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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ㆍ어서 오세요, 여기는 오생리입니다
봄 겨울을 지나온 것은 향긋하다 오래 간직하고 싶은 봄빛 향기_냉이 장아찌 날마다 짙어지는 봄의 농도_쑥 와플 뒤늦게 만난 깊고 진한 봄맛_머위꽃 된장 시간을 먹고 자라난 향기_더덕구이 접시 위에 내려앉은 봄 풍경_갓꽃 파스타 사소하지 않은 수고로움_고사리 솥밥 끝물도 맞춤한 자리는 있으니_두릅 김밥 톡톡 터지는 싱그러운 생명력_돌나물 비빔밥 할머니, 이젠 제 차례예요_돌미나리전 식탁 위에 피어난 봄의 절정_아까시꽃 튀김 여름 짧은 밤에도 별빛은 밝게 빛나고 여름을 상큼하게 맞이하는 법_완두콩국수 혼자서는 만들어낼 수 없는 맛_감자 샐러드 장마철의 눅눅함을 달래주는 따끈함_수제비 나의 완벽한 여름밤_보리차 밥과 오이지 할아버지의 눅진한 사랑_다슬기 장조림 쏟아지는 별처럼 달콤한 위로_복숭아 병조림 할머니를 응원하는 한 그릇_토마토 스파게티 호캉스보다 좋은 나의 여름 나기_호박잎쌈 지루한 여름날에 빨간 악센트를_방울토마토 마리네이드 올여름의 마지막 열무김치_열무김치 비빔밥 가을 열매가 없어도 저마다의 속도로 물들어간다 작지만 확실하고 고소한 행복_들깨꽃송이 튀김 감칠맛 가득한 가을 한 그릇_고추 다지미 파스타 적막한 산에 밤송이 떨어지는 소리만_밤잼 불안해도 묵묵히 정성을 담아_사과 구이 낱알 하나에 담긴 깊은 사랑_햅쌀밥과 숭늉 젤리처럼 말랑하고 투명한 웃음_감말랭이 순하고 향긋한 나날_가을 냉이 크림수프 가끔은 실패해도 괜찮아_콩 커리 호박을 쪼개는 좋은 날_늙은 호박 크럼블 불안도 추위도 사르르 녹이는 맛_묵은지 된장 지짐 겨울 추울수록 포근하고 정겹다 쓸쓸함을 덜어주는 투박한 위로_빵 지금은 당연한 듯 함께지만_김장 김치와 수육 눈 오는 날에 따끈하게_어묵탕 익숙함에 더하는 새로움 한 스푼_감태 버터 언제라도, 부드러운 다독임_양배추롤 여러 향을 품은 따스한 한 잔_뱅쇼 서리와 겨울바람에 깊은 맛 든다_시래기 오일 파스타 그립고도 정겨운 한 그릇_무굴밥 초록 지붕 집의 앤처럼_비프스튜 사계절이 모두 식탁에 오르는 날_오곡밥과 묵나물 |
직장에서 메뉴를 개발하고 음식을 만들면서도, 정작 나는 늘 배가 고팠다. 바빴고 고단했다. 즉석 밥과 라면으로 말 그대로 끼니를 자주 ‘때웠고’, 계절이 오는지 가는지도 몰랐다. 그저 더우면 옷을 가볍게 입고, 추우면 걸치는 것으로 무심히 계절을 지나쳤다. 우선순위에서 나는 자꾸만 뒤로 밀려났고, 점점 더 작아졌다. 오직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는 어렴풋한 감각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아슬아슬하던 마음이 기어코 바닥을 치며 우르르 쏟아지고야 말았다. 무릎이 시큰시큰 심상치 않더니만 한 시간도 채 서 있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병원에서는 왜 이렇게 될 때까지 그냥 뒀냐며, 무릎 손상이 심해서 절대적으로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진단을 내렸다. 