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인권선언 제24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사람은 합리적으로 노동시간을 제한하고, 유급 정기휴가를 포함한 휴식과 여가의 권리를 갖는다.” 그런데, 무엇이 ‘합리적’이고 어느 정도의 ‘휴식과 여가’여야 충분한 걸까? 이 책에서 우리는 그 답이 ‘주4일 노동’이라고 주장하려 한다. 우리가 돈을 위해 일하는 데는 지금보다 시간을 덜 쓰고, 대신 우리 자신을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많은 시간을 쓸 수 있을 때 세상은 더 나은 곳이 될 테고 우리의 삶도 훨씬 나아질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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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여러분은 아래와 같이 답할지 모르겠다.
“제발 그렇게 좀 해주세요. 주5일 동안 일하느라 완전히 너덜너덜해졌다고요.”
“일하는 날이 아예 없는 것보다야, 4일 정도면 훨씬 낫죠.”
“사양할래요, 생활비를 벌려면 더 ‘적게’가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이’ 일해야 한다고요.”
“급여를 줄이지만 않는다면 더 많이 놀고 싶기는 하죠. 더 나은 삶을 위해서는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니까요.”
“사장이 좋아할까요? 결국 5일 동안 해야 할 일을 4일 만에 압축해서 해야 하느라 저만 더 힘들어질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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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이 돈을 위해 일하는 시간은 적을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2019년 발표된 영국의 한 조사에 따르면 노동자의 70%는 주4일 노동이 도입되면 자신들의 정신건강이 나아질 것이라고 대답했다. 또 기업의 64%도 주4일 노동 도입을 지지했다. 실수입이 줄어들지 않는다면 직원들은 당연히 더 열정적으로 일할 것이다. 그런데 TUC(노동조합회의. Trades Union Congress)에 따르면 영국에서 3백만 명 이상의 사람들은 급여가 줄어들더라도 더 적은 시간 일하는 것을 선호하고 천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더 적은 시간 일하기를 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람들이 일하기를 싫어해서 그런 게 아니다. 오히려 괜찮은 직업을 갖는 것은 삶의 질이나 행복과 직결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신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이 더 많아지기를 원한다. 돈을 더 벌기 위한 게 아니라면 직장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지나온 삶을 후회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들 중 ‘더 많은 시간을 사무실에서 보냈더라면 좋았을 텐데’라고 말할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럼에도 우리에겐 ‘장시간 중노동’에 대한 일종의 집단적 중독 현상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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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논리라면, ‘비생산적인’ 사람은 가치가 없다는 말이 된다. 겨에서 밀을 골라내듯, 열심히 일하는 ‘노력파’는, 게으른 ‘놀자파’에서 분리되고, 전자는 그만큼 보상받고, 후자는 그만큼 처벌받는다. 점점 더 인색해지는 ‘사회 보호’ 시스템에 의해서 말이다. 이제는 노동시간 단축이라는 흐름을 되돌리고 싶어 안달이 난 정치인과 재계 인사들이 많아졌다. 그들은 에너지 드링크와 심야 체육관, 거침없는 생산성 향상을 위해 ‘늘 켜져 있는 always on’ 문화를 전파하는 자기계발서와 함께 수면 부족을 자랑처럼 떠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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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등한 기회를 위한 수십 년간의 캠페인과 상당한 양의 입법 활동에도 불구하고 젠더 불평등이 고집스럽게 지속되고 있는 것은 현재의 노동시간 구조와 관련 있다. 1960년대 이후 점점 더 많은 여성이 유급 노동시장에 진출했지만, 그녀들은 동시에 전통적으로 자신들이 책임져온 돌봄 노동도 이전 수준과 똑같이 떠맡아야 했다. 