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22년 09월 27일 |
---|---|
판형 |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 704쪽 | 808g | 128*188*40mm |
ISBN13 | 9791138413251 |
ISBN10 | 1138413259 |
발행일 | 2022년 09월 2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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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형 |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 704쪽 | 808g | 128*188*40mm |
ISBN13 | 9791138413251 |
ISBN10 | 1138413259 |
MD 한마디
[게이고답지만 게이고답지 않은 소설] 2001년에 발표된 게 믿기지 않는 게이고의 장편 소설. 어느 날 나타난 친구의 ‘여성이지만 남성의 마음을 가졌다’는 고백. 거기다 살인까지. 충격적인 이야기의 뒤엔 젠더, 사회의 정상성, 결혼 등에 대한 질문이 숨겨졌다. 그답게 세심한 미스터리 흐름을 좇게 만드는 소설. - 소설 PD 이나영
제1장 제2장 제3장 제4장 제5장 제6장 제7장 제8장 제9장 옮긴이의 말 |
'히가시노 게이고'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이유는 그는 대다한 이야기꾼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단 한번도 실망시켜 준 적이 없기에 그의 이름으로 나온 책은 말그대로 설레인다. 그래서 어떤 내용인지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는 나에게는 상관이 없다. 그냥 '히가시노 게이고' 면 충분하다. 그래서 이번 책도 그의 이름만 보고 구매를 결정했고 역시나 나의 선택에 후회는 없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외사랑]은 이미 일본에서 2004년도에 출간한 책이다. 지금까지 110만부나 팔리면서 대단한 인기를 얻었고 드라마로 제작되는 등. 일본에서도 이미 성공한 작품이다. 이번에 양장본으로 한국에 출간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바로 구매를 했다. 페이지가 704쪽이나 되는 만큼 방대한 분량임에도 책장이 넘어가는것이 아쉬울만큼 엄청난 흡입력으로 나를 책 속으로 끌려들어가게 만들었다.
물론, 읽는것이 100% 만족스러웠던 것은 아니다. 주요 등장인물만 6~7명은 되는데 일본에서는 이름과 성을 따로 불리는 경우가 많아서 가끔 등장인물들이 헷갈릴 때가 있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이사람인가? 헷갈려서 초반에는 읽었던 부분을 다시 돌아가 이름을 확인하곤 했다. 그런 것도 점차 익숙해지면서 막힘없이 읽게 되었지만 말이다.
[외사랑]의 주요 소재는 두가지. '럭비'와 '젠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두가지의 소재를 히가시노 게이고는 마치 하나였던 것 처럼 이야기를 끌고 나가고 있다. 특히, '동성애(성정체성)'라는 파격적인 소재를 지금도 아닌 2004년에서 주제로 삼을 수 있었다는 것은 그가 시대에 비해 얼마나 앞선 생각을 가지고 있는 작가인지를 다시금 확인시켜주는 것 같았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이 뫼비우스 띠 위에 있어요.
완전한 남자도, 완전한 여자도 없어요
책 속의 이 대사는, [외사랑]을 관통하는 대사라고 할 수 있다. 대학교 럭비부 매니저였던 '미쓰키'는 여자였다. 분명 여자여야만 했다. 그런데 어느날 나타난 그녀는 중저음의 남자목소리에 얼굴에는 수염까지난 남자였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나는 분명히 '동성애(성정체성)'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하다. 그리고 그런 현상을 인정은 하지만 이해할 필요가 있을까?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책을 통해서 그 경계선이 조금은 흐려졌다고 느껴졌다. 정말로 어디까지가 남자이고 여자의 경계선일까? 이는 단순하게 물리적인, 생물학전인 것 말고는 그것은 구분하는 경계선이 있기는 한 것일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앞서 언급된 '뫼비우스의 띠' 처럼, 우리의 마음이라는것이 어느 한 순간에 서 있는 그 위치에 따라 남자와 여자로 구분되는게 아닐까? 그런데 뫼비우스의 띠는 무한으로 연결된 고리이니까 남자였던 마음이 어느 순간에는 여자도 되고 그런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의문의 여자, 아니 남자, 아니 어쩌면 이도 저도 아닐 수 있는 '미쓰키'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사건의 실체에 대가가는 그(그녀)의 대학교 럭비부 동창생들. 과연, 이 이야기의 끝에는 어떤 진실이 기다리고 있을까?
