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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아주 평화로웠다는 말은 아니다
80571 렘뿌양 아주 오래 건강한 생활을 위한 좋은 습관 나의 가정용 사람들 배양 사물이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에 없습니다 2부: 먼 길을 오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클레이 도쿄, 로쿄 재설 신의 성실해보겠습니다 대과거와 대관람차와 대낮 아주 오래 3부: 헛스윙, 헛스윙을 해 回 캐치볼 그곳에는 왜 아주 오래 오늘의 커피 로쿄, 로쿄 영원히 가장 죽은 환영합니다 이곳은 4부: 이게 나의 평화 컨디셔닝 나를 돕고 왜 돕지 않고 에필로그 이후의 산책에 다녀감 먼 곳 정물의 순서 5부: 미래가 생겨날 것 같다 여러분이 믿지 않는 것을 나도 믿지 않습니다 촉력 포즈 유도리 가끔 시끄러워 나는 자주 기억하지 무대는 무대 뉘앙스 로쿄 6부: 자신 있어? 아주 오래 십자매 퀴즈 이것은 이해가 아니다 파의 기분 야영단 아무것도 필요 없어 부록 안미츠와 성실하고 배고픈 친구들 |
텅 빈 우주
텅 빈 휴게소 다 자라버렸고 다 살아버렸다 그게 꼭 서럽다는 건 아니어서 낮이나 밤이나 죽지 않기로 해 둘에서 하나로 하나에서 영으로 다시 시작하자 --- 「아주 오래」 중에서 누구에게도 물어본 적 없다 왜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아주의 진화는 결국 집을 찾는 종족으로의 도달 나름대로 아름답고 이상하지 다른 땅에서는 눈이 내린다 가본 적도 없고 갈 수도 없는 땅 외딴 곳에서 조난을 당한 기분으로 통조림이나 냉동 만두를 먹으며 여기는 방공호 거기는 어디야 --- 「아주 오래」 중에서 로쿄가 울타리를 넘어 굴러온다. 그 뒤로 또 로쿄가 울타리를 넘어 굴러오고 있다. 로쿄는 하나가 아니고 로쿄는 로쿄, 로쿄. 이런 일에는 그러려니 하면 된다. 입맛을 다시면 된다. 이곳에서 우리는 함께 매일매일 구른다. 구르는 재주가 있어서 안심한다. 이거 귀찮지 않니. 발목을 벗어 내던진다. 울타리 너머로 발목이 날아간다. 뭔가를 이렇게 멀리 던져본 건 처음이다. --- 「로쿄, 로쿄」 중에서 사랑을 말하며 뛰어오다 네가 넘어진 날 나는 사랑이 넘쳤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죽어야지 아니 살아야지 아니 조금 더 아름다워 보이는 쪽으로 타월과 타월을 엮어 매듭을 짓는 동안이었다 매달린 이후에는 긴장 없이 왈츠를 췄다 또다시 편지하자 닿지 않는 악수처럼 --- 「영원히 가장 죽은」 중에서 친애하는 메리에게 나는 아직입니다 여기 있어요 불연속적으로 눈이 흩날립니다 눈송이는 무를 수도 없이 여기저기 가 닿고요 파쇄기 속으로 종이를 밀어 넣으면 발치에 쌓이던 희디흰 가루들 털어도 털어도 손가락은 여전합니다 사람을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 사람은 가장 보편적인 성격을 갖게 될 것입니다 녹지 않으니까 착하다고 말해도 되나요 --- 「이것은 이해가 아니다」 중에서 |
겨우 존재하고 있는,
모든 ‘나’의 이야기 나는 겨우 있어요 / 내일과 같이 여전히 -「이것은 이해가 아니다」 부분 박규현의 시집은 여러 여성들이 모인 야영지 같은 공간이다. 거기에는 아주와 로쿄라는 이름으로 호명되는 인물도 있고, 메리와 안미츠 씨도 있으며, 수많은 ‘나’들도 있다. 그들의 출신과 면모는 제각기 다양하나 그들이 가진 고통만은 모두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무엇이 그들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일까. 어찌하여 이 젊음들은 이미 “다 자라버렸고/다 살아버렸다”라는 느낌을 가지게 된 것일까? 설명서를 읽고 말았다 갈비뼈밖엔 안 되는 인간 여자들을 삼 일에 한 번은 패야 한다고 적혀 있었다 -「신의」 부분 비누로 속옷의 핏자국을 문질렀을 때 아무도 죽이지 않았는데 죽이고 만 것 같은 기분을 -「나를 돕고 왜 돕지 않고」 부분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공유하게 되는 고통들이 있다. 