몸이 아픈 것보다 요리를 영영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왈칵 두려움이 몰려왔다. 바보처럼 그때도 나는 나 자신보다 다른 데 더 정신이 팔려 있었다. --- p.5 「프롤로그_어서 오세요, 여기는 오생리입니다」 중에서 집 뒤 산책 길 옆에서 하얀 솜털이 보송보송한 새싹을 마주쳤다. 쑥이다. 생기 가득한 연둣빛 사이에 저 혼자 차분한 색을 띠고 있다. 내게 있어 쑥은 계절을 가늠하는 척도다. 쑥이 얼마나 자랐는지를 보면 봄의 농도가 파악된다. 이른 봄 손톱만 한 올리브색의 어린 새싹을 지나, 한봄에는 솜털이 옅어지고 짙은 녹색이 된다. 쑥이 질기고 거칠어져 먹기 곤란한 수준이 되면, 이제 계절은 여름 근처에 닿는다. 늦여름 뒷산의 산쑥은 내 키만큼 자라난다. 아직은 이른 봄, 지금 쑥은 여린 봄바람만큼이나 어리고 연약하다. --- p.23 「봄_날마다 짙어지는 봄의 농도_쑥 와플」 중에서 화병에 담으니 수수한 꽃들이 집을 환히 밝혀준다. 저도 봄꽃이라고 계절을 닮아 청초하기까지 하다. 냉이꽃은 뭉쳐놓으니 안개꽃 같고, 휘어진 줄기 끝에 매달린 밝은 노란색 갓꽃은 마치 등불 같다. 환한 갓 등불을 바라보자니 이 꽃으로 요리를 해보고 싶어졌다. 동화 같은 풍경을 접시에도 담아보고 싶었다. 작은 꽃잎을 따서 먹어보니 청갓 맛이 난다. 알싸하고 매운맛이 나다가 마지막엔 쌉쌀함이 남는다. 기름기 있는 음식에 곁들이면 입안을 개운하게 해줄 것 같다. 그래, 오늘의 요리는 오일 파스타다. --- p.44 「봄_접시 위에 내려앉은 봄 풍경_갓꽃 파스타」 중에서 계절은 시각만이 아니라 후각으로도 찾아온다. 이때쯤이 되면 어쩐지 완두콩 찌는 향부터 떠오른다. 여름 기운이 감돌기 시작하면 가장 먼저 수확하는 작물, 완두. 이른 봄에 심는 완두는 늦봄이 되면 꼬투리를 통통하게 부풀린다. 갓 딴 완두의 깍지를 까면 잘 영근 완두가 알알이 박혀 있다. 반질거리는 완두콩 형제들이 옹기종기 모여 풋내 스민 연둣빛을 뽐낸다. 봄이라기엔 짙고 여름이라기엔 연한, 딱 그 사이의 색이다. --- p.81 「여름_여름을 상큼하게 맞이하는 법_완두콩국수」 중에서 퇴근한 남편과 함께 밤바람도 쐴 겸 집 근처 논밭 사이를 드라이브했다. 언덕에 잠시 차를 세우고 텀블러에 담아 온 시원한 보리차를 나눠 마신다. 텀블러 속 얼음이 녹으며 챙그랑, 소리를 낸다. 스피커에선 재주소년의 〈여름밤〉이 흘러나온다. 여름밤을 표현한 피아노 선율에 개구리 소리가 더해진다. 우리 두 사람 다 말이 없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별만 총총하다. 도시의 야경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풍경이다. 마치 보리차 밥과 오이지무침처럼. 하지만 그로써 얻는 만족은 도시의 화려함이나 십이첩반상의 풍족함에 비할 바가 아니다. 산들바람과 별, 개구리 소리로 가득 찬 밤. 