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혀로 느낄 수 있는 맛이 다섯 가지뿐이라면, 현재 우리가 즐기는 수만 가지 요리의 다양한 맛은 대체 무엇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단지 ‘향’일 뿐이다. 음식을 먹을 때 입 뒤로 코와 연결된 작은 통로를 통해 향기 물질이 휘발하면서 느껴지는 극소량의 향이 수만 가지 맛의 실체인 것이다. 이처럼 작은 통로로 휘발되는 1백만 분의 1 이하의 향기 물질이 음식 맛을 좌우하고 식품의 운명을 바꾼다. 풍미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맛에 있어서 미각의 역할은 5~20%, 후각의 역할은 95~80%라고 말하기도 한다. 식품의 성패가 맛에 달려 있다면, 맛의 성패는 향에 달려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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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각은 임의로 차단할 수 없는 유일한 감각이다. 꿈꿀 때도 작동하고 숨을 쉬는 한 느낀다. 그리고 후각보다 많은 유전자를 점유하는 기능은 원시동물일수록 뇌의 많은 면적을 차지한다. 최초의 포유류는 오늘날의 고슴도치와 상당히 유사한데, 이런 고슴도치의 뇌는 후각기관이 가장 넓은 영역을 차지한다. 나비의 뇌는 무려 절반이 후각이다. 이렇듯 후각은 초기 감각이라 맨 먼저 발달했을 뿐 아니라 많은 동물의 지배적인 감각이다. 지향성의 메커니즘은 후각에서 가장 먼저 나타났다. 시각과 청각은 정확한 지각을 위해서 상당히 많은 예비 과정이 필요한데, 후각은 그런 과정이 적은 단순한 시스템으로 되어 있고, 해부학적으로도 변연계와 가장 가깝고 감정 표현에 개입되는 뇌 부위에 가장 직접적으로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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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 물질은 종류가 많고 이름도 낯설다. 모르긴 해도 이름 때문에 공부를 포기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식품을 전공한 나도 힘든데 식품이나 화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에게 이 책에 등장하는 용어와 향료명은 정말 넘기 어려운 벽일 것이다. 하지만 자주 접하여 익숙해지는 것 말고는 별다른 방법이 없다. 그나마 작용기별로 특징을 살펴보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이다.
향료명은 이명이 너무나 많다. 처음 발견한 물질에 따라 붙인 관용명, 상품명 그리고 나중에 체계적으로 붙인 IUPAC명(International Union for Physics and Chemistry) 등이 있다. 물론 세계 표준은 IUPAC명이다. 가장 긴 사슬을 기준으로 포함된 서브체인이 어디에 붙어있는지 같은 정보를 바탕으로 이름을 붙인다. 그래서 학술적으로 쓰이며, 현재 가장 체계적이고 합리적이라 할 수 있다.
--- p.180
어떤 음식에서 바람직하지 못한 맛이나 향을 이취(Off Flavor)라고 한다. 보통은 식품 성분의 화학적 변화나 오염에 의해 발생한 페놀취, 산화취, 부패취, 금속성 맛 등이 작용하지만 맥락에 맞지 않는 향, 과도한 향도 이취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사람들은 음식에 가장 보수적이다. 아무리 좋은 향도 맥락에 맞지 않거나 과하면 이취로 느낀다. 예를 들어 미국식 IPA의 경우에는 미국이나 신대륙 홉이 가지는 시트러스나 열대과일 향에 더해 쓴맛이 있고, 효모의 캐릭터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미국식 IPA라고 해놓고 홉의 특성이 드러나지 않으면서 효모의 특성은 강하다면 미국식 IPA라고 할 수 없다. 사워 맥주에서 바람직한 신맛은 다른 맥주에서는 이취로 취급된다. 디아세틸은 라거 맥주에서 느껴지지 않아야 하지만, 어떤 맥주에서는 약간의 디아세틸이 그 맥주의 특성이 된다. 이처럼 이취는 맥락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많다. 그리고 양에 절대적으로 의존한다. 그래서 악취 물질도 적절하게 존재하면 향의 풍성함에 기여하는 긍정적인 기능을 한다.
--- pp.345~347
로스팅 시간에 따라 향기 물질의 종류도 달라진다. 메일라드 반응이 시작되면 초산과 포름산이 만들어지는데 이것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사라진다. 헥사날, 푸르푸랄류와 4-비닐과이어콜 등 많은 향기 물질도 생성 후 점차 사라진다. 결국 향기 물질은 중배전 정도에서 많은 것이다. 그래서 블랙커런트 느낌을 주는 3-Mercapto-3-methylbutyl formate 같은 물질은 강배전(Dark roast)에서는 완전히 사라지기도 한다. 흙냄새, 견과류 냄새 등을 내는 피라진은 초기 단계에서 잘 만들어진 후 열에 안정하여 끝까지 유지된다. 커피의 핵심 향기 물질인 2-푸르푸릴싸이올, 피리딘, 메틸피롤, DMTS는 로스팅 중에 꾸준히 증가한다. 그래서 로스팅은 온도와 시간 관리가 중요하다. 로스팅이 부족하면 향이 부족하고 로스팅이 과하면 향은 분해되고 원하지 않는 풍미의 물질이 생성된다. 로스팅이 약배전에서 강배전으로 진행되면서 일어나는 첫 번째 변화는 신맛의 감소이고, 그 다음으로 향기 성분이 감소하며, 다음으로 감미가 감소한다. 그리고 너무 빨리 멈추면 바디감이 부족하게 된다. 생두의 특성과 원하는 최종 제품의 특성에 따라 적당한 시간에 멈추는 것이 로스팅의 핵심이다.
--- pp.423~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