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석 - 만일 자신보다 더 귀한 무엇을 알게 된다면 자연히 그것을 사랑하게 되며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내 온갖 것을 바치게 된다. 그것이 삶의 정상적인 모습이다. 그렇게 보면 사랑은 어떤 특별한 것이 아니다. 사랑은 극히 정상적인 삶의 본질이라고 보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참되고 값진 인생을 원한다면 말이다. 또 그렇게 사는 사람이 인생을 행복하게 이끌어가며 값지게 채워간다는 말은 조금도 잘못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랑을 모르거나 실천하지 않는 사람이 불행과 모순을 만들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만인의 것이며 참된 사랑은 우리 모두가 선택하고 실천해야 할 인생의 도리다. 우리가 체험하고 있는 사랑의 모든 영역에서 그 뜻을 채워가야 할 것이다. --- p.16
김태길 - 나에 대한 올바른 사랑의 길의 첫째 원칙은 “내 생애 전체를 원대한 안목으로 꾸준히 성실하게 가꾸어라”이다. 오늘의 나만을 들여다보지 말고 내 생애 전체를 염두에 두되, 나의 생애가 하나의 아름답고 멋있는 작품이 되도록 슬기롭게 노력하라는 뜻이다. [중략] 요즈음 우리나라의 현실은 여러 측면에서 매우 어지럽고 불안하다. 하나밖에 없는 우리 조국 대한민국을 지키고 키우기 위하여 대동단결해야 할 사람들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 치고 받으며 싸우고 있다. 그렇게 싸우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모두가 각각 자기(自己)를 사랑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러 갈래로 분열되어 싸우고 있는 사람들이, 그리고 각각 자기를 위하여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있는 그 사람들이, 만약에 애기(愛己)의 길에도 옳은 길과 그른 길이 있음을 알고 그 옳은 길로 진로를 바꾼다면, 우리의 내일은 크게 달라질 것이다. --- p.18~19
안병욱 - 사랑은 책임지는 것이다. 부모는 자식에 대해 책임을 지고, 선생은 학생에 대해 책임을 느낀다. 부르면 대답하는 것이 사랑이다. 부르는데 못들은 척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책임은 영어로 ‘responsibility’라고 한다. 이것은 대답한다는 뜻의 ‘respond’에서 유래했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상대방이 부를 때 응답하는 것이다. 도와달라고 부를 때 사랑하는 사람은 응답하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응답하지 않는다. 책임은 응답하는 것이요, 응답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의 정도와 책임의 정도는 서로 비례한다.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책임감을 강하게 느끼고, 적게 사랑하는 사람은 책임감을 덜 느낀다. --- p.22
김형석 - 윗자리에 올라간 초기에는 성실하게 노력하고 겸손한 자세를 취하던 사람들도 세월이 지나면 스스로를 과신하게 되며,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자만심에 빠지곤 한다. 심지어는 다른 사람이 그 직책을 맡았다면 훨씬 더 훌륭한 업적을 세울 수 있었을 텐데도 자신보다 나은 지도자가 없다는 착각에 빠지기까지 한다.
