 사건이기 때문에 단 한 번만 일어났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런 침묵을 설명할 수 있는 두 번째 가능성이 있다. 짐작건대 지성체와 기술 문명은 본래 불안정하기 때문에 다른 지성체나 기술 문명과 접촉할 수 있을 만큼 오래 생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 말이 옳다면 우리에게는 불행한 소식이다. 만일 지구가 전형적인 행성이라면, 우리 역시 그들과 같은 길을 밟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통신 수단을 이용해 외계 문명과 신호를 주고받기도 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운명을 맞이한 우리의 우주 사촌들처럼 말이다. 물론, 핵전쟁이나 전염병, 혜성 충돌, 혹은 사회 경제적 분열과 같이 우리의 문명을 싹 쓸어 버릴 만한 잠재적 재난을 미리 예측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은 아니다.
--- 「4장」 중에서
즉 우주에서 생명이 필연적인 것이라면 그 침묵은 섬뜩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인류의 운명에 관한 한 이것은 불길한 결론일 수밖에 없다. 저 밖 어딘가에 ET가 없다면 차라리 우리는 우리 외에는 생명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것이 낫다. 옥스퍼드 대학교 철학자인 닉 보스트롬(Nick Bostrom)은 직설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화성이 아무도 살 수 없는 척박한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것은 좋은 소식이다. 죽은 바위와 생명이 없는 모래는 내 정신을 고양시킬 것이다. …… 이 사실은 인류의 미래를 보장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 「4장」 중에서
역사 전체를 두고 볼 때 인간은 편의와 행복을 위해 기술을 이용했다. 하지만 이제, 생물의 영역과 무생물이 차지해 왔던 영역 사이의 오랜 관계가 역전되는 시점이 찾아오리라는 것을 예측할 수 있다. 인간과 같은 생물이 특별한 기계를 설계하고 만드는 대신에, 기계가 생물을 설계하고 만들게 될지도 모른다. 세티(SETI)에서 핵심이 되는 ‘I’, 즉 지성의 바통은 언젠가는 인간에서 기계의 영역으로 넘어갈 것으로 보인다. 이후 지성을 갖춘 생물은 종속적인 존재로만 남게 되지 않을까. 기계 공학적 지성체는 훨씬 견고하기 때문에 생존 가능성은 인간이나, ‘살과 피’로 이뤄진 다른 생물학적 지성체와는 비교할 수 없다. 기계는 낡은 부품을 대체품으로 교환하면 영원히 동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계를 결합하면 성능이 향상되며, 더 광범위한 물리 조건에서 작동할 수 있다. 대체로 기계는 지성을 담아 둔다는 측면에서 뇌보다 훨씬 안전하고 내구성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
이 결론은 놀랍고 당황스럽다. 생물학적 지성은 일시적 현상에 지나지 않으며, (우주에서) 진화 단계상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진다는 이야기다. 필자는 이 예측이 가장 일어날 법한, 필연적 결말이라 생각한다. 만일 우리가 외계 지성체를 만난다면 이들은 전적으로 생물 이후 단계에 와 있을 것이라고 필자는 믿고 있다. 이런 결론이 세티에 관한 한 지대한 파급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한다.
--- 「8장」 중에서
필자는 본질적으로 우주는 생명과, 또한 지성에 우호적이라 믿고 싶다. 때문에 지구에 사는 우리의 미천한 노력과, 시간과 에너지를 하릴없이 소비하는 우리의 일상은, 저 위대하고 어떤 가치 있는 존재의 일부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필자의 기질과 잘 들어맞는다. 필자는 외계 지성체가 있다는 분명한 증거를 우연히 알게 되는 것보다 더 흥분되는 발견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10장」 중에서
몽상적인 생각에 잠길 때면 생물학적이든 아니든 모든 지성적인 존재는 광활한 시공을 넘어, 또한 IQ의 사다리를 초월해 어떤 공감대나 유대감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하기를 즐긴다. 그 존재는 칠흑같이 어두운 텅 빈 은하 간 공간을 떠도는 신 같은, 양자화된 정신이나 기지화된 혜성을 타고 날아가는 슈퍼 사이보그일 수도 있다. 아니면 회전하는 블랙홀에 바싹 붙어사는 마트료슈카의 뇌, 아니면 행성에 살면서 고도의 기술을 이용하는 뇌가 큰 생명체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필자는 그들의 소리를 듣고 싶다. 그렇다. 마지막으로 ‘몽상가’의 모자를 쓰면 우주는 지적 생명체가 흔한 곳이 돼 버리고, 필자는 그런 우주에서 마음이 편해진다. 이런 상념은 ‘신념’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욕구’에 가깝다. 그러나 어찌 보면 ‘과학자’ 폴 데이비스가 나, 필자 스스로를 제지하려 들기 전에 자신도 모르게 찾아오는 상념이다.
--- 「10장」 중에서
프랭크 드레이크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세티는 사실 우리 자신을 찾는 일이다.” 어찌 보면 우리가 찾는 답이 인류에게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세티에 매료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무생물에서 생물로의 전환이 우주에서 단 한 번만 일어나는 놀라운 화학적 사건이라면, 이는 여러 측면에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어떤 우주적 연관성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우주 한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일종의 괴물일 뿐입니다. 하지만 만약 생명을 발생시키는 심오한 원리가 자연에 있다면, 그리고 지성이 여기에 더해지고, 이 모든 것들이 우주에서 펼쳐지는 일들의 일부분이라면 어떨까요?
그러면 우리라는 존재는 이 거대한 계획과 연결됩니다. 저에게는 이것이야말로 일종의 종교적 감정과 가장 가까운 것입니다. 만약 인간이라는 생명체가 단순한 사건의 결과가 아니라 점점 더 복잡해지는 체계적인 전개의 일부라면, 이는 어떻게든 인간 생명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할 것입니다. 외계 지성체 또는 그 어떤 생명체라도 찾게 된다면, 생명의 발생을 설명할 수 있는 일종의 깊은 생물학적 일반 원리가 존재한다는 전망을 확인시켜 줄 것입니다. 그리고 생명이라는 것이 우발적으로 발생한 특정한 형태의 암석 덩어리들처럼 하찮은 존재가 더 이상 아니게 되고, 우리는 거대한 그 무언가에 속하게 됩니다. 우리가 우주의 구조에 깊이 내재되어 있는 어떤 것의 일부라는 것을 아는 것은 매우 고무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지구 밖 외계 생명체의 발견은, 제 생각에는 매우 고무적일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 「폴 데이비스×이명현 특별 좌담」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