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에서 우리는 특정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억압받았을 수 있다. ‘화를 내면 안 된다’라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다면 분노를 느끼는 것 자체가 두렵다. “울지 말라”는 말을 반복해서 들었던 사람은 눈시울이 붉어질 것 같으면 참는다. 이처럼 성장 과정에서 감정을 억압해온 사람에게 “어떤 기분이에요?” “말할 때 어떤 느낌인가요?”라고 물으면 당황한다. 이쯤에서 잠시 책 읽기를 멈추고 우리집에서는 어떤 감정은 환영받았고, 어떤 감정은 무시당했는지를 한번 떠올려보자. 감정과 욕구는 충분히 공감을 받으면 봄에 눈이 녹듯이 사라진다. 필자는 이 책을 통해서 감정과 욕구를 알아차리고, 자기 공감을 돕고자 한다.
---pp.17-18
지유 씨처럼 슬픔을 겪는 사람들은 생기 없는 표정으로 말을 단조롭게 하며 움직임이 둔하다. 살아 있음을 느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오감(시각·청각·후각·미각·촉각) 중에서 제일 예민한 감각하나를 깨우는 것이 좋다. 사회운동가인 파커 J. 파머는 심한 우울증을 몇 년 동안 견뎌냈다. 그는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에서 언급했듯이 ‘빌’이라는 친구 덕분에 깊은 슬픔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빌은 30분 동안 친구의 발을 조용히 마사지해주었다. 그는 아직 감각이 살아 있는 신체 중의 발, 그러니까 사람들과 다시 연결감을 느끼는 부분을 찾아냈다.
---pp.26-27
처음에는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더라도 서연이가 이미 노력한 것에 대해 초점을 맞춰야 한다. 서연이만의 강점과 애썼던 과정 자체를 칭찬해야 한다. 어머니는 자신이 그동안 했던 말의 내용과 비언어적인 메시지(찡그린 표정, 퉁명스러운 말투)가 불일치해서, 서연이가 헷갈렸겠다며 공감했다. 어머니는 서연이에게 집안일을 간단하게 부탁하거나 서연이를 존중하는 태도를 일관적으로 보여주면서 신뢰를 회복하려 애썼다. 한편 상담자는 서연이가 생기를 되찾는 경험이 일상에서 무엇이 있을지를 물었다. 상담자: “네가 살아 있는 느낌을 느낄 때가 언제야?” 서연이: “보리랑 산책하거나 놀 때요. 우리집의 강아지 이름이 보리예요.” 그런 상황에서 서연이는 몸에 피가 돌고 땀이 나며 흥분된 상태로, 아이 같아졌다. 서연이가 보리의 털을 깎아준 적이 있는데, 엄마가 고르게 잘 다듬는다며 칭찬해줬다고 신이 나서 말했다. 상담이 진행되면서 서연이는 반려동물 관련 일에 관심이 생겼다며, 앞으로 혼자 보리를 데리고 동물병원에 다녀올 거라고 했다. 어머니는 서연이가 보리에게 사료를 주거나 산책하는 일을 일과에 넣어 꾸준히 하게끔 격려했다.
---pp.53-54
남편은 아내와 갈등이 불거져서 다시 폭력이 일어날까봐 잠깐 집 밖으로 나갔다. 그의 의도는 둘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이 부부는 각각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이미지를 서로에게 투사해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했다. 배우자의 언행을 과장하거나 왜곡해서 받아들였다. 아내는 자신이 아버지에게 거부당할 것 같아서 남편도 자기를 밀어낼까 두려워 매달리고 싶었다. 소통 욕구가 좌절될 때 선영 씨는 남편에게 비난으로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 후 어떻게 하면 자신이 바라는 것과 두려워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말할지 연습했다. 부부는 여러 번의 대화를 통해 서로를 분노유발자가 아닌 ‘상처받은 내면 아이’로 바라보게 되었다. 배우자가 어떤 자극에 가장 취약한지 알았기 때문에, 그 주제가 나오면 조심스럽게 대화했다. 부부는 화를 적절하게 다루는 방법을 잘 몰랐다.