시원한 보리차 한 잔과 함께하는 이 순간이 내게는 특별하고 완벽한 여름밤이다. --- p.101 「여름_ 나의 완벽한 여름밤_보리차 밥과 오이지」 중에서 들깨꽃송이는 가을을 실감할 수 있는 가을 첫 식재료다. 햇 들깨를 맛보려면 꽃이 모두 지고 계절이 한참 더 깊어져야 한다. 어서 그 맛을 누리고 싶은 마음을 애써 누르며 미리 고소함을 조금 맛보는 셈이다. 들깨를 수확해야 하니까 욕심 부리지 않고, 가을맞이로 조금만. 싱싱한 것보다는 줄기가 상하거나 잎이 약한 들깨 나무에서 꽃송이를 골라 땄다. 꽃송이를 딸 때마다 알싸한 깻잎 향이 번져서 기분까지 상쾌해진다. 어느새 왼손에 예쁜 들깨꽃다발이 들려 있다. 작은 꽃망울을 살펴보니 아직은 어린 하얀 들깨가 주머니 속에 몸을 웅크리고 있다. --- p.143 「가을_작지만 확실하고 고소한 행복_들깨꽃송이 튀김」 중에서 주렁주렁 모과가 열린 나무를 보며, ‘넌 그래도 열매라도 맺었구나. 부럽다’ 하고 혼잣말을 한다. 나무야말로 햇빛을 받아들이고 물을 마시는 똑같은 일상을 제자리에서 몇 년이고 반복하는 존재인데, 그래도 꾸준히 가지를 키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니 기특하기 그지없다. 언제나 꽃이 필까, 왜 이리 열매가 더디게 맺히나 초조해하지도 않고 의연하게 제 나름의 계절을 살아낸다. --- p.163 「가을_불안해도 묵묵히 정성을 담아_사과 구이」 중에서 며칠 동안 정성을 다해 말리고 말렸는데 이런 허무한 결말이라니. 텅 빈 채반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정말 단 하나도 남기지 않고 홀랑 먹어버린 걸 보니…… 고라니도 감말랭이가 참 맛있었나 보다. 그래, 누구든 맛있게 먹었으면 됐지, 뭐. 고라니도 우리 집에 놀러 온 손님이라고 생각하자며 아쉬운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래도 다음에는 우리도 좀 맛볼 수 있게 감말랭이를 더 잘 지켜야겠다. --- p.179 「가을_젤리처럼 말랑하고 투명한 웃음_감말랭이」 중에서 노동으로 주린 배를 채우려면 뭔가를 먹어야 하는데, 바닥난 체력으로 요리를 하기란 정말 쉽지 않다. 그래서 눈을 치우거나 요리가 짐이 되는 날을 대비해서 만들어두는 음식이 있다. 양배추롤이다. 만두처럼 소를 만들어서 양배추로 감싼 다음 크림소스나 토마토소스, 혹은 맛국물을 넣어 끓여내는 요리다. 날 잡아서 한 냄비 가득 만들어두면 냉동실에 넣어두었다가 그때그때 꺼내 먹기 좋다. --- p.226 「겨울_언제라도, 부드러운 다독임_양배추롤」 중에서 앤이 사는 에이번리에 가을, 겨울이 찾아오면 초록 지붕 집 식탁에는 거의 매번 스튜가 오른다. 마릴라 아주머니, 매튜 아저씨, 앤이 테이블에 앉아 정겨운 이야기를 나누며 스튜를 먹는다. 마릴라 아주머니가 난로 위에 커다란 냄비를 얹어 소고기, 양파, 당근, 감자, 양배추를 넣어 끓이는 모습을 보면 만화인데도 절로 군침이 돈다. 밖에서 신나게 놀다 들어온 앤이 배 고프다고 하면 아주머니는 으레 뭉근하게 끓인 스튜를 긴 국자로 휘휘 저은 다음 접시에 담아 내준다. --- p.248 「겨울_초록 지붕 집의 앤처럼_비프스튜」 중에서 |
훈훈하고 싱그러운 책.
