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위 울음소리 외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 모두의 시선이 오펠리에게 쏠리자, 그녀는 심호흡을 내뱉었다. 마침내 그녀가 게임에 들어설 시간이 왔다. 오펠리는 토른을 상대로, 토른에 맞서서 자기 자리를 찾을 것이다.
--- p.24
오펠리의 목소리는 작디작았고, 멀리서는 들리지 않기에 말을 자주 되풀이해야 했다. 그녀는 연단에 있는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필요한 호흡을 폐에서 모조리 끌어모았다. 단지 파루크에게만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을 어린여자아이 취급하는 고약한 버릇을 지닌 토른, 베르닐드, 아르쉬발드를 비롯한 모든 이를 향해 말했다.
--- p.33
오펠리는 호기심만큼이나 강렬한 두려움을 느꼈다. 이건 분명 여느 책과는 달랐다. 오펠리는 오랫동안 이런 종류의 책이 아니마에 있는 아르테미스 개인 아카이브에 딱 한 권만 존재하리라 생각했었다. 워낙 독특한 고문서로, 오펠리는 물론이고 최고의 읽기 능력자들도 결코 해독해낼 수 없었다. 그녀는 폴에 도착해서야 아슈들에 다른 책들이 있다는 사실뿐 아니라 무엇보다 자신의 결혼이 파루크의 책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마침내 자신의 운명과 엮인 책을 직접 보자, 손이 근질근질해지며 본능적으로 책을 향해 손을 뻗고 싶었다. 이 책의 비밀을 꿰뚫는다면 자유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
--- pp.34~35
오펠리는 신문을 찢어버렸다. 부아가 치밀어 올라 공포심을 까맣게 잊을 정도였다. 몰락, 사생아, 이방인, 유해, 타락. 도대체 무슨 권리로 신문이 한 인간을 이토록 멸시할 수 있을까?
--- p.96
오펠리는 음산한 장례업체 대표를 마주하듯 반감과 연민이 뒤섞인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정말이지 난 당신 구두 속에 살고 싶지 않아.”
토른이 워낙 표현에 인색한 사람이라 오펠리는 우두커니 있는 그의 모습을 처음에는 기다리는 중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눈도 깜박이지 않고, 숨도 쉬지 않고, 뚫어지라 자신을 보는 토른이 사실은 자신의 말에 숨이 멎을 정도로 놀랐다는 것을 깨달았다.
“신발이 그렇게 편하지 않다는 거 인정해.” 아주 긴 침묵 끝에 그가 한 음절씩 끊어가며 답했다. “아니, 그 이상이지.”
--- p.118
‘가장 걱정되는 게 뭔지 모르겠어. 그들에게 절대 익숙해지지 않는 걸까? 아니면 반대로 결국 그들에게 익숙해지는 걸까?’ 오펠리는 생각했다.
--- p.148
오펠리는 둥근 창에 다가서며 구두 아래로 유리 부서지는 소리를 듣고 창문이 열린 게 아니라 깨진 것임을 깨닫고 놀랐다. 하지만 그 놀라움은 마침내 서류 소용돌이 한가운데에 서 있는 토른을 발견했을 때 느낀 놀라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토른은 그녀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다.
--- p.176
오펠리는 파루크와의 대면을 떠올릴 때마다 모순된 감정을 느꼈다. 한편으로는 생존 본능에 따라 가능하면 책과 최대한 거리를 두고 싶었다. 파루크가 페이지들 사이에서 막연하게 찾는 진실이 무엇이든, 오펠리는 그 진실에 가까워지는 것이 자신의 목숨을 위태롭게 만든다고 느꼈다. 하지만 무모하게 직업을 따지는 또 다른 자아는 자신의 모든 경력을 통틀어 가장 흥미진진한 읽기가 될 기회를 날려 보낸 것에 좌절감을 느꼈다.