---pp.86-87
자기 이해에 관한 간단한 기법을 소개한다. 그 중 첫 번째가 인생곡선 그리기다. 인생곡선은 자신의 과거와 현재의 경험을 수치화하고, 미래의 모습을 곡선으로 표현하는 미술치료 기법이다. 이는 내 삶을 돌아보는 기회가 된다. 나는 과연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힘들었고, 그 시기를 어떻게 견뎠을까? 인생 최고의 순간이라고 느꼈던 때를 떠올리면 어떨까? 나의 절정기와 침체기는 언제일까? 이 질문을 던지고 다음과 같이 그려보자. 먼저 종이를 가로로 놓고, 가로축을 직선으로 긋는다. 그래프를 그리는 것처럼 종이 왼편에 세로축을 그려 넣는다. 가로축은 나이, 세로축은 경험에 대한 긍정과 부정의 점수다. 가로축과 세로축이 만나는 0을 기점으로, +(플러스)는 ‘기쁨, 행복, 성취감’ 같은 긍정적 감정을, -(마이너스)는 ‘불안, 슬픔, 분노’ 같은 부정적 감정을 점수로 나타낸다.
---pp.95-96
윌라드 프릭은 『자기에로의 여행』에서 집안 평면도 그리기를 제안한다. 가족 역동을 알고 싶은 시기의 집을 그린다. 열 살 이전에 이사를 해서 여러 장소가 떠오르면, 내게 중요했던 집 하나를 꼽는다. 평면도를 그린 후 조용히 앉아서 각 방의 구조, 풍경, 소리, 냄새를 회상해보자. 이는 그 방과 관계된 경험과 느낌을 되살린다. 어린 시절의 가족 분위기가 떠오르고, 공간마다 느꼈던 감정이 달라진다. 집 안의 공간 활용은 가족관계의 역동이 드러난다. 가족 중에서 누군가와 편하고 친밀하게 지냈다면 그 방에 자주 머물렀을 것이다. 누군가와 불편했다면 둘만 있는 공간과 식사하는 시간조차별로 없었을 것이다. 집 안 곳곳에는 가족 구성원 각각의 상처와 치유의 공간이 있다. 가족 역동을 바꾸고 싶다면, 공간 배치를 바꾸거나 치유 공간을 찾아서 꾸며보자.
---pp.103-104
많은 정보를 담고 있는 가계도를 그리는 것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활용한다. 자신이 가족 내에서 습관적으로 했던 역할과는 다른 역할도 해본다. 돌보기만 했던 사람은 돌봄을 요청해본다. 가족의 일에 무심했던 사람에게는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책임을 분담하게 한다. 예를 들어 집안일을 일부 맡기거나 반려동물을 챙기게 하는 것이다. 부모 중에 한 분이 계시지 않거나 아프거나 우울하다면, 자녀 중 한 명이 부재한 부모의 역할을 한다. 딸이 아픈 어머니를 대신해서 살림을 맡거나 아버지의 정서적인 결핍을 채워주는 것처럼 말이다. 심리적으로 유약한 부모가 자녀를 과보호하거나 과도하게 의지하면, 자녀는 부모의 자리로 올라감으로써 가족 경계가 무너진다. 가족 안에서 남성은 남성끼리, 여성은 여성끼리 편을 나누거나 아버지는 딸 편을, 어머니는 아들 편을 들기도 한다. 가계도를 그리면 가족 중에서 누구와 가장 가까운지, 누구와 소통이 잘 되는지, 누구와 닮았다고 생각하는지, 부모-자녀 사이의 연결고리는 누구인지 등을 알게 된다. 가계도를 보며 가족 역동을 탐색하고 건강한 상호작용으로 바꾼다.
---p.114
자신의 고통을 먼저 마주하지 않으면 자신의 상처라는 쳇바퀴에 자녀까지 합류시키게끔 한다. 한두 세대에서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 대물림은 세대 간에 전수되는 집단 무의식이다. 우리 민족의 대물림만 봐도 이전 세대가 살아남기 위해 기울인 총력이자, 후대가 트라우마를 겪지 않도록 이어져 내려온 지혜다. 전쟁을 겪은 세대의 부모라면 자녀에게 의식주 중에서 특히 삼시 세끼를 먹이는 게 최대 과업이었다. 이전 세대 덕분에 배를 곯지 않는 자녀에게, 자신이 교육받지 못한 한을 자녀를 통해 충족시키려고 한다. 개인이 세대 간에 전수되는 대물림을 거스르기 어렵지만, 내가 나를 변화시키는 것은 가능하다.
