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즈〉는 아홉 자매 여신의 총칭이다.
---「첫 문장」중에서
뮤지엄은 내가 찾아가야만 내게 다가온다. 앎이란 지혜, 지식, 정보 등을 포함해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지적 형태를 아우르는 우리말이다. 알고 싶어서 박물관에 간다. 그래서 뮤지엄은 앎의 잠재태(潛在態)인 것이다.
--- p.11
건축은 스스로 서 있을 수 있어야 함은 말할 필요가 없고, 그 건축에 실리는 여러 하중을 감당할 수 있는 구조적 강성을 기반으로 성립한다. 또한 건축의 외피는 눈과 비와 바람과 햇볕에도 뒤틀리지 않고 갈라지지 않는 내구성이 깃들어 있어야 한다. 이러한 강고함이 건축 존재 형식의 근본적인 뼈대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인류 건축 문명의 발전은 이 강성함을 인간의 편으로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는 방식의 발전사라 할 수 있다.
--- pp.23~24
조선백자의 명맥이 끊어지고 꼬박 한 세기가 넘은 지금 백자 굽던 가마터가 발굴되고 은은한 색감의 사금파리들이 지천으로 드러난 곳 위에, 철화의 흑갈색을 미메시스한 작은 자료관이 세워진 것은 작은 위안이라 하겠다. 분원백자자료관은 우리 문화에 대한 애정의 산물이다.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
--- p.37
뮤지엄 산에서도 안도 다다오의 건축적 인장은 여기저기서 쉽게 확인된다. 사각, 삼각, 원형으로 엮여 있는 본관의 형태, 그 형태를 반사하는 연출된 수변 공간, 단순하지만 섬세한 디테일, 그리고 건축물 내부를 반반하게 포장하고 있는 노출 콘크리트 등이 그러하다. 한 가지 이채로운 점이라면 본관 외부 마감으로 석재가 쓰인 것인데, 뮤지엄이 놓인 강원도 산중이란 부지의 특성에 부합하고자 했던 건축가의 재료 선정이리라.
--- pp.44~45
우리는 식민 강점과 민족 동란으로 잃은 것이 너무 많은데, 속도전을 중요시하는 오늘날 그나마 한 줌 남아 있는 유산들도 거덜 나고 있다. 박노수미술관이 남아 있어, 혼종이든 혼성이든 잡종이든 생각할 여지를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은 다행이다. 박노수미술관에 가서 섞여 있는 것들을 살펴보자. 그리고 그것들을 지금 여기에서 어떤 가치로 살릴 수 있는지 또한 생각해 보면 좋겠다.
--- p.81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곳을 보는 수고로움이다. 건축가 없는 건축의 지혜와, 형태와 목적 사이의 강한 결합과, 비판적인 시선으로 지역과 토속과 풍토의 가치를 다시 소환해야 하지 않을까. 이러한 소환이 겉은 말끔하지만 속은 하향 평준화된 건축, 그리고 환경을 쥐어짜 불모로 만들어 버리는 건축에 대한 하나의 의미 있는 대안으로 우리를 이끌 것이다.
--- p.110
건축가라는 문화적·사회적 권위에 기대어 있는 우리의 건축은, 과연 그 전문가적 권위에 부끄럽지 않은 수준이라 말할 수 있는가? 건축 설계를 밥벌이로 하는 나는 대답하기가 마땅치 않다. 자의식 과잉의 일그러진 건축들이, 자본과 관성에 견인되는 영혼 없는 건축들이 여기저기 너저분하게 널려 있다. 건축가 없는 건축, 건축가란 전문가의 오만이 없는 그런 건축에서 오히려 더 큰 감동과 더 큰 아름다움을 발견하곤 한다.
--- p.200
그러나 미당시문학관에 미당의 친일이 기록되어야 함은 마땅하다.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라는 주옥같은 명문과 더불어 종천 순일했다는 파렴치한 변명 또한 우리는 알아야 한다. 부정으로부터 불화는 시작된다. 치욕을 딛고 일어설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의 오늘은 위로받을 것이고 온전한 내일이 시작될 것이다.
--- p.281
시적 울림이 있는 공간은 우리의 정신을 고양할 수 있음이 분명하다. 건축을 전공한 나는 그렇게 믿는다. 아름다운 공간에서 우리의 정신은 맑게 깨어나고 화사하게 만개한다. 그렇지만 공간의 울림에 앞서는 것은, 그 공간이 무엇을 위해 만들어졌는가? 혹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하는 물음이라고 나는 늘 생각했다.
--- p.296
한 뼘 스마트폰이 시공간을 압축해서 우리 눈앞에 펼쳐 보이는 세상은 실로 놀랍다. 그러나 발로 걷고 손을 놀리며, 냄새 맡고 귀로 들으며 눈으로 보는 오감의 존재인 우리에게 직접 관람과 직접 체험은 스마트폰의 작은 액정 속 세계와 질적으로 다른 차원임이 분명하다. 우리 모두 직접 뮤지엄으로 갔으면 좋겠다. 가는 길을 즐기고 보는 일을 즐기면서, 내가 있는 곳과 내가 비롯된 곳과 내가 깃들 곳을 생각해 보기를, 이 글을 읽는 여러분과 함께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 p.297
죽음의 집에서 인간의 집으로의 귀환
세상에 완전한 소멸은 없는 법, 박물관은 진열된 제물과도 같은 죽음을 감상하는 곳이다. 박물관은 죽은 것들의 잔해 혹은 영정을 모아 놓아, 다시 생명을 부여하는 곳처럼 보일 때가 있다. 아주 오래된 박물관에 가면, 기억과 아름다움의 기원은 저 아래로 쏟아져 내리는 심연과도 같은 죽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박물관에 들어서는 것은 일상의 삶을 버리는 일, 죽음으로 들어서는 일이다. 그 공허의 터널을 지나 나오게 되면, 아니 죽음이라는, 삶의 부재라는 위험을 감수하고 나오게 되면, 박물관은 새로운 삶을 선택하게 되는 공간이 된다. (중략) 저자는 건축으로 밥벌이하고, 건축과 관련된 글을 쓰는 작가다. 그는 이미 건축에 관한 몇 권의 책을 출간했다. 저자를 가까이하고, 더러 만나 밥과 술, 그리고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인데, 언제 전국의 박물관을 돌아다녔으며, 이런 글을 남겼는지 자못 궁금하다. 이 글을 쓰는 동안 그는 이웃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건축 설계하는 일로 바쁘다고 하면서 그는 혼자 다녔다. 이 책은 그가 방문했던 우리나라 박물관들을 다섯 개의 장으로 분류한 내용을 담고 있다. 박물관은 도시 복판에서부터 산기슭, 산자락, 산비탈을 거쳐 넓은 산중에 이르기까지 흩어져 있다. 그것을 다섯 개의 주제로 나누어 글을 썼다. 저자는 잘 알려진 박물관을 서술하기도 하고, 많은 이가 알지 못하는 박물관을 찾아가서 주소지처럼 박물관의 분명한 내용을 샅샅이 보고 글로 옮겨 담기도 했다. 저자처럼, 우리는 뮤즈보다 먼저 박물관을 찾을 수 없다. 박물관을 찾는 이는 늦게 가서 모든 것을 읽어 내는 존재일 터이다. 박물관을 찾는 행위의 핵심은 최후의 인간이 되는 데 있다.
---「추천의 말」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