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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이현상청 사건일지

기이현상청 사건일지

안전가옥 오리지널-18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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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04월 20일
쪽수, 무게, 크기 292쪽 | 330g | 128*200*16mm
ISBN13 9791191193497
ISBN10 11911934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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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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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담당이에요?”
서류 더미를 한 아름 들고 사무실에 빼꼼 고개를 들이민 여자를 보자마자 나는 물었다. 항상 보던 사람을 보게 될 거라고 기대했는데, 아무래도 담당자가 바뀐 모양이었다. 승진했는지, 아니면 일을 그만뒀는지. 정장을 입고 있다기보단 차라리 붙잡혀 있단 표현이 적합할 듯한 여자는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선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네, 처, 처음 뵙겠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 기이현상청 행정3팀 영희예입니다.”
--- p.9 「노을빛」 중에서

[행정 안내] 금일 오전 11시경에 조사 목적 방문 예정입니다. 문화체육관광부 기이현상청.
문자에 적힌 낯선 정부 부처 이름을 보자마자 순식간에 정신이 확 들었다. 공무원이 집에 온다고? 황금 같은 토요일에, 그것도 앞으로 30분 내에? 갑자기 조사는 무슨 조사? 몸을 벌떡 일으켜 허둥지둥 샤워부터 하고, 옷을 갈아입고, 뭐 조사하러 사람 온다니까 아버지 문병은 혼자 다녀오시라고 어머니께 황급히 말씀드리는 데에 걸린 시간이 정확히 28분이었다.
--- p.27 「주문하신 아이스크림 나왔습니다」 중에서

“우리가 좀 인력난이라서. 감이 꽤 좋으신 듯하니까, 한번 고려해 보세요.”
이건 또 갑작스러운 제안이었다. 일단은 웃어넘겼지만, 글쎄, 프로그래밍 공부하다 말고 귀신 잡으러 다니는 것도 나름 흥미진진한 커리어 패스 아닐까 싶었다. 아니면 더위 때문에 또 얼토당토않은 바람이 들었거나. 일단은 차가운 거라도 좀 먹고 진정해야겠다 싶었고, 냉동실에는 마침 사탕초코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사람이 정령들의 유혹에 굴복하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 p.48 「주문하신 아이스크림 나왔습니다」 중에서

당시에 내가 비희와 사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한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사람이 아닌 존재까지 합쳐야 겨우 여섯 명이 되었다. 그중에서 넷은 전 애인이었으며, 둘은 애인 사이까지 발전할 가능성이 제로라는 이유로 내 신뢰를 받는 친구들이었고, 직장 동료는 한 명도 없었다. 비희와 사귀는 동안 나는 연애 사실이 직장에 알려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대화를 얼버무렸고, 휴대전화 화면을 감추었으며, 심리 상담을 앞두고선 예행연습까지 했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기이현상청 소속의 공무원이 사람으로 변신하는 이족보행 파충류와 사귄단 건 그런 일이었다.
--- p.51 「잃어버린 삼각김밥을 찾아서」 중에서

송영은 논산에서 처음으로 만났던 기이현상청 공무원의 말을 떠올렸다. 귀신이 보이는 체질도 아니고, 하다못해 잘 씌는 체질도 아닌데, 딱 목소리 하나에만 영적인 울림이 있다고. 귀신과 요괴와 정령들이, 각종 기이하고 불길한 존재들이 송영의 목소리를 좋아했기 때문에 인생에서 그토록 나쁜 일을 많이 겪어야 했던 것이라고. 구령을 한 번 외칠 때마다 훈련소에 득시글대는 온갖 것들의 눈길을 일시에 받았을 테니 기절을 안 하고 배겼겠느냐고. 그 목소리 자체는 지금도 전혀 변함이 없었다. 어쩌다가 큰 소리라도 잘못 내면 바로 몸이 차갑게 굳어 버리는 것도 그대로였다. 그럼에도 송영이 이번에 기절하지 않고 버틴 것은, 단지 비명을 들어 줄 다른 누군가가 이 어둠 속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 p.113 「마그눔 오푸스」 중에서

“선배, 저 궁금한 게 있는데요. 세종대왕님이 백성을 왜 해쳐요?”
한순간의 여유를 틈타 녹즙을 빨아 먹던 세경이 그 말에 나루를 빤히 쳐다보았다. 비록 표정 변화는 없었지만, 그 눈빛은 명백히 ‘무슨 당연한 소리냐’란 말을 하고 있었다.
“아, 진짜! 옛날에 한국사 공부했다면서, 왜 뭐만 물어보면 반응이 그래요? 제 말은, 다른 혼이야 우리가 많이 다뤄 봤어도 이번엔 세종대왕님이잖아요. 한글 만드신 성군. 그런 분이 왜 저렇게 안개를 치고, 백성을 가둬서 때리고 그러느냔 얘기예요. 설마 맞춤법 안 지켰다고 이러시나?”
--- p.186 「왕과 그들의 나라」 중에서