---p.120
20대인 그녀는 남자친구가 사랑한다고 아무리 말해도, 그의 말을 못 미더워했다. 남자친구가 자신을 좋아하는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행동이 자신이 새어머니 마음에 드는지 아닌지, 눈치를 보는 행동과 비슷했다. 최초의 기억은 관계를 맺는 방식까지에도 연관된다. 그녀에게 중요한 사람만 바뀌었을 뿐, 외로움이라는 핵심 감정과 중요한 사람에게 버림받지 않기 위해 사랑을 확인하는 방식은 되풀이된 것이다.일부 내담자는 이렇게 묻는다. “내 과거가 달라지지 않는데, 첫 기억이나 유아기 경험을 기억하면 뭐 하나요?”라고 말이다. 과거를 바꿀 수는 없다. 하지만 상처 경험을 재구성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 경험에 대한 시각을 바꾸거나 의미를 부여하는 것에 따라 과거가 다르게 느껴진다.
---p.127
어린 시절을 떠올린 후, 몇 가지 기억에서 느껴지는 공통된 감정을 추려보자. 감정은 하나의 정답이 아니다. 따라서 복잡한 결이 느껴질 것이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몸으로 느껴지는 그 감정이 바로 핵심 감정이다. ‘핵심 감정’이라는 말은 국내외의 여러 심리학자가 사용하는 용어다. 이동식의 『도정신치료 입문』에서 핵심 감정은 “어린 시절 양육자와의 관계에서 경험한 감정”을 의미한다. 핵심 감정은 성인이 되어도 관계를 맺는 방식과 심신의 증상에 영향을 준다. 힐러리 제이콥스 헨델이 쓴 『오늘 아침은 우울하지 않았습니다』에서는 핵심 감정을 “생존의 감정이며 신체 감각의 집합”이라고 보았다. 핵심 감정을 두려움, 분노, 슬픔, 혐오감, 기쁨, 흥분, 성적 흥분으로 분류했다. 우리가 ‘그때 거기’의 과거가 아닌, ‘지금 여기’에서 핵심 감정을 ‘있는 그대로’ 경험하면 치유가 시작된다고 본다.
---p.135
자신에게 하는 질문을 살펴보자. 상담자는 간혹 내담자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다. “○○ 씨가 겪는 어려움을 친구가 비슷하게 겪는다면 뭐라고 말할 것 같아요?” “○○ 씨가 갖는 고민을 똑같이 가진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대하고 싶나요?” 내담자는 상대방에게 공감하는 말이나 행동을 하고 싶어 한다. “그 말을 자신에게 하자”라고 하면 낯설어한다. 자기 대화가 끊겨 있던 사람이라면, 자신에게 적당한 말을 걸기가 어렵다. 스스로에게 부드럽게 질문하면 어떨까? 필립파 페리는 『인생학교 정신』에서 ‘자기 관찰을 위한 5가지 질문’을 제시했다. 1. 지금 내 기분은 어떻지? 2.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3. 지금 이 순간 내가 무엇을 하고 있지? 4. 지금 내가 어떤 식으로 숨을 쉬고 있지? 5. 이제 나 자신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 5가지 질문들에 답하는 것을 기초연습이라 부르자. 그리고 하루에 여러 번 자신에게 묻고 답해보자. 이렇게 연습해서 습관이 되면, 자기 관찰이 시작된 것으로 본다.