책을 다 읽고 나니 이 책이 드라마로 어떻게 만들어졌을지 무척 궁금했다. 분명히 재미있을 것 같은데 넷플릭스 같은 곳에서 보여주면 좋겠다. 아니면 어떠한 경로라도 볼 수 있는 곳이 있다면 꼭 보고 싶다. 역시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번에도 실망시키지 않고 너무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가지고 오면서 더 나아가 '성'이라는 것을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주었다. 히가시고 게이고는 이제 다른 수식어가 필요없는 완벽한 작가로 만들어지는 것 같다. 꼭! 읽어보기를 강추한다.
여러가지 소재를 다양하게 사용해서 독자들에게 읽는 재미의 참 맛을 알려주는 작가가 바로 히가시노 게이고가 아닐까. 자신이 좋아하는 스포츠 분야를 활용하기도 하고 학교 폭력이나 또는 로맨스까지도 모든 것에 미스터리를 더해 자신만의 확고한 장르를 만들어 낸다. 얼마 전 읽었던 이케이도 준의 [노사이드 게임]은 대기업 럭비팀의 이야기였는데 [외사랑]에서는 대학 미식축구팀이 그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런 것만 봐도 일본의 스포츠 세계는 우리보다 조금은 더 넓음을 알 수 있다. 올림픽에서도 다양한 종목에서 메달을 따는 이유가 이런 뒷받침이 되어 주는 것 때문이 아닐까. 우리나라에서도 인기 종목만 집중육성하는 것이 아닌 다양한 종목의 여러 선수들이 운동에만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이 되면 좋을 것 같다.
매년 날을 정해놓고 만나는 데이토대학 미식축구부 선수들. 그들은 모일 때마다 자신들의 마지막 경기를 되새긴다. 그런 날이었다.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스가이와 데쓰로는 귀갓길에 미쓰키를 만난다. 함께 활동했던 그녀였기에 모임에 나오지 않은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무언가 숨기는 듯한 그녀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간 후 터진 그녀의 고백은 더 큰 폭탄이었다.
미쓰키는 말이야, 내게는 친구야. 남자냐 여자냐는 상관없어.
친구니까 어떤 위험이 닥치더라도 무슨 짓을 해서든 지켜주고 싶어.
일반적인 논리나 규칙 따위 난 몰라. 만약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친구가 된 의미는 없어.
아니, 애초에 그건 친구가 아니야.
85p
데쓰로는 미식축구부의 매니저였던 리사코와 결혼했다. 리사코와 미쓰키는 당연히 친한 친구였다. 자신이 사람을 죽였다고 고백한 친구에게 당신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범인인 친구를 숨겨 줄 것인가 아니면 자수하라고 권유를 할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범인이 여기있다고 신고를 할 것인가. 오랜만에 보는 친구가 분명 예전에는 여자였는데 남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면 당신은 그 친구에게 무어라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친구라는 존재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인정해줄 수 있는 것일까. 남사친이나 여사친이라는 말이 생겨난 지도 오래되었다. 사귀는 사이가 아닌친구지만 단지 성만 다른 그런 사이다. 그런 존재를 어디까지 인정해 줄 수 있느냐는 것도 상당히 많이 왈가왈부되었던 주제 중에 하나다. 대체 사람의 성이라는 것이 무엇이길래.