몸의 안쪽에서 비롯되는 것과 외부에서 오는 것. 그 모두는 어느 한 시대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아주 오래” 지속되어온 여성의 서사다. 시집 내에서 같은 제목으로 여러 번 등장하는 시 「아주 오래」는 유년부터 이어지는 여성의 기억과 삶을 그려낸다. 그 장면들은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여성이라면 익숙할 풍경인 동시에, 한 생을 훌쩍 넘어 오래 지속되어온 감각들이기도 하다. 이는 바로 고통의 감각이며, 박규현은 그것을 이야기함에 있어 우회로를 택하기를 거부한다. 박규현의 시에 나타나는 그 여성 화자들의 고통들은 시를 통하면서 조금도 비유가 아닌 채로 등장한다. 박규현에게 있어 그 고통들은 비유로 전달될 수 없는 것이며, 그래서도 안 되는 것들이다. 물풀의 팔다리를 갖게 되자 고요했다 아주 평화로웠다는 말은 아니다 -「나의 가정용 사람들」 부분 시집 전반에 나타나는 풍부한 죽음 이미지를 관념적인 것으로 여기고 지나칠 수 없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박규현이 보여주는 죽음 이미지는 낯설고 선득하면서도 대단히 즉물적으로 생생한 느낌을 준다. 죽음은 물풀과 같은 사물들이 나의 신체를 대체하거나, 나의 기억이 죽음 이후에도 이어지거나, 도처에서 유령을 발견하는 등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으로 죽음을 다루는 일은 박규현에게는 상상이기보다는 차라리 예견이나 환시에 가깝다. 실생활 속에서 늘상 죽음의 위협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여성들에게 죽음이란 남성보다는 가까운 곳에 도사리고 있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뜻하지 않은 형태의 죽음이 늘 가깝다는 사실, 그리고 나의 현생이 내가 태어나기 이전과 내가 죽은 이후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버리는 일은 이미 한 생을 다 살아버린 듯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한 사건이지 않을까. 서울에서 산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아니. 서울에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아니. 서울에서 죽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아니. 서울에서 여자로 산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아니. 서울에서 여자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아니. 서울에서 여자로 죽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서울에서 나고 자라 죽음까지 바라는 건 어딘가 무섭지 않냐면서. -「안미츠와 성실하고 배고픈 친구들」 부분 나름대로 아름답고 이상하지 다른 땅에서는 눈이 내린다 가본 적도 없고 갈 수도 없는 땅 외딴 곳에서 조난을 당한 기분으로 통조림이나 냉동 만두를 먹으며 여기는 방공호 거기는 어디야 -「아주 오래」 부분 박규현은 서울로 대표되는 디스토피아와 “가본 적도 없고 갈 수도 없는” 아름다운 땅의 풍경을 교차한다. 그 아름다운 땅을 우리가 결코 닿을 수 없으나 반드시 도달해야 하는 미래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오지 않는 미래는 오지 않기에 늘 여기보다는 아름답다. 물론 박규현은 알고 있다. 그 아름다움이 환상이라는 것을. 그러나 “나아지는 게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힘을 주고 인간으로서 말한다. 겨우 존재하는 모든 나를 위해서. 박규현의 시는 나-여성이 죽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 세상을 향해 외치는 목소리이다. 