--- p.232
“당신은 모든 문제를 혼자 해결하고 싶어해.” 오펠리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사람들을 체스 말처럼 이용하게 될지라도, 세상 사람 모두가 당신을 싫어하게 된다 할지라도.”
“아직도 날 싫어해?”
“아닌 것 같아. 이젠 아니야.”
“그나마 다행이네.” 토른이 중얼거렸다. “누군가 날 싫어하지 않도록 이렇게 애써본 적이 없었으니.”
--- pp.331~332
오펠리는 화가 치밀어 ‘내 자리는 내가 있기로 선택한 곳이야’라고 따질 뻔했지만, 전혀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 p.351
토른은 한참동안 몸을 움직여 허리를 숙였지만, 오펠리에게 시계를 되돌려주지는 않았다. 대신 그의 입을 오펠리 입에 갖다 댔다. 숨이 멎을 정도로 놀란 오펠리 누니 휘둥그레졌다. 절대 예상치도 못한 입맞춤에 넋이 나갔다. 머릿속은 완전히 정지했지만, 주변의 모든 강감이 다시 생생히 살아났다. 돌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 드레스 사이로 파고드는 바람, 피부에 박힌 듯한 안경, 이마에 닿은 토른의 젖은 머리칼, 서툴게 포갠 그의 입술. 마침내 오펠리가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때달은 순간, 그녀는 갑자기 강렬한 현기증을 느꼈다.
--- pp.353~354
“당신이 날 약혼녀로 삼은 뒤 내게 수많은 일들이 벌어졌어. 믿기지 않을 만큼 많은 살해 협박을 받고, 그만큼 무례한 제안도 많이 받았지. 감금되고, 남장을 하고, 비웃음을 사고, 모욕당하고, 노예처럼 지내고, 어린아이 취급을 받고, 야유를 받고, 최면술에 걸리기도 했어. 바로 내 눈앞에서 이모가 정신을 잃은 것도 봤다고. 그런데 지금처럼 겁이 난 적이 없었어. 가족들이 걱정되고, 내가 걱정되고, 베르닐드가 걱정되고, 아르쉬발드가 걱정돼, 토른 이 모든 건 당신 때문이야. 그러니 제발 당신이 겪는 모든 문제의 원인이 나인 것처럼 말하지 말아줄래?”
--- p.448
때가 되면 철새가 이동하듯, 그도 때가 되면 그곳으로 가게 될 것이다. 그렇게 쓰여 있기 때문이다. 왜? 왜 그는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적혀 있는 명령을 따라야 하나? 그는 신이 정한 이 운명을, 그에게 속하지 않은 이 이야기를, 그가 숙달하지 못한 그 능력을 원치 않는다. 그는 집과 신 그리고 다른 이들을 떠나고 싶지 않다. 그는 그가 되어야 하는 것이 되고 싶지 않다. 그는 정해진 존재로 존재하고 싶지 않다.
--- p.454
“난 운도, 운명도 믿지 않아.” 토른이 선언하듯 말했다. “오로지 확률의 과학만을 믿지. 수학 통계, 조합론, 확률 질량 함수, 확률 변수를 공부했고, 이 학문들은 결코 예상을 벗어나는 일이 없어. 당신이 나 같은 사람을 얼마나 불안하게 만들 수 있는지 모르는 것 같아.”
--- p.474
“조금 시간이 걸렸지만.” 그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마침내 알겠어.” (....) “방정식에서 당신을 빼내기만 하면 돼.” 그가 오펠리에게 말했다.
--- p.504
오펠리는 분에 찬 리포터와 나머지 가족들의 얼빠진 시선을 무시하고 호텔 홀에 놓인 거울로 다가가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았다. 온갖 상처와 멍으로 뒤덮인 결의에 찬 얼굴이 보였다. 오펠리는 마침내 결코 알고 싶어하지 않던 진실과 마주할 준비가 됐다. 토른에게 그녀가 필요한 게 아니었다. 오펠리에게 그가 필요했다. 오펠리는 몸과 마음을 다해 거울로 들어갔다.
--- p.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