"나는 남녀를 차별하지 않아."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할 뿐이지. 그게 바로 남녀는 서로 다르다고 생각한다는 증거야. 똑같이 생각하면 애당초 차별이라는 단어 자체가 머리에 떠오르지 않지."
"그렇게 말해도 현실적으로 차이가 있잖아. 그 차이에 따라 행동하는 게 그렇게 나빠?"
443p
미국에서는 백인과 흑인을 차별했었다. 노예해방이 되고 나서 차별금지법이 생겼지만 요즘 시대에도 흑인들에게는 더 강압적으로 수사를 하거나 발포를 하는 등 차별은 여전히 남아 있다고 볼 수 있다. 서양에서는 동양 사람들을 차별했었다. 비하하는 말을 하는가 하면 무차별폭력도 행해졌었다. 코로나 이후 바이러스가 중국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증명되고 난 이후 한동안은 그런 차별이 더 심하게 이루어졌다.
기본적으로 사람은 남자와 여자 둘로 나뉜다. 제3의 성이라는 것이 등장하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런 기준은 무의미하다 생각한다. 어찌했건 남자 아니면 여자가 아닌가. 자신이 태어난 성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주의다. 굳이 왜 다르게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 일수도있다. 미쓰키는 자신이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았음에도 자신이 여자임을 인정하지 못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자신은 꼭 남자가 되어야만 한다고 했다. 성차별 때문에 세상에서 자신이 하고싶은 일을 하지 못한다면 억울하기는 할 것이다. 예전에는 그랬을 수도 있다.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여성들은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많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요즘은 어떤가. 성차별금지법도 생겼고 자신이 노력만 한다면 어느정도는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면서 살지 않는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이 남자가 아니어서 또는 여자가 아니어서라고 하다면 그것은 하나의 핑계가 되지 않을까. 군인을 비롯한 대부분의 곳에서 남녀가 평등하게 때로는 여자가 더 우월하게 일을 하는 것을 본다면 말이다. 물론 신체적으로 남자와 여자는 많은 차이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올림픽을 비롯한 스퐃츠 경기에서 남자부와 여자부를 나누어서 진행을 하고 있다. 기형으로 인해서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게 태어난 존재들은 가끔 있다. 이야기 속에서 나온 무쓰미가 그런 경우다. 그런 존재들은 대다수가 아닌 몇몇 일부인 경우일 뿐이다. 때문에 새로운 법을 만들어 낼 수는 없는 것이 아닐까.
젠더이슈에다가 차별 문제까지 더해서 기반으로 쌓고 하나의 살인사건을 그 위헤 착실하게 얹은 이 이야기는 여타 다른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지극히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만든다.
마지막으로 궁금한 것 하나. 처음에 미쓰키는 화장이 엉망인 상태로 등장한다. 데쓰로는 그것을 나중에야 파악하는데 파운데이션도 뭉쳐있고 화장품을 닥치는 대로 칠한 듯 하다고 표현하는데 그것은 미쓰키가 남자로 살아가면서 화장을 하는 법을 잊어버린 것을 의미하는 걸까 아니면 남자로 살아가기 때문에 화장을 안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걸까. 아무리 안 했다고 하더라도 친구들을 만나러 여장을 하고 왔다면 아니 여자의 모습으로 왔다면 화장을 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덕지덕지 바른 것이 더 이상하지 않은가? 차라리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립스틱만 발랐다고 하는 것이 더 나으려나. 미쓰키는 남자로 살아온 시간보다 여자로 살아온 시간이 더 길고 대학을 나와서 사회생활까지 했던 여자다. 그런 여자가 화장 하는 법을 모를 리는 없고 그래서인지 이 부분이 왠지 모르게 어색하게 느껴졌다. 누군가 나와 같은 생각을 했따면 그 의미를 파악하고 싶을 만큼 궁금했던 부분이다.
