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 안창호 선생은 제 민족이 침략과 외력의 간섭 없이 최선의 문화를 창조하면 형형색색의 이종(異種)의 꽃을 피운 아름다운 화단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이상과 꿈의 세계일 뿐이다. 지금 이 시각에도 지구촌 곳곳에서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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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유지하려거든 전쟁을 준비하라’라는 라틴 격언은 스위스에 딱 맞는 말이다. 어느 쪽이든 편을 들지 않는다고 중립이 지켜지는 것은 아니다. 독일이 스위스 침공을 포기한 것은 그로부터 얻게 될 이익보다 더 큰 비용과 손실이 우려되었기 때문이었다. 전쟁 억지력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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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바티칸은 스위스 용병이 지키고 있다. 그들이 바티칸 경비 임무를 시작한 것은 1506년경이다. 1527년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신성로마제국 카를 5세의 포위 공격을 받을 때, 500명의 스위스 용병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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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제네바에서는 장 칼뱅의 엄격한 금욕주의에 입각하여 귀금속의 착용과 판매가 금지되어 있었다. 신교도 장인들이 주목한 것이 시계였다. 그것은 엄격한 생활 관리를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었다. 오늘날 세계 최고의 기술을 자랑하는 스위스 시계 산업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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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라가 위기를 극복하는 데 있어서 ‘국가 정체성’은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이다.21 그것은 고유의 언어, 문화, 역사와 관련이 있다. 특히 민속, 민요, 민족 서사시 등의 문화적 정체성은 매우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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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 로히테르는 선원이나 병사들에게 아버지나 할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전근대적인 해군을 조직적으로 변화시켰다. 깃발 신호를 개선하고 세계 최초로 해병대를 만든 사람이기도 하다. 선원의 복지에도 힘썼다. 음식과 임금뿐만 아니라 부상자 치료를 위하여 의료시스템을 개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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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제독: 미힐 드 로히테르」의 마지막 해전에 ‘열두 척’이라는 대사가 나온다. 실제 네덜란드 함선은 열일곱 척이었다. 열두 척의 신화를 쓴 명량해전의 영향을 받은 것일까? 하나 더 덧붙인다면 이순신 장군에게 아들 회(會)가 있었듯이 드 로히테르에게는 앙헬(Engel)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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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일찍이 죽을 결심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부활절 봉기 전인 1915년 8월, 동료의 장례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삶은 죽음으로부터 불쑥 생겨나고 살아 있는 국가는 애국심이 강한 자들의 무덤으로부터 불쑥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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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루이스 쇼의 아내와 둘째 며느리도 일본인이었다. 일본의 영향을 받았을 법도 한 그가 한민족의 독립운동에 깊이 관여한 이유는 무엇일까? 사업상 경쟁 관계로 인하여 반일감정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을 것이다. 오랜 피지배 민족으로서의 아픔과 깊은 연민이 그를 이끌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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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기에 걸친 모든 박해와 희생자를 다 합친다 해도, 다신교를 믿는 로마인들이 살해한 기독교인은 몇 천 명을 넘지 않았다. 이와 대조적으로, 이후 1500년간 기독교인들은 사랑과 관용의 종교에 대한 조금 다른 해석을 지키기 위해서 다른 기독교인 수백만 명을 학살했다.” 유발 하라리(Yuval N. Harari)의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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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독립군과 체코군단의 관계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집중적으로 접촉했던 것으로 보인다. 독립군의 무기 조달은 일본 측의 자료에 의해서도 확인된다. 독립군의 무기 거래와 관련한 또 하나의 증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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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라스 불바」의 모델이 실제로 있었다. 17세기 중반 부족을 배신한 아들을 처단한 오크림 마쿠카(Okhrim Makukha)라는 추장이다. 큰아들 마자르가 폴란드의 아름다운 처녀와 사랑에 빠져 폴란드 성으로 도망을 가자 두 동생을 보내 붙잡아 오게 한 후 직접 총을 쏘아 목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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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0킬로미터의 피난길에서 굶주림, 질병, 학살 등으로 최소 80만 명 내지 최대 150만 명이 죽었다. 아르메니아 제노사이드(Armenian genocide)는 유대인 홀로코스트(Holocaust) 이전에 발생한 최대의 학살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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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브차바제는 문예 활동과 [이베리아Iveria]지의 발행을 통하여 조지아의 언어와 문화를 되살리는 데 헌신하였다. 1907년 사회주의자들에게 목숨을 잃었지만 그의 아내는 ‘불운한 형제들이 길을 잃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며 당국에 그들의 용서를 청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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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신화 속 주인공들은 전지전능하거나 자유분방하지 않다. 춥고 척박한 환경 때문이었는지 부족함이 있는 인간적 캐릭터에다가 비장함이 있다. 얼음과 불의 혼돈 속에서 태어난 세계는 라그나로크(Ragnarok)로 신의 종말과 인간시대의 도래를 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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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의료 보장이 잘 되어 있으면서도 의료 기술의 수준이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의료의 발전에 스칸디나비아 3국의 도움이 컸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다. 6·25전쟁 때 의료 지원을 해 준 나라는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인도, 이탈리아, 서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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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더와 피히테의 민족사상은 이른바 ‘꽃밭론’으로 알려진 도산 안창호의 사상과 일맥상통한다. 당시 피지배 민족의 목소리를 대변한 것이었지만 지금의 세계화 시대에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할 사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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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에우겐 샤우만의 거사와 1909년 안중근 의거는 5년의 간격이 있지만 식민통치의 핵심 인물을 처단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샤우만 29세, 안 의사 30세, 거사에 사용된 총기 또한 벨기에제 자동 권총으로 같았다. 그러나 거사 후의 상황은 판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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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인들은 스스로 ‘외로운 늑대(Lone Wolf)’라는 인식이 있다. 워낙 인구 밀도가 낮다 보니, 사람들과 접촉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쉽게 마음을 털어놓지 못하는 과묵한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오랜 기간 스웨덴과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고유의 전통문화를 지킬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환경과 무관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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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의 위기 극복은 ‘굴종도 굴종 나름이라는 것’을 잘 보여 준다. 의도되고 계획된 굴종은 끝이 있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피동적 굴종은 끌려다닐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의도된 굴종은 큰 목표를 향하여 먼 길을 가는 것이다. 핀란드는 그것을 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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