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생담』이 중국으로 건너온다. 그런데 중국에는 악어가 흔하지 않으므로 악어 대신 용으로 대체하여 용과 원숭이 전생담으로 바뀌게 된다. 다시 우리나라로 건너와서는 악어의 아내가 용왕이 되어 토끼의 간을 원하고 용은 자라로, 원숭이는 토끼로 변신하게 된다. 곧 악어나 원숭이는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동물이 아니므로 쉽게 볼 수 있는 동물로 대체하여 대중에게 친근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꾸민 것이다. 그럼 왜 자라가 토끼를 등에 태우고 용궁으로 가는 장면이 그림이나 조각으로 만들어져 절집 안에 나타나게 된 걸까? 용왕의 신묘한 능력으로 만들어진 용궁은 불교에서 바닷속에 있는 또 하나의 불국정토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그 내용을 기록한 경전도 있다. 『해룡왕경(海龍王經)』에 ‘해룡왕이 부처님 설법을 듣고 신심에 차서 부처님께 용궁에 오시기를 청하니 부처님이 응낙하였다. 해룡왕은 신통조화로 바닷속에 들어가 큰 대궐을 짓고 무량보주로 장식하였으며 부처님은 모든 비구·보살과 함께 용궁에 들어가 용왕을 위하여 설법하였다’고 하였다. 곧 자라가 토끼를 등에 태우고 용궁으로 가는 모습은 보살이 중생을 불국정토로 인도하는 장면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토끼를 태운 거북이나 자라 그림이 벽화로 그려지고, 수미단의 조각으로도 나타나고, 나무 조각으로 만들어져 법당의 외부에 배치되기에 이른 것이다. 또 용궁은 수중세계이니 법당을 화재로부터 보호하려는 소망도 함께 담아 낸 것이라 하겠다.
--- p.25~28, 「사령과 사신 - 거북」중에서
게 조각은 법당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조선 시대 후기에는 법당을 중생들을 태우고 극락으로 건너갈 반야용선으로 생각하기에 이르렀고 그러한 생각들을 조각으로 나타내게 된다. 법당이 배라면 그 뱃머리는 정면 중앙계단이 되니 이 중앙계단의 소맷돌에 용을 새겨 넣은 사찰이 수도 없이 많다. 천은사 극락보전(보물 제2024호)의 경우는 정면 현판 옆에 이미 청룡 황룡이 있지만 좌우에 있는 귀공포 위의 청룡, 황룡의 꼬리가 법당 뒤 귀공포 좌우에 조각되어 있다. 곧 전면 귀공포에 조각된 용의 꼬리가 대각선으로 건너가 뒤 귀공포에 설치되어 있는 것이다. 정면 소맷돌에 용이 없는 대신 아예 법당을 배의 몸통으로 보고 앞, 뒤로 용의 머리와 꼬리를 새겨 넣어 법당이 반야용선이라는 것을 확실히 해 둔 것이라고 생각된다. 소맷돌에 용을 조각했어도 법당이 물에 떠 있는 용선이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게와 자라를 법당 기단석에 새겨 넣은 법당도 있다.
이런 조각이 여수 흥국사 대웅전(보물 제396호) 기단부에도 있고 청도 대적사 극락전(보물 제836호) 기단부에도 있다. 흥국사의 경우는 마당 석등의 대좌도 거북이로 하여 한 번 더 바다라는 것을 강조한 듯하다
--- p.130, 「육지와 수정의 생물 -게」중에서
지금 남아 있는 돌장승들의 명문을 보면 1600년대 말부터 1700년대 초반까지 집중적으로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에 목장승까지 곳곳에 세워졌다고 생각한다면 헤아릴 수 없는 장승들이 전국 곳곳의 마을, 절집, 성문에 자리 잡고 있었을 것이다. 현재 장승배기라는 지명이 남아 있는 곳이 전국적으로 1,200여 곳이나 된다. 그럼 왜 이 시기에 이러한 장승들이 집중적으로 세워졌을까? 그건 바로 전염병 때문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중략)
이런 역질이 절집이라고 피해 갈 리 없으니 민간에 세워지던 장승이 자연스럽게 사찰 입구에 등장하게 된다. 사찰 장승이 세워진 연대를 봐도 전염병이 창궐하던 그 시기에 동시다발로 만들어졌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장승에 새겨진 명문도 처음에는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이었는데 이유는 이 시기에 가장 무서운 역질은 천연두였고, 천연두는 중국에서 들어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도교에서 상원(上元)은 음력 정월대보름으로 천관(天官)이 복을 내리는 날이고, 하원(下元)은 시월대보름으로 수관(水官)이 액운을 막아 주는 날이다. 쉽게 말해 복은 받고 재앙을 막겠다는 의미로 중국 주(周)나라의 장군과 당(唐)나라의 장군을 총동원한 것이다.
--- p.270~273, 「상상과 전설의 주인공 - 장승」중에서
현재까지 남아 있는 사찰의 벽화나 탱화를 보면 고려 시대까지는 신선들의 모습을 그리는 풍속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직 불교가 국교였고 국가의 지원을 확고하게 받고 있었기에 왕실이나 민간에 퍼진 도교의 신선들을 받아들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 들어오면서 상황은 180도 달라졌다. 국가의 지원은 끊어졌고, 도심의 사찰은 철폐되었으며, 사대부들의 발길도 저절로 줄어들었다. 사찰을 유지·보전하기 위한 재정적 압박이 심해지다 보니 저절로 스러지는 사찰도 생겨났고, 양반들의 횡포로 강제적으로 폐찰되는 사원도 발생했다. 사찰 터가 명당이다 보니, 조상의 묘를 쓰기 위해 힘없는 스님들을 완력으로 쫓아냈기 때문이다. 흥선대원군이 자신의 부친인 남연군의 묘를 쓰기 위해 폐찰시킨 충청남도 덕산의 가야사가 대표적인 사례라고 하겠다. 특히 정조가 1800년에 붕어한 후 안동김씨 한 가문에 모든 권력이 집중되면서 백성들의 살림은 더욱 곤궁해졌고, 불교계도 그 영향으로 더욱 더 피폐해졌다. 스님들의 숫자가 줄어든 것은 물론 신도들의 시주에 의해서만은 사찰 유지가 힘들었다. 스님들은 누룩을 만들고 종이를 뜨고 방아를 찧었다. 신도들도 사찰의 어려운 살림을 돕기 위해 칠성계, 산신계, 지장계 등을 만들었으니 일반 백성들의 평범한 바람인 무병장수·소원 성취·조상 천도를 빌어 주는 현세 구복적 모습이 확산되었다. 형편이 이러하니 민간에 익히 알려진 신선들의 벽화가 등장하게 된 것도 자연스러운 현상의 하나였다. 괴로움의 현실 세계를 벗어나 장생불사의 신선 세계로 가거나 번뇌가 끊어진 극락정토로 가는 것은 평범한 백성들의 꿈이었겠지만 점점 더 힘들어지는 세상살이에서 그 바람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많은 사찰의 법당 내외의 벽이나 천장에 여러 신선들이 등장하게 된 것도 다 시대의 요청이었던 것이다.
--- p.385~388 「상상과 전설의 주인공 - 신선」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