《외사랑》은 히가시노 게이고가 1999년, 2000년 사이에 발표한 소설이다. 제목을 보면 지고한 사랑 얘기 같지만 실은 심각하고 사회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
매년 11월 세 번째 금요일 저녁마다 테이토대학 옛 미식축구부원들이 모여 시끌벅적한 자리를 갖는다. 졸업한 지 10여 년이 지나 30대가 사회에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그들은 만날 때마다 그들의 마지막 경기, 리그 결승전 이야기를 한다. 역전의 찬스를 살리지 못하고 결국은 패하고 말았던 경기였다. 그렇게 왁자지껄하고, 추억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모임을 파하고 돌아오는 길에 쿼터백(QB)이었던 니시와키 데쓰로 앞에 몇 년간 모임에 나오지 않던 히우라 미쓰키가 나타난다. 그녀는 미식축구부의 매니저 역할을 하던 ‘여’학생이었다. 그녀는 옛 친구들에게 오래전부터 간직해오던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고, 아울러 살인을 저질렀음을 고백한다.
그녀의 고백은 커다란 충격이었지만, 외견상 간단해 보이던 살인 사건은 매우 복잡한 배경을 품고 있다는 것이 점점 드러난다. 그 와중에 예전 미식축구팀의 일원으로서 한 가지 목표만을 가지고 뭉쳤던 친구들이 자신의 처지 때문에 조금씩 분화해나가는 모습을 보인다.
히가시노 게이고 소설이 대부분 그렇지만, 이 추리소설도 단순히 범행의 트릭을 풀어가는 쾌감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물론 이 소설도 살인 사건 뒤에 숨겨진 여러 미스터리가 서서히 풀려가는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풀어나가는 것은 놀라운 추리 능력을 가진 형사나 탐정이 아니다. 의지를 가지고, 오로지 우정에 기초해 끈질기게 사건의 본질에 다가가는, 평범한 이를 통해 미스터리가 풀려간다. 미숙한 남녀 관계에 괴로워하고, 자신의 직업에 고민하면서, 사건을 풀어가는 과정에서도 실수와 잘못된 추리에 빠지기도 한다. 사건이 이러저런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이것은 어떤 트릭으로 가려졌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과정 속에서 어떤 메시지를 남길 것인가를 고민하는 소설인 셈이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이 소설에서 남기고자 하는 메시지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남과 여’라는 구분에 관한 것이다. 여전이 이 문제는 우리나라에서도 첨예한 문제이고, 전적인 이해를 받고 있지 못한 문제다. 그런데 이런 문제를 히가시오 게이고는 지금으로부터 20년도 더 전에 고민하고, 깊게 다루었다.
나는 100% 남자, 100% 여자는 없다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생물학적 남녀는 성염색체의 구성(XY 또는 XX)으로 결정되지만, 그것은 너무 도식적이고, 편의적인 것이다. 남성성, 여성성이라는 게 과연 있다고 했을 때, 그 성질이 성염색체에만 존재한다고 볼 수 없다. XY라는 염색체를 가진 이에게도 여성성이 있을 수 있으며, XX라는 염색체를 가진 이에게도 남성성이 있을 수 있다. 우리는 남과 여의 구분에 염색체만을 이용하는 것은 남과 여의 본질에 대해서 아직도 잘 모르기 때문일 수 있다. 이런 나의 이해 역시 남과 여의 문제에 아주 피상적인 부분에 그친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데, 위의 내 설명이 이 소설에서 제기하고 있는 문제의 아주 일부만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만 봐도 그렇다.
소설 속 인물의 말을 통해 히가시노 게이고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나는 성정체성장애라는 병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치료해야 하는 건 소수를 배제하려는 사회죠. ... 아무리 성정체성장애라는 단어가 부각되어도 변하는 것은 없어요.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는 우리 마음은 전해지지 않을 거예요. 짝사랑은 앞으로도 계속되겠죠.” (423쪽)
얼마 전의 교육과정 개정 공청회에서 벌어진 사태를 뉴스로 본 이후에 읽은 소설이라 더 끝맛이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