---pp.156-157
은재 씨는 상담자에게 전화를 하기 전부터 직관적으로 자신이 결혼을 원치 않는다는 걸 알았다. 그녀는 남자친구한테 결혼 이후에도 상처를 받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결혼식에 갈지 말지 갈등하는 것 자체가 불편한 무언가가 있어서였다. 그녀는 많은 생각에 둘러싸여서 단순한 직관이 드러나지 않았다. 직관이라는 건 대체무엇일까? ‘직관’의 사전적 정의는 ‘대상이나 현상을 보고 즉각적으로 느끼는 깨달음’이다. 감각, 경험, 연상, 판단, 추리 따위의 사유 작용을 거치지 않고, 대상을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작용이다. 우리가 직관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 어떻게 해야 자신의 상처를 극복할 수 있을지 알 수 있다. 다만 그것을 실천하느냐 안 하느냐의 차이다.
---pp.184-185
자신을 사랑하고 인정하는 심리치료법인 ‘미러 워크(mirror work)’를 개발하고 실천했다. 그녀는 거울 속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직면을 반복해, 끝내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었다. 매일 꾸준히 거울을 본 후 감정일지를 쓰면, 자기를 수용하는 여유가 생긴다. 처음부터 나와 상대의 눈을 보기가 어려울 수 있다. 나와 상대방의 코, 입, 목 언저리를 보아도 괜찮다. 조금씩 용기가 생겨서 내 눈을 보면 의외로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다. 입 밖으로 자기 사랑을 분명하게 소리를 내어 말하는 게 미러 워크의 핵심이다. 나를 사랑하고 싶다고, 나와 친해지고 싶다는 바람을 말한다. 자기의 느낌과 확언이 일치해야 효과가 있다. 자기에게 와닿는 확언 하나만이라도 반복하는 게 효과적이다. 미러 워크가 지속되면 어느 순간 나의 감정, 생각, 건강 상태를 알아차릴 수 있다. 현실적으로 심리상담을 받기 어렵다면, 미러 워크와 감정일지 쓰기를 추천한다.
---p.191
미자 씨는 위기 상황에서 호흡을 바로 알아차릴 수 없었다. 상담실에서 ‘전조증상이 일어날 때 어떻게 다룰지’를 배웠다. 미자 씨가 살면서 가장 안전했던 장면에서 편안하게 숨 쉬는 것을 연습했다. 자신이 숨을 원활히 쉴 수 있도록 옆에서 보살피는 사람, 동물, 사물 이미지 중에 골라보자고 했다. 종교가 있던 그녀는 수녀님이 자신의 등을 가만히 쓰다듬는 장면을 선택했다.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하면 산소마스크를 낀 자신과 수녀님을 떠올리며 숨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숨을 쉬기 어려운 사람들은 미자 씨 같은 어르신뿐만이 아니다. 나이와 상관없이 공황장애 증상이 있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회사를 그만두고 싶은데 다녀야만 하는 무기력한 직장인들은 다른 곳에서는 괜찮은데 사무실에서 숨이 가쁘다. 억압된 감정이 많아서 몸의 어느 부분에 뭉쳐 기(氣)와 피가 원활하게 흐르지 않는다. 이때 몸에서 가장 쉽게 조절할 수 있는 게 숨이다. 바른 호흡을 통해 답답함을 자각하고 놓을 수 있게 돕는다.
---pp.212-213
현규 씨는 잊고 있었던 기억인데 어떻게 떠올랐는지 모르겠다며, 이렇게 하는 게 과거 사실과 다른데 무슨 효과가 있냐고 물었다. 과거의 사실 자체는 바뀌지 않는다. 하지만 과거 장면을 바꾸어 자신이 원하는 공감과 위안을 받을 수는 있다. 실제 있었던 현실처럼 상상할수록, 뇌에서 경험한 것과 비슷한 효과를 가진다. 현규 씨는 그때 거기 장면을 각색했다. 자신이 믿을 만한 이모를 등장시켜서 현규 씨 이마에 물수건을 대고 떨리는 팔과 다리를 정성껏 주물렀다. 이모가 자신을 안타깝게 보며 “우리 현규, 얼른 낫자”라고 말하는 것을 상상했다. 서러움이 가득한 회색빛 장면에서 방안 가득 따뜻한 돌봄의 색으로 장면이 바뀌었다. 이모의 공감적 태도는 눈빛과 말투였다. 상상 속에서 이모가 부드럽게 “우리 현규, 얼른 낫자”라고 하는 말에 현규 씨는 울컥했다.
---pp.221-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