많은 여성이 저임금, 낮은 지위, 불안정한 일에 종사하게 됐는데 아이들이나 노인 친척을 보살피기 위해 몇 년 동안 일을 포기하거나 아르바이트, 혹은 더 짧은 시간의 일자리에 만족해야 했기 때문이다. 2019년, 영국의 일하는 여성 중 41%가 비정규직(아르바이트나 파트타임)이었는데 상대적으로 남성의 경우는 13%였다.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모든 자격 수준에서 정규직보다 시간당 급여가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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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인 의제를 구축하고 실현하려면 사회의 모든 수준에서 강력한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유급 노동시간이 줄어들면 사람들에게 공동체 기반 활동에 참여하거나 지역 그룹에 가입하고, 지역과 국가의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시간이 확보될 수 있다. 민주주의에도 시간이 걸린다. 우선 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치려면 동네 도서관에 가거나 다른 사람들과 해당 이슈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등 그에 관한 정보를 얻고 또 숙고해야 한다. 그리고 캠페인에 참여하고, 주민청원에 서명하고, 국회의원과 시의원에게 로비하고, 노조에 가입해 활동하고, 지역 자원봉사활동을 조직하거나 참여하고, 시위에 나서는 등 모든 일에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니 장시간 노동으로 시간에 여유가 없는 사람이라면 이런 일들을 그만두거나 다른 사람에게 맡겨버릴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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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없음(혹은 바쁨)’은 소비를 촉진하는 또 하나의 요인이다. 매주 일하는 시간이 늘어나고 더 많이 바빠질수록, 우리는 삶을 지탱하기 위해 더 많은 ‘간편’ 제품들을 찾게 된다. 우리는 더 많은 포장 식품과 즉석 가공식품을 사고, 일하는 시간을 줄여줄 더 많은 도구를 구입하고, 이동 시간을 아끼기 위해 자동차나 비행기로 이동하며, 작동하지 않는 물건들은 즉각 버리거나 교체한다. 소득 수준 전반에 걸쳐 모든 사람에게 가용 시간이 불편할 정도로 부족할 수 있지만, 고소득자일수록 일상 전반에서 더 빨리, 더 많은 ‘고속 추월’ 활동을 할 가능성이 크고 이런 활동은 사람들이 유급 노동을 하지 않고 더 많은 시간을 갖게 되는 보다 지속가능한 삶의 리듬에 기초한 대안들과 비교해볼 때 일반적으로 플라스틱이나 다른 재활용 불가능 재료들을 포함한 탄소 및 자원 집약적인 제품들을 더 많이 사용하게 만들고 따라서 더 많은 오염을 일으킨다.
--- p.33
우리가 지켜봐 온 것처럼, 산업화된 국가들의 주당 노동시간은 지난 150년 동안 거의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주목할 만한 변화들에도 불구하고, 이 노동시간 단축의 흐름은 1980년대까지 계속되다가 멈췄다.
--- p.47
미국의 다양한 연구들은, ‘지난 40년에 걸쳐 더 부유해졌지만, 주관적 행복은 조금도 증가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면서, 오늘날 젊은 미국인들이 상당한 부유함 속에서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조부모보다 행복감은 약간 더 적고 우울증과 다양한 사회병리학적 위험은 훨씬 더 많이 가지고 있음을 알려준다.
--- p.53
이 책을 쓰는 동안, 우리는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야기된 전례 없는 사회적, 경제적 규범의 붕괴를 경험했다. 몇 달 사이 더 짧고 유연한 유급 노동시간에 대한 우리의 아이디어는 새로운 의미와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 갑자기 주5일 내내 출근하는 일이 상식이 아니라 예외적인 일이 되어버렸다. 급여를 받고 안 받고를 떠나 재택근무를 하거나 아예 일하지 않는 것이 더 상식적인 일이 되었다. 의료종사자나 식료품 가게 등에서 일하는 ‘핵심노동자’들은 계속 출근해야 하는 동안, 다른 많은 사람은 가족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데 익숙해졌다. 아이들과 운동하러 나가는 아빠들의 모습은 익숙한 풍경이 됐고 어떤 이들은 새로운 방식을 즐겼지만 또 어떤 이들은 더는 참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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