[중략] 어느 학생보다도 열심히 공부하는 교수가 존경받는 스승이 되며, 어떤 사원보다도 성실히 노력하는 상사가 훌륭한 윗사람이 된다 . 그래야 그 학교와 회사가 발전할 수 있지 않겠는가. --- p.70~71
김태길 - 의술에도 등급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의사의 등급은 그의 인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삼 절실하게 느낀 것은 돈을 잘 버는 의사가 반드시 명의(名醫)가 아니라는 평범한 사실이다. 돈만 아는 의사도 ‘의사’요, 한 몸을 바쳐 인술(仁術)을 베푸는 사람도 ‘의사’라고 부른다. 새 말을 지어내는 데 소질과 취미가 풍부한 국어학자들은, ‘이름씨’와 ‘명사’를 가지고 싸울 여가에 저 두 가지 ‘의사’를 구별할 새로운 단어라도 찾아주었으면 고맙겠다. 세상에 돈에만 열중한 의사가 많다는 것은 섭섭한 일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인술의 소유자가 더러는 있다는 사실이 인생에 한 줄기 광명을 던진다. --- p.77~78
안병욱 - 성실은 인생의 대본(大本)이요, 도덕의 근간이다. 성실성이 없는 사랑은 참된 사랑이 아니다. 성실성이 없는 우정은 오래가지 못한다. 성실성이 없는 대화는 참된 대화가 아니다. 성실성이 없는 인간관계는 진실한 인간관계가 아니다. 성실성이 없는 신앙은 참된 신앙이 아니다. 성실성이 없는 사람은 믿을 수가 없다. 성실성 이 없는 교육은 참된 교육이 아니다. 그러므로 성실은 성기(成己)의 원리인 동시에 성물(成物)의 원리라고 《중용》은 결론을 내렸다. 성실은 자기완성의 원리인 동시에 사물을 완성하는 원리다. 위대하도다! 성실의 힘이여. --- p. 81
김형석 - 부인은 교회에 다시 나올 수 없을 정도로 병세가 악화되었다. 그래서 목사는 한 달에 두세 번씩 그 가정을 방문해 위로도 하고 가정 예배를 드리는 일을 계속했다. 부인이 너무 애타게 기다리는 시간이었기에 때로는 시간을 내어 몇 교우들이 동행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부인은 행복과 감사의 정을 누를 길이 없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부인의 건강은 쇠잔해졌다. 하루는 부인이 목사와 몇 사람에게 말했다. 한 번만이라도 서울에 있는 동대문시장 같은 데 가서 한국 사람들이 우리말로 떠들어대는 모습을 보면서 그 속에 끼어들었으면 좋겠다는 얘기였다. [중략] 그 말을 남긴 지 얼마 안 되어 그 부인은 객지에서 삶을 마쳤다. 왜 목사는 나에게 그런 얘기를 했을까. 목사의 가족들은 모두가 캐나다에 살고 있다. 그러나 목사 자신의 고향은 한국이고 서울이었다. 그가 떠나온 고향에는 무엇이 남아 있을까. 나를 나답게 한 것들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 하나는 역시 나를 키워주고 있게 한 말이다. 내 말이고 우리 말이다. 생각해보면 말이 내 고향이었던 것이다. --- p.180
김태길 -. 나는 그림에 대한 소질을 타고나지 못했다. 소년 시절에 닭을 그리면 오리 모양이 되었고, 백합을 그리면 호박꽃에 가깝게 보였다. 미술가를 부러워했지만 화가의 길로 들어서지 않은 것은 참 잘한 일이다. 마음속에 있는 생각을 정확한 말로 나타내는 일은 나에게는 닭이나 백합의 모습을 그리기보다 더 어렵다. 정확할 필요가 없는 말, 이를테면 ‘안녕하십니까’ 따위의 의례적인 인사말이나 그 밖의 어떤 허튼소리라면, 별로 부담 없이 지껄일 수가 있다. 그러나 정확한 표현이 요구될 경우에 적합한 언어를 찾아낸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나는 말을 많이 사용하는 직업에 종사하고 있다. 말 가운데서도 가장 정확성을 요구하는 철학의 길을 택한 것이다. 어릴 때 말을 몹시 더듬어서 말을 적게 하는 직업을 원했는데, 어쩌다 엉뚱한 길로 들어선 꼴이 되었다. --- p.181
안병욱 - 말은 사람이다. 말은 얼이다. 말은 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을 갈고 다듬고 키우고 살려야 한다. 말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입에서 나오는 말이요, 둘째는 머리에서 나오는 말이요, 셋째는 가슴에서 나오는 말이다. 입에서 나오는 말은 얕은 말이다. 우리는 그런 말을 감언이설(甘言利說)이라고 하고, 입에 발린 말이라고 한다. 그래서 공자는 “교언영색선의인(巧言令色鮮矣仁)”이라고 갈파했다. 꾸미는 말과 꾸미는 표정은 진실성[仁]이 적다[鮮]는 뜻이다. 머리에서 나오는 말은 생각하고 하는 말이다. 이런 말은 논리를 내포하고, 이론이 있고, 재담이 되고, 기지가 되고, 고담준론(高談峻論)이 되고, 갑론을박(甲論乙駁)의 토론이 된다. 가슴에서 나오는 말은 우리에게 감명과 감동을 준다. 마음에도 없는 말은 아무 힘을 주지 못한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씀만이 힘이 있고, 생명이 있고, 감격이 있다. 진실의 언어만이 인간을 움직이고 우리에게 빛을 준다.
--- p.1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