광화문 광장의 세종대왕상은 여전히 근사한 황금빛이었다. 동상 바로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는 사람의 피켓에 쓰인 말이 순간 이해가 가질 않아 나루의 가슴이 잠깐 철렁했지만, 자세히 보니 애초에 이해가 되는 게 이상한 소리였다. 다행이었다. 사건 이후 나루를 잠시 괴롭힌 후유증 가운데에는 한글이 잘 읽히지 않는 증상도 있었으나, 아무래도 그건 완전히 사라진 모양이었으니까. 지갑 속의 만 원권 지폐가 계속 사라지는 증상도, 세종시에 방문하려 들 때마다 길을 잃는 증상도 진작에 사라진 뒤였다.
--- p.276 「왕과 그들의 나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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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당히 초현실적인 존재들
처음 만났을 당시에 비희의 표면적인 신분은 모 대형식품 제조 업체 직원이었다. 직책은 경기도 광명시 연구개발특구에 위치한 제3광명신제품연구소의 시니어 매니저. 주요 업무는 전 국대형마트와 편의점 매대에놓일 신제품 개발 프로젝트 관리. 하지만 연구소 소재지가 하필 광명 연구개발특구라는 데에서 알 수 있듯이, 제3광명신제품연구소의 진짜 주인은 식품 제조 업체가 아닌 광명회, 즉 일루미나티였다. 파충류 인간들의 범국가적 카르텔로 악명 높은 일루미나티가 직접 운영하는 시설인 만큼, 기이현상청에서는 연구소를 포함한 특구 전체를 1급 지정기이 단체로 분류해 매년 두 차례씩 담당 공무원을 통해 정기 실태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그리고 당시의 담당 공무원이 바로 나였다.

《기이현상청 사건일지》에는 당연하게도 기이가 등장한다. 기이는 귀신, 정령, 흡혈괴물, 괴현상 등 영토, 문화, 시대에 한정되지 않는 영적 존재들이다. 기이는 그 기원과 특성에 따라 이름 붙었고, 종종 불렸으며, 불릴 때마다 믿어질 때마다 실질적인 힘을 행사해왔다. 기이를 다루되, 일지 형식으로 다룬다는 점이 이 소설의 미덕이다. 기이에게도 기이와 함께하는 이들에게도 하루가 있고, 이 하루는 반복되며, 생활이 되고 환경을 이룬다. 그 과정에서 그들의 그날그날은 기록된다. 기이해서, 기이라서, 대단하고 특수해서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이들의 일상과 생활이므로 성실하게 관찰되고 정리된다.
비인간 존재에 관한 집요한 기록만큼 인간 존재의 정체성을 설명해주는 텍스트도 없을 것이다. 《기이현상청 사건일지》는 하나의 시스템을 채우는 다채로운 역할들을 서술해 나간다. 〈노을빛〉에는 특수예산과에서 예산을 편성하고 지난 지출을 점검하는 기재부 직원이 있고, 〈주문하신 아이스크림 나왔습니다〉에는 아케메네스 왕조 시기 항아리에 살며 아이스크림 신제품을 개발하는 두 정령을 이해하기 위해 파견 나온 기이현상청 직원 및 생성적 적대 신경망 원리를 배우고 적용하는 개발자가 출연한다. 〈잃어버린 삼각김밥을 찾아서〉에는 광명 연구개발특구에서 시제품을 만들고 이를 유출한 직원과 그 해프닝을 해결하는 수사관이, 〈마그눔 오푸스〉에는 지역 신흥 종교의 교주와 신도, 이를 해결하러 온 하청 업체 직원과 그 부사수가 등장한다. 이들은 정령과 귀신을, 그러니까 사건을 기록하는 존재들이지만, 《기이현상청 사건일지》 역시 기록이라는 점에서 작품의 주인공은 현상청을 이루는 낱낱의 존재들로 옮겨간다.

| 상당히 현실적인 문제들
《기이현상청 사건일지》는 결국 공무일지다. 그것도 철저히 2000년대 이후 대한민국의 실정에 바탕을 둔. 그러므로 노을을 아름답게 할지는 모르나 치명적인 환경문제인 미세먼지, 공과 관에 스며든 사이비 신앙, 권력자 우상화, 신도시 개발을 둘러싼 이권 대립, 공조직의 목적전도, 국가 인프라의 수도권 집중화, 합의에 이르지 않는 시위, 내정된 지원사업 수혜 등 상당히 복잡한 동시대 문제들이 한데 논의된다. 공조직에는 시스템이 있고, 시스템은 시스템이 되었으므로 굳어져 간다. 그럼에도 여기 일하는 공무원들의 개인성과 도덕의식 덕분에 이 조직은 아직은 어떻게 해볼 만한 이끼들을 달고 굴러간다.

세종대왕에 대한 국민적 인식이 신적 기이를 만들어 낼 정도였든 어쨌든, 더는 대한민국에서 그 때문에 무슨 중대한 기이 현상이 발생할 여지는 없다고 봐도 무방했으니까. 나루의 마지막 일격으로 말미암아 세종의 혼은 힘 대부분을 상실했고,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사후처리반의 작업에 의해 지금은 작은 스테인리스제 신주에 봉인되어 기이현상청 순응실에 잘 모셔진 상태였다. (……) 이번만큼은 혼을 봉인하는 대신 잘 보내 드리자는 의견도 꽤 지지를 받았지만 결과적으로 실행되지는 못했다. 듣기로는 ‘아무리 영혼에 새로운 정보를 가르치는 일이 어렵다 한들, 혹시 세종이라면 10년 내로 순응을 마쳐 협조적으로 변하지 않을까’라는 윗선의 기대가 작용했다는 모양이었다. 글쎄, 잘되면 좋으련만.

조선의 가장 큰 성군 세종대왕을 길 잃은 정령으로 묘사하는 〈왕과 그들의 나라〉는 이 소설집 중에서도 단연 눈에 띈다. 칼 포퍼는 반증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반증될 수 있는 것이 바로 과학의 본령이라 말한 바 있다. 비판할 수 있는 왕, 권력을 잃을 수 있는 왕일 때, 비로소 지도자일 수 있다고 이 소설은 과감하게 이야기하는 것 같다. ‘절대’와 ‘결코’의 굳고 고이는 세계에서 ‘설마’와 ‘혹시’의 굴러가는 세계로 《기이현상청 사건일지》는 독자를 안내한다. 그곳은 비관도 낙관도 아닌, 기이와 환상이 거하는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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