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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프 좋아하세요?

수프 좋아하세요?

: 나를 먹여 살리는 정직한 기다림의 맛

좋아하세요? 시리즈-05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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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11월 25일
쪽수, 무게, 크기 224쪽 | 300g | 128*188*17mm
ISBN13 9788998599898
ISBN10 8998599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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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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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틴다는 말에도 싫증이 날 것 같은 날이면 야채 수프를 끓인다. 감칠맛과 풍미를 느끼려면 채수를 우려내야 해서 성미 급한 나와는 상극인 수프다. (…) 수프를 끓이며 내 몸과 마음의 시곗바늘이 돌아가는 속도가 조금씩 느려지도록 조정한다. 기다림에 익숙해지도록 몸과 마음을 길들이는 수련과도 같다. 불 앞에서 조금씩 으스러지는 재료를 나무 주걱으로 천천히 휘저으면 정체 모를 불안도 뒤편으로 밀려난다.
--- p.20

식사를 요란하게 준비하다 보면 여덟 시 반에서 아홉 시가 되어서야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그래도 주린 배를 움켜쥐고 고집스럽게 단호박을 찌고 으깼다. 단단하고 옹골찬 원형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커스터드 크림처럼 변할 때까지. 부드러운 단호박 수프를 한 스푼 떠서 입으로 밀어 넣으면 저지할 새도 없이 목구멍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달콤한 수프를 음미하다 보면 내가 나를 돌보는 법을 잊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 시절 나는 아무도 없는 고요한 방에서 저녁 한 끼는 원하는 요리를 챙겨 먹어야만 내가 거주하는 공간을 좋아할 수 있었다.
--- p.26

이제 내 아픔은 내가 챙긴다. 채소를 가득 썰어 넣은 묽은 수프를 한 냄비 끓이면서 종종 생각한다. 엄마가 아플 때는 어떤 음식으로, 어떻게 아픔을 대비했을지. 고통이 지나간 후에 먹기 위한 죽 한 그릇, 수프 한 그릇을 엄마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혼자 끓였을까. 요란한 통증으로 속 시끄러운 밤을 홀로 보내는 날이면, 동거인이 셋이나 있는 집에서 나 홀로 아픔을 달랬을 엄마의 밤을 떠올린다. 엄마는 쌀을 불렸을까, 아니면 분말 수프 봉지를 뜯었을까. 아니면 죽도 수프도 아닌 다른 방법으로 자신의 고통을 어루만졌을까.
--- p.92

좋아하는 사람이 좋다고 말하는 음식이니 딱 한 번만 속은 셈 치고 먹어 보자 하고 수프를 떠먹은 그 순간, 나는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사양≫의 한 대목을 낭독하는 연기자처럼 선명한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 ≪사양≫은 식당에서 수프를 한 숟가락 뜬 어머니가 “희미한 비명을 지르셨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희미한 비명’이라는 표현을 몸으로 이해한 순간이었다. (…) 그날 식사에서 메인 디시는 수프였다. 이 맛있는 걸 왜 여태 몰랐지? 야채 수프 맛있다고 가르쳐 준 사람이 없었다는 게 억울할 지경이었다.
--- p.180

오늘의 메뉴는 쪼그라들기 시작한 시금치와 감자 한 알, 자투리로 남은 양파를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는 음식, 감자 시금치 수프 당첨이다. 상태가 미심쩍은 냉장고 속 자투리 채소를 없애는 데엔 수프가 제격이다. 시금치를 넣어 수프를 끓이겠다고 하니 “시금치를 넣은 수프라고요?”라며 동거인이 호기심을 보였다. 사실은 처음 해 보는 요리지만 자신 있는 척, 많이 해 본 요리인 척 당당하게 주방으로 걸어갔다. 수프는 실패가 없지. “오, 맛있다!” 반응이 좋으면 칭찬을 받은 학생처럼 기쁘다. 자신 있게 내놓을 수 있는 수프가 늘어날 때마다 한 단계 높은 수준의 생활력을 장착한 어른이 된 기분이다.
--- p.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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