그에 응답하는 것이 ‘우리들’뿐이더라도 그는 그렇게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랑을 말하며 뛰어오다 네가 넘어진 날/나는 사랑이 넘쳤다고 생각했다”라고 생각할 수 있게 해준 이들이 남기고 간 것들에 대해 박규현이 할 수 있는 최선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 최선의 목소리는 그렇기에 못내 아름답다. 우리는 또 살아가자 이 소름끼치도록 이상한 세상을 정면으로 마주하자 사납게 또한 꼿꼿한 자세를 하고 -「안미츠와 성실하고 배고픈 친구들」 부분 |
이 기이한 고요와 평화
이 시집의 존재들은 멀고 낯선 곳에 있을 때가 많다. 이국적 이름을 지닌 그들은 비명도 절망도 없이 “외국어로 된 간판을 읽으면서” “다만 선량한 표정으로” “다음을 향해 이송되는 자세로” 서로를 데리고 간다. 그런데 아무리 떠나도 떠날 수가 없다. 폭력과 죽음으로 얼룩진 이 세계로부터. “천국의 문” 앞에서 기다리며 “죽지 않고서 / 천국에 갈 수 있는 포즈에 대해 고민했”지만, 언제라도 “던져질 수 있고 뭉개질 수 있고 짓밟힐 수 있는” 현실이 눈앞에 현상될 뿐이다.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이기를 포기한 자들을 두고 이곳에 와 있으며”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한다. 여행이든 야영이든 산책이든 ‘그곳’에서도 여전히 ‘지금 여기’의 고통을 되새김질하고 있는 것이다. 폭력에 대해 유난히 예민한 감각을 지닌 시인의 내면은 수시로 피를 흘리면서도 열심히 닦아낸다. “성실해지자 어떻게든 이곳에서”, 라고 다짐하면서 ‘나’는 찰흙으로 된 지구와 “함께 구르기로” 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단정해 보이는 시어들은 끊임없이 뒤척이고 있고 어디론가 굴러가고 있다. 별로 힘을 주지 않으며 얘기하는 것 같은데, 안간힘을 쓰고 있는 표정이 필사적으로 박혀 있다. ‘밧줄’과 ‘식칼’이 놓여 있는 집, ‘도끼’와 ‘덫’이 숨겨진 숲, 불안과 공포가 장전된 이 기이한 고요와 평화를 대체 무어라 불러야 할까. 그 속에서 시인은 ‘추락’을 ‘게임’이라고 부르고, ‘울다’와 ‘웃다’를 동의어로 발음한다. 박규현은 이러한 세계 인식을 고백이나 주장이 아니라 언어의 배치와 운동을 통해 조율해나간다. 그의 언어는 문장과 문장의 간격이 넓고 인과적 순서나 논리를 따르지 않는다. 단절되거나 도치된 문장들이 많고, 때로는 동사 하나만 먼저 던져진 채 다른 말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조금씩 어긋나고 비껴가는 듯한 단어와 문장들이 자리를 바꾸며 몇 바퀴 돌다 보면 어느새 나란히 연결되어 있다. 간결한 시행들이 나선형의 구조를 따라 움직이면서 시상을 확장하고 읽는 이의 감각과 정동을 자극한다. 또한, 같은 단어나 음운이 주문처럼 반복되기도 한다. “파열음/파수꾼으로부터/파괴되지 않으려고”(「파의 기분」)와 같은 병치나, “방 밖에 방이 있는/방 안에 방이 있는”(「무대는 무대」)과 같은 반복과 변주를 보자. 의미론적 연결보다는 음성적 연쇄 작용이 소리의 물질성과 속도감을 만들어내며 시에 파동을 일으킨다. 박규현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그 미세하고 다양한 파동을 몸으로 느끼는 일이다. 그리고 그의 다정한 식구들을 차례로 만나보는 일이다. 시집 속에서 ‘나’는 조용히, 그러나 끈질기게 세포분열하고 있다. 사람이되 사람이 아닐 때까지, “너와 도마뱀”이 가족이 될 때까지, 동물과 식물이 가족이 될 때까지. ‘나의 가정용 사람들’을 통해 ‘가족’의 새로운 정의와 윤리가 생겨난다. 이렇게 태어난 ‘모든 나’는 「안미츠와 성실하고 배고픈 친구들」에서처럼 서로를 쓰다듬으며 사랑받고 있다고 느낀다. 그것만이 죽음의 세계를 견디는 최선의 길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는 듯이. - 나희덕 (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