계절이 바뀔 때마다, 마음이 고플 때마다 꺼내 읽게 될 책이다. _김신회(에세이스트, 《가벼운 책임》 저자) 책을 읽다 보면 냉장고에 가까운 계절을 채우고 싶어진다. 나에게 수고스럽고 싶어진다. _임진아(삽화가, 《오늘의 단어》 저자) 계절이 느리게 키운 재료에 작고 순한 마음을 얹어 나를 대접하다 거리마다 포진한 음식점, 몇 번의 휴대전화 터치로 집 앞까지 배달되는 온갖 먹을거리,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 없는 패스트푸드, 봉지만 뜯어 끓이면 되는 밀키트……. 끼니를 해결하는 방법은 날이 갈수록 다양하고 편리해지고 있다. 그런데 손쉽고 풍요로운 식탁 앞에서 허기가 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요리란 음식에 사랑을 담는 과정이기 때문일 것이다. 소박하더라도 정성이 담긴 음식은 그래서 위장뿐 아니라 마음속까지 든든하게 채워준다. 자연 속에서 제철 재료를 만나고 요리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그저 배를 채우고 한 끼 때우는 식사가 아니라 재료의 향과 맛이 살아 있는 음식을 만들어보고 싶어진다. 나를 위한 한 끼에 작은 정성을 들여야겠다는 마음이 든다. 스스로를 보살피고자 하는 의욕이 생긴다. 그리고 그건 오늘을 소중히 만끽하고 스스로를 귀히 대접하겠다는 다짐과 다르지 않다. 책에 담긴 전원의 풍경은 영화 〈리틀 포레스트〉처럼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마흔 개의 레시피는 ‘나를 위한 한 그릇’을 차려내는 데 좋은 디딤돌이 되어준다. 정성을 담아 차려낸 음식을 닮은 책을 읽다 보면 불안은 어느새 차분한 안심으로, 허기는 든든한 포만감으로 바뀐다. 추억 머금은 계절 재료와 지금 이 순간을 오롯이 담아낸 기록 도시 생활의 허기를 달래기 위해 저자가 찾아간 곳은 충북에 있는 작은 시골 마을 오생리. 집을 병풍처럼 둘러싼 산, 옹기종기 채소를 심어놓은 텃밭, 갖가지 꽃이 피어나는 산책 코스는 산뜻한 자연 속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오생리 못지않게 경남 합천에 있는 외갓집도 자주 등장한다. 고사리가 나고 밤이 열리는 산, 언제나 넉넉하게 품어주시는 할머니 할아버지, 다 같이 모여 김장을 담그는 장면은 꼭 시골과 연결점이 없는 사람이라도 자연스레 향수를 느끼게 한다. 그건 외갓집이라는 장소가 내게 기꺼이 내주었던 누군가의 애정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저자가 차려내는 식탁이 감각적이면서도 푸근함을 잃지 않는 것도 어린 시절 살다시피 했다던 외갓집의 정서가 음식에 그대로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함께 만들고 나누고 먹었던 추억은 음식에 감칠맛을 더하는 조미료 역할을 톡톡히 한다. 그리고 무심히 지나칠 수도 있는 이 순간을 꼭 붙들어 마음껏 즐길 때 추억은 더욱 풍성해진다. 조곤조곤 계절과 음식을 이야기할 뿐인데, 때를 맞은 재료를 골라 식탁을 차리는 보통날이 모이면 추억 가득한 행복이 찾아올 거라는 다정한 말이 들리는 듯하다. 따뜻한 햇볕이 느껴지는 사진, 향긋한 바람이 불어오는 듯한 글, 간소한 레시피의 담백한 어울림 계절감이 담뿍 담긴 사진도 조연이라 하기에는 아깝다. 사계절이 뚜렷이 드러나는 감성적인 사진은 앉은 자리에서 자연을 가까이 만날 수 있게 해주고, 자신만의 스타일로 계절을 즐길 수 있도록 돕는다. 간략하게 수록된 레시피의 보조 역할도 한다. 삼 년여의 시간 동안 계절을 수집한 저자의 사진을 보다 보면 흐린 날도 얼마든지 화사할 수 있다는 느낌이 든다. 지쳤던 마음에 햇살 같은 위로가 조심스레 찾아온다. 그건 아마 계절을 짙게 느낀 그 순간을 따스하게 포착해 사진에 담아냈기 때문일 것이다. 답답하고 막막할 때 아무 페이지나 펼쳐 훑어보기만 해도 수수한 위안을 얻을 수 있는 이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