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아름다움에 둘러싸여 나는 다양한 경험을 했다. 그 경험들을 통해 여러 생각을 했지만 결국 내가 원한 것은 하나였다. 진정한 나로 살아가는 기쁨. 그것을 위해서는 나의 내면으로 깊숙이 들어가서 평소라면 들여다보지 않을 자잘한 것들까지도 모두 살펴봐야 했다. 나는 이러한 과정을 ‘파리의 감각’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 ‘파리의 감각’은 내가 머물렀던 짧은 기간 동안 전부 해소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자리에서 즉각적으로 얻을 수 있는 대답도 있었고, 또 그렇지 못한 대답도 있었다. 후자의 이유 때문에 이 글을 쓰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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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고독이란 어딘가 모르게 외롭고 쓸쓸한 뉘앙스를 풍기고 있지만, 내가 말하는 고독은 아멜리에의 삶처럼 매우 즐겁고 사랑스러운 솔리튜드(Solitude, 특히 즐거운 고독)다. 누군가와 함께 있어야 행복한 사람도 있지만 혼자 있을 때 행복한 사람도 있다. 아멜리에와 내가 그런 사람이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당신도 고독, 사색, 침잠, 민감, 몽상과 같은 단어에 끌린다면 나와 같이 ‘아멜리에 감성’을 갖고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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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누보 양식의 조명이 매달린 다리 위를 걸으며 생각했다. 비 오는 파리와 맑은 날씨의 파리는, 아무래도 전혀 다른 성질을 지닌 것 같다고. 마치 두 개의 자아를 지닌 것처럼 날씨에 따라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를 번갈아 가며 모습을 바꾸는 매혹적인 도시. 때로는 고상하면서 세련되고, 부드럽고 유연하며, 때로는 쌀쌀맞으면서 고독하다. 어떤 이들은 파리라는 도시를 사랑에 비유하기도 하지만, 또 어떤 이들은 쓸쓸한 영혼에 비유하기도 한다. 나는 이 두 세계를 모두 경험했지만, 내 마음이 더 끌리는 곳은 쓸쓸한 영혼을 위한 도시 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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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는 나에게 별세계였다. 내가 지금 머물러 있는 이곳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 내 기억 속 파리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시 같고, 노래 같고, 영화 같고, 그림 같아서 나의 감성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는 곳이었다. 평소라면 침울하다고 마다했을 비 내리는 날도 파리에서라면 아름답게 느껴졌고, 평소라면 무심히 지나쳤을 거리를 천천히 음미하듯 걸었고, 평소라면 반응하지 않았을 무딘 감각이 파리에서라면 섬세하게 발휘되곤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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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느물거리지 않는, 미소년의 순수한 미소로 내게 말했다. 이름은 도미니크이며 파리에서 태어나고 자라 현재는 공무원 생활을 하고 있고, 때때로 밤에 글을 쓰며 작가로서의 삶도 함께 살아가고 있다고. 그리고 조만간 그의 소설이 세상에 나올 거라고 말했다. 그런데 나는 다른 것보다 공직에 몸담으며, 글을 쓰는 이 파리 남자가 어떻게 일본어를 구사할 수 있는지가 궁금했다. “그런데 어쩜 그렇게 일본어를 잘 하세요? 솔직히 좀 놀랐어요. 이렇게 대화가 이어지리라곤 생각 못 했거든요. 제 영어 실력이 많이 부족해서 소통이 안 될 줄 알았어요.” “제가 예전에 일본에서 유학을 한 적이 있거든요.” “일본 어디에 계셨어요?” “도쿄요.” 조금은 투박한 일본어였지만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기에는 전혀 부족함이 없는 실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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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이성만으로 습득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이성으로 어휘와 문법을 배운다면, 감성으로는 리듬과 높낮이 같은 언어의 느낌과 분위기를 익혀 나간다. 언어의 감각이란 이런 게 아닐까. 기억 속 어딘가에 묻혀 있던 노래가 어느 날 갑자기 무심코 튀어나오는 것처럼, 마음과 몸으로 체득한 언어의 감각은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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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마레 지구에는 ‘카페 데 파르(Cafe des Phares)’라는 철학 카페가 있다. 이 카페에 모인 사람들은 틀림(Wrong)이 아닌 다름(Different)을 인정하는 프랑스의 톨레랑스(Tolerance) 정신을 근간으로, 다양한 주제를 놓고 열띤 대화를 펼친다. 일요일 아침 10시, 철학자와 비슷한 지적 수준을 가진 사람들이 이 톨레랑스를 만끽하기 위해 카페 데 파르로 몰려든다. 그리고 그렇게 모인 사람들은 철학에 대해 거리낌 없이 의견을 주고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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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저녁에는 맛있는 냄새의 바게트를 만나기도 했다. 나는 거리에 퍼진 빵 굽는 냄새를 따라 코를 벌름거리며 걸음 을 옮겼다. 평소 빵을 즐겨 먹지는 않았지만, 그 냄새는 그런 나조차도 이끌리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있었다. 빵 냄새의 근원지는 작은 동네 빵집이었다. 나는 가게 안으로 들어가 인품 좋아 보이는 주인아주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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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 마주한 가장 평화로웠던 순간은 튈르리 정원에서 보낸 한때다. 튈르리 정원을 걸었던 그날, 나는 내 생에서 오랫동안 기억할 만한 햇살의 감촉을 느꼈다. 같은 계절이라 해도 햇빛의 강도나 구름의 양에 따라 날씨는 매일 미세하게 달라진다. 살면서 햇살의 감촉을 느끼고 그것을 명확하게 기억할 수 있는 순간이 과연 몇이나 될까? 우리는 그날 만난 사람이나 장소, 사건에 대해서는 또렷이 기억하지만, 그날의 날씨와 세밀한 분위기는 잘 기억하지 못할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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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파리 곳곳에 그들의 영혼이 녹아 있는 것을 보았다. 심미안을 발휘하면 파리 어디에서든 인상파 그림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방돔 광장에서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몽마르트르에서 르누아르의 〈보트 파티에서의 오찬〉을, 비가 내리던 날 카유보트의 〈파리의 거리, 비 오는 날〉을 떠올린 것처럼 말이다. 파리는 그 자체로 거대한 미술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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