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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

어른들

[ 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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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12월 15일
판형 양장?
쪽수, 무게, 크기 212쪽 | 238g | 120*185*14mm
ISBN13 9788954447874
ISBN10 89544478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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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마치 내게 물건이라도 팔듯이 말했다.
“그럼요. 요즘 난자 냉동이 얼마나 인기가 높아졌는데요.”
(……) 나는 여름 휴가철을 맞아 인기가 많아진 예테보리의 한 레스토랑을 미리 예약해두었다. 난자를 채취하여 은행에 예치하는 난자 계좌를 개설한 기념으로 근사한 점심과 고급 화이트와인을 음미하며 축하할 생각이었다.--- p.13

엄마와 만날 때마다 마르테는 더 이상 못 견디겠다며, 새엄마로만 살기 싫다고 울먹였다. 그럴 때면 엄마는 마르테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하지만 마르테, 요즘은 아무도 새엄마라는 말 안 써. 넌 보너스 가족이 되는 거야. 요즘은 그렇게 말하더라, 보너스 가족이라고. 그러면 마르테는 내 보너스는 어디 있냐고 거듭 물었고, 그럼 나 역시 마르테의 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결국엔 다 잘될 거야. --- p.16~17

여기서는 마르테가 어른이었다. 자기 것인 양 도자기 그릇을 씻는 것도 마르테이고, 이곳에 어울리는 쿠션을 사는 것도 마르테다. 나는 그런 일을 할 만큼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 나도 한두 번쯤은 여기서 혼자 시간을 보내는 걸 생각해본 적이 있다. (……) 하지만 마르테도, 크리스토페르도, 엄마도, 스테인도 없을 때 여기서 혼자 지내는 것은 너무 번거로운 일이었다. --- p.28~29

나는 혼자 임신한 몸으로, 임신했다는 것이 자랑스러우면서도 외로움을 느끼며, 그 상태로 직장과 집 주변을 돌아다니는 걸 상상할 수 없었다. 엄마나 마르테나 친구 하나만 곁에 두고 출산하고, 남자라는 존재쯤이야 전혀 아쉬워하지 않으면서 아이의 엄마라는 것만으로, 늘 아이와 함께하는 삶만으로, 가장 위대한 그것만으로 만족하는 것을 말이다. --- p.59

마르테는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서 뭘 보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한 손은 배에 대고 있었다. 아직 별로 나오지도 않은 배를 왜 저렇게 만지는지. 의식적으로 임신한 사람의 몸짓을 취하는 걸까? 유튜브라도 보고 저런 제스처를 연구한 걸까? 몸을 앞뒤로 뒤뚱거리고, 배 위에 손을 올려두는 행동을? --- p.62~63

내 발바닥에 화상을 입혔던 금속으로 된 파라솔 받침대, 책을 읽다가 잔을 그늘 아래로 옮겨두는 걸 깜빡해서 결국 상한 맛이 났던 우유. 아빠는 그 우유를 햇살이 닿았다고 해서 ‘선키스’ 우유라고 불렀다. 그리고 노란 벽들. 저들이 흰색 페인트로 지워버린 노란색. 나는 그 생각만으로도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 p.94~95

그는 여기 있고 싶어 해, 나처럼. 나는 술에 취해 몽롱해진 정신을 가까스로 붙잡고 생각해봤다. 그는 나와 함께하고 싶은 거야. 나는 몸을 좀 더 일으켜 그의 목덜미에 코를 대고 숨을 들이쉬었다. 좋은 냄새가 났다. 그는 안전하다. 나는 한 손으로 그의 턱을 잡고 키스했다. 그의 메마른 입술은 닫혀 있었다. --- p.132

나는 결코 누군가의 엄마가 되지 못할 것이고, 내가 예순다섯이 되었을 때 내게 노래를 불러줄 장성한 자녀도 없을 것이며, 누군가의 할머니도 되지 못할 것이고,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낼 손주들도 없을 것이다. 내 안에 텅 빈 동굴이 열리는 것 같았다. --- p.158

나는 아랫배에 손을 올려놓고 가늠해보려 했다. 이 안에서 무언가가 아직 작동하고 있는지, 무엇이라도 생명을 지탱할 수 있는 게 있는지, 또는 그저 말없이 드러누워 죽어 있는지. 손바닥 아래로 따뜻한 피부만이 느껴졌다. --- p.188

오래된 조개껍질과 해양 지도 액자를 놓아둔 선반의 먼지 층이 햇살에 드러났다. 시간은 별장과 정원과 나를 통과하며 지나갔다. 이번 여름도 다른 여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주 더웠던 해가 언제였고 고등어를 많이 잡았던 때가 어느 여름이었는지 몰라도, 어떤 여름은 곧 가고 다른 여름이 올 것이다.
---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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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초반부를 읽으며 여러분은 아마 이 말을 반복적으로 중얼거릴 것이다. “이해가 안 돼, 다 큰 어른들이 저게 무슨 짓이지?” 그도 그럴 것이 이 소설 속 자매의 모습은 어른들의 행동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질투심과 나약함, 외로움과 사랑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만 돌보는 게 불안하여 기어이 임신을 한 동생 ‘마르테’와 그런 동생을 한심해하면서도 자신 또한 아이를 갖고 싶다는 욕망에 동생의 남편에게까지 손을 뻗치는 언니 ‘이다’. 하지만 다 읽은 후엔 끝내 이 말을 중얼거릴 수밖에 없다. “도무지 이해가 안 돼…… 나라도 저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드니까.” 그렇다. 자매의 모습은 내가, 우리가 숨기고 있던 마음속의 덜 자란 나 자신이다. 그러니 우리는 이 소설을 다 읽고 또 읽을 수밖에 없다. 이 소설 속에 우리가 있으니까. 도저히 이해되지 않아서 외면했던 나 자신이 거기 있으니까. 책장을 덮고 우리는, 나는 비로소 어른이 된다.
- 한정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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