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전략은 기술과학의 세계 속에서 이렇게 내파된 교점, 그가 “지식, 실천, 권력의 우주의 지도를 그리는 형상들”이라고 보는 여러 교점을 복잡화하고 역사적으로 촘촘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는 과학자와 지식 노동자가 오늘날 기술과학에서 지배적 이야기의 틀로 삼고 있는 “세속화된 기독교적 리얼리즘의 전체성, 전유, 종말론적 재난, 희극적 해결 방안 및 구원의 역사를 동원하지 않고”, 이러한 교점뿐 아니라 다른 교점 및 세계를 발견하고 추구할 수 있게 도와줄 “뒤섞여 있으면서도 구별되어 있는 문해력”을 발전시키고 결합하도록 그들을 독려한다.
--- p.43
해러웨이는 다중적이고 경계를 가로지르는 문해력을 옹호한다. 그는 그러한 문해력이 현재와 미래의 기술과학계 및 사회에서 벌어지는 복잡하고 전 지구적인 문제를 해석하는 것은 물론, 더욱 자유롭고 민주적이고 올바르며 모든 존재에게 더 많은 것을 약속할 수 있는 세계를 만들기 위한 지역적 논쟁에 시민들이 적극적이고 필연적으로 개입하는 데도 필수적이라고 믿는다.
--- p.45
영장류학을 오리엔탈리즘으로 읽어내면서, 그는 자신의 분석이 악당과 희생자가 등장하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영향과 행위성을 널리 분배하고 ‘선한 의도’, 가부장주의, 사랑이 때때로 초래하는 어두운 복잡성과 결과를 정당하게 평가하는 이야기임을 알린다. 심지어 과학에서도 결백한 위치란 없다는 것이 바로 해러웨이가 내세우는 주장이다.
--- p.59
실제로 해러웨이는 결코 비판과 해체에서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그 비판을 통해 구축되는 ‘다른 세계’로 움직이고자 혹은 적어도 그곳을 향해 제스처를 보내고자 노력한다.
--- p.70
그는 마르크스주의와 정신분석 모두가, 온전한 (남성적) 자기실현을 위해 극복할 대상으로서 차이/여성/타자를 생산해야 하는 이런 기원 이야기의 여러 버전을 병합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사이보그는 자연/문화 이원론의 한쪽 면이 더 이상 반대쪽을 구상하거나 생성하는 데 이용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 대신 사이보그는 다음과 같은 역할을 한다.
--- p.113~114
그는 여성이라는 단일한 정체성의 강압적 환상에 대한 대안으로 여성들(혹은 타자들)의 삶을 아우르는 통일성 및 정체성을 찾으려는 시도보다는, “정체성 대신 결연과 연대를 통해” 나타날 수도 있는 제한적이고 공유된 목표와 희망의 가능성에 주목하는 방향을 더 선호한다고 언급하면서, 위의 용어들을 모두 활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밝혔다.
--- p.121
그는 오드리 로드와 체리 모라가와 같은 ‘유색인 여성’이 쓴 글과 새뮤얼 딜레이니, 본다 매킨타이어, 옥타비아 버틀러, 조애나 러스 등이 쓴 몇 편의 페미니즘 과학소설 등에서 입증된 사이보그 글쓰기를 제안한다. 그는 글쓰기 및 문해력에 초점을 맞추면서, 오염된 범주를 신중하게 사용할 때 생겨나는 정치적 잠재력에 대한 주장을 한층 분명히 드러낸다.
--- p.129
대상을 총체화하는 이론은 “현실 전반”을 놓치기 때문에 멀리하고, 페미니즘 비평은 “과학기술의 사회관계”를 악마화하고 기각하기보다는 그것에 관여하고 그것을 형성하는 일을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해러웨이는 “타자와 부분적으로 연결되고 우리를 이루는 부분 모두와 소통하면서” 우리의 일상생활과 자아를 만들기 위한 새롭고 효과적인 기술을 찾는다.
--- p.131
첫 번째 선언과 마찬가지로 〈반려종 선언〉은, 세 번째 서기 천 년을 맞이하며 환원할 수 없는 차이들 사이에 유망한 관계를 상상하는 동시에 체현하는 방법은 무엇인지를 다루는 이야기, 그리고 친족을 혈연과 오이디푸스적 가족의 측면보다는 자신이 “소중한 타자성”이라 부르는 것들 사이에서 의식적으로 인지되면서도 부분적으로 만들어지는 친밀감의 측면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라 할 수 있다.
--- p.140~141
로버트 보일의 과학과 17세기 런던 왕립학회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연구를 통해, 그들이 소위 객관적 지식에 대한 겸손한 목격자로서 겸손함을 수행한 한편 다른 사람들의 보기 방식에 비해 오만하고 지배적인 권력을 차지했다는 점을 분명하게 밝히면서, 그는 목격과 겸손함은 과학 및 지식 프로젝트에서 너무나 중요하여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실천이라고 주장한다.
--- p.183
상황적, 부분적 관점을 통해 얻어지는 강력한 객관성은, 보일의 실험실 및 그 후속 버전을 훨씬 다양하게 ‘고유의 관심사를 가진’ 사람 및 개체의 집합에, 즉 과거는 물론 지금까지도 ‘과학을 수행’하는 데 관련되어 있다고 여겨진 적 없는 무수한 대상에게 개방하고자 하는 기술과학 프로젝트 속에서 사태를 목격할 때 드러나는 이러한 변이된 감각의 겸손함으로부터 구축된다.
--- p.185
그러나 여러분이 관심을 쏟고 있는 일을 하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방법이 없습니다. 직업적으로도 살아남을 수 없거니와, 감정적으로도 살아남을 수 없을 거예요. 그러니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지요. 어떤 식으로든 위험을 피해보려 하는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 p.210~211
저는 자신이 사랑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면 주의를 기울이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원한다면 그것을 방법론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요. 주의를 기울이는 한 가지 방식이기도 하고요. 과거엔 활용하는 법을 몰랐던 주의의 한 가지 특성을 배우게 되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저도 다른 방식으로는 배울 수 없었던 어떤 것을 배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 p.232
제가 진정으로 헌신하고 있는 모종의 관계적 리얼리즘에는 몇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그저 도덕적, 정치적 판단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한다는 측면이 정말로 중요합니다. 세계에 대해 그리고 서로에 대해 실제로 어떤 주장을 하는 일이지요.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고 가장 잘 살고 있는 그 세계에 뿌리를 두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는 관계주의, 우연성, 그리고 상대주의가 주장하는 바와 많은 점을 공유하면서도, 제가 결국은 일종의 불가지론 그리고/또는 회의주의라고 생각하는 상대주의적 결론에 빠지지 않고, 도덕적 상대주의를 거부합니다.
--- p.249
제 접근의 일부는 제 인문학 및 사회과학 친구들에게 무서워 보이는 적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상기시키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엉뚱한 것을 두려워하고 있어요. 사회학자라면 어떤 식으로든 생물학적 환원주의나 그 비슷한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관념은 잘못 진술된 위험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걱정하는 사회학자와 문화연구자들은 진화심리학이나, 무엇이든 흥미로워 보이는 것에 뛰어드는 편이 훨씬 더 효과적일 것입니다.
--- p.262
저는 자녀 양육, 사랑, 정치적 작업, 노동을 포함한 모든 진지한 관계에는 반드시 이렇게 불평등한 기술, 불평등한 권력, 불평등한 모든 것의 문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관계 안에서 문제에 직면하기 위한 언어를 찾아내고자 하는 노력은 이전에는 거기 존재하지 않았던 일종의 번성에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됩니다.
--- p.2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