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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의 기억 2

놈의 기억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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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06월 10일
쪽수, 무게, 크기 272쪽 | 332g | 135*200*18mm
ISBN13 9791165343552
ISBN10 116534355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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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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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사무실로 향했다. 확인해야 할 게 있었다. 문득 자신이 둔기를 맞아서 기억을 잃은 게 아니라 기억 삭제술을 시행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없이 컴퓨터와 파일 로그 기록을 모조리 뒤졌지만,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그는 자신이 쓰러졌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사무실 바닥에서 잠이 들었다.

“정우야, 일어나. 일어나 봐!”
정우는 엉망이 된 진료실 바닥에 잠이 든 채 누워 있었다. 바닥의 한기 때문인지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떨고 있었고, 얼굴은 눈물범벅이 되어 있었다.
“너 이렇게 맨바닥에서 자면 입 돌아가.”
수진이 부드러운 손길로 그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어린아이 대하듯 더러워진 그의 옷을 툭툭 털어냈다.
“한동안 잠잠하더니. 빨리 일어나. 밥 먹으러 가자.”
수진에 이어 인욱이 어질러진 사무실을 두리번거리며 들어 왔다.
“형! 이게 뭔 난리래요. 우리 아침 먹으러 가요. 좋은 소식이 있어요. 식당 가서 말해 줄게요.”
(…)
“이거 맞죠? 아무튼 경비 아저씨가 그 차가 혹시라도 또 오면차 번호랑 차 주인 휴대전화랑 다 찍어 놓고 저한테 바로 연락 준다고 했어요. 그 옆 동 아주머니가 참 좋은 분이었나 봐요.
경비실에 있는 에어컨도 작년에 그 아주머니가 나서서 설치한 거라고 하더라고요.”
“아직 의식은 없으셔?”
수진이 큰 눈을 더욱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네, 아직요. 빨리 일어나시면 좋을 텐데.”
인욱이 정우의 축 처진 어깨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형, 기운 내요. 사람들은 원래 제일 중요한 순간에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지곤 해요. 범인 잡고 나서, 우리 슬퍼하는 건 그때 가서 맘껏 하자고요.”
수진이 인욱의 말을 듣더니 기다렸다는 듯 해장국에 눈물을 떨어트렸다. 동생의 죽음 이후 수진이라고 버티기 쉬웠던 것은 아니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정우는 숟가락을 들어 꾸역꾸역 해장국에 밥을 말아 먹었다.
수진도, 인욱도 따라서 묵묵히 밥을 먹었다. 어쨌든 밥을 먹으면 살아졌다. 적어도 산 사람은 그랬다.
--- 「10장. 조작된 기억」

황미영은 양손으로 배를 감싸며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일이 익숙한지 그녀는 신음 소리를 내지도, 욕을 하지도 않았다.
“이제 가서 쉬어.”
상황과 맞지 않게 난데없이 다정한 그의 음성이 들렸다.
곧장 집으로 간 그녀는 미지근한 물로 샤워를 하면서 얼어붙은 몸을 녹였다. 이미 오래전부터 동상으로 손상된 조직이 죽어서 떨어져 나가는 괴저가 발생했다. 미영은 샤워기 물줄기에도 움찔거렸다.
다 씻고 거울 앞에 선 그녀의 앳된 얼굴을 보고 정우는 나이를 짐작했다. 거울 속 황미영은 정우보다도 더 어렸다.
‘황미영 씨가 젊었을 때 기억이구나.’
남의 기억을 보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이전에는 그저 감상 수준에 머물렀던 타인의 고통을, 기억을 통해선 여실히 느낄 수 있었으니까.
정우는 기억이 흐르는 와중에도 생각을 정리했다. 분명 황미 영이 지우고 싶다고 했던 기억은 이게 아니었다. 그녀는 정우 에게 거짓말을 했다. 정우는 그녀에게 지우고 싶은 기억을 떠올리라고 했을 뿐, 정확히 어떤 기억을 지우게 될지 확인한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녀는 기억을 지울 때 자신의 인생 전반 에서 고통스러웠던 기억 모두를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그 고통의 시간이 지난하게도 길어서 그녀가 인생 대부분의 기억을 잃게 된 것은 아닐까라고 정우는 짐작할 뿐이었다.
--- 「11장. 황미영」

기억을 보는 게 마치 전능한 일처럼 느껴진 적도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오히려 그 반대였다. 기억을 보는 일로는 그 어떤 일도 막을 수 없었다. 되레 무기력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기억을 보면 진실을 관통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지만 그마저도 착각이었다. 기억은 늘 한쪽 면만을 보여 준다. 자꾸 단면만 보다 보면 진실을 대하는 태도가 무너진다. 막상 진실이 눈앞에 있어도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생각에 잠겨 있는데 인욱이 3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조사실로 되돌아왔다.
“형! 찾았어요. 근데….”
인욱이 평소답지 않게 말끝을 괜히 길게 끌었다.
“근데?”
“이정출 씨 일주일 전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대요.”
“뭐, 뭐라고?”
“일단 지금 가서 유가족이라도 만나 봐야겠어요. 제가 만나 보고 나서 연락할게요.”
--- 「16장. 놈의 기억」

‘순간적으로 눈이 멀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거야.
나는 기억을 지우다 못해 왜곡한 거야.
내가 지수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기억하기 싫어서.
내가 그토록 나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서.’

사실 정우도 알고 있었다. 기억이란 게 진실만을 말하는 건 아니란 것을. 기억은 머릿속에서 주관과 해석에 따라 재입력된다.
‘왜 나는 기억 속에서 진실을 구했을까? 애초 그 안에 진실 따윈 없는데.’ 사람은 종종 사소한 디테일을 잘못 기억하곤 한다.
‘어? 그때 봤던 색깔이 아닌데? 난 좀 더 파란 계열이라고 생각했는데.’ ‘여기가 이렇게 좁았던가? 난 더 넓은 줄 알았는데’ 또한 남의 호의를 새하얗게 잊어버리고, 오직 자신의 노고에만 집중하기도 한다.
기억 속에 나는 내 필요에 따라 실체보다 더 나은 사람일 수도, 더 못한 사람일 수도 있다. 온전한 나의 선택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음에도.
‘그땐 상황이 어쩔 수 없었어. 누구라도 그랬을걸?’하고 마치 떠밀린 것처럼 과거 자신의 선택을 합리화하기도 한다.
수치심에서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남을 탓하고, 자신의 잘못은 희미하게 지워 버리는 경우도 잦다.
그렇게 스스로 거짓말을 끊임없이 되뇌고 나면….
충분히, 자신도 그 거짓말에 속을 수 있다.
--- 「19장. 기억과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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