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경 고등학교 ‘우리들의 목소리’ 오픈채팅방
환영합니다. 나경 고등학교를 더욱 아름답게 가꿀 수 있도록 여러분의 솔직한 목소리를 들려주세요.
202x년 11월 1일 일요일
제갈윤님이 들어왔습니다.
안녕, 나경 고등학교 학생 여러분.
이제 내 빈자리에 익숙해지셨나요?
내 죽음에 책임이 있는,
엔지 시네마 부원 네 명에게 각각 편지를 보냅니다.
하지만 모두들 클릭해서 읽어보세요.
여러분도 내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누구나 이런 사건의 피해자가 될 수 있으니까.
앞일은 아무도 모르는 거잖아요. 안 그래요?
--- p.11~12
교장실 문 옆에는 문과 똑같은 목재로 만든 작은 나무함이 붙어 있었다. 학생회는 이 나무함에도 딴지를 걸었다. 학생들이 접근하기 힘든 곳에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나는 매일 아침 정확히 8시 15분에 진실의 소리함을 엽니다. 지금까지 왔던 쪽지들은 모두 시답잖은 내용들이었어요. 담임이 아무개만 예뻐한다. 급식에 나오는 연근조림이 딱딱하다. 2층 여자 화장실 문이 안 잠긴다. 한때는 성가신 마음에 그 나무함을 없앨까 싶기도 했지만 그러지 않았어요. 학생들에게 한 약속이었으니까. 그런데 오늘은 진작 없애지 않은 게 정말 후회되는군요.”
교장 선생님이 흰색 봉투를 건넸다. 봉투 안에는 직사각형 모양의 USB와 타이핑해서 출력한 메모가 들어 있었다.
김옥경 미카엘라 교장 선생님께,
제갈윤 학생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엔지 시네마 부원 네 명을 철저히 조사해주십시오.
그리고 11월 16일 오후 4시까지
학교 본관 게시판에 마땅한 처벌을 공고하십시오.
이 내용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그들이 벌인 일과 나경 고등학교의 묵인을
증거 자료와 함께 해당 교육청에 직접 제보하겠습니다.
현진은 봉투의 앞뒤를 살폈다. 이 메모를 보낸 사람의 이름은 당연히,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았다. --- p.32~33
“마지막 질문이야. 소영아, 너는 윤이가 왜 죽었다고 생각하니?”
“아, 진짜. 샘, 그건 경찰한테도 몇 번이나 말했던 거잖아요. 엄마가 갑자기 돌아가셔서 너무 외로운 것 같았다고. 뭐, 그때는 저도 몰랐죠. 제갈윤이 속속들이 다 알고 있을 줄은. 그래요, 오픈채팅방에 쓰여 있던 글대로 우리들 때문에 죽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이렇게 말하니까 속이 시원하세요? 샘은 저만 나쁜 애라고 생각하겠죠. 나도 지금까지 걔랑 억지로 다니느라 힘들었는데. 엄마가 저한테 만날 제갈윤이랑 친하게 지내라고 한 거. 그게 요즘 방송에 자주 나오는 가스라이팅, 그런 거 아니에요? 샘, 저도 지금까지 괴로웠다는 것만 알아주세요.”
소영은 자꾸만 십자가로 향하는 시선을 간신히 현진의 얼굴에 고정했다.
“제 얘기는 진짜 비밀로 해주실 거죠? 혹시 다른 애들이 편지에 대해 물어보면 다 가짜라고 해주시면 안 돼요? 네?” --- p.76
옥상에서 뛰어내리기 전날, 윤은 동아리 모임이 끝난 뒤 할 말이 있다며 자신을 기다렸다. 조금만 더 세심했다면, 조금만 더 깊이 생각했다면 윤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날이 마지막 기회였을 것이다. 현진은 그 만남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학생을 지키지 못했다는 부끄러움과 그 일로 질타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현진은 결국 입을 다물었다. 오픈채팅방에 편지를 올리고, 교장실로 당돌한 협박 편지를 보낸 아이는 그래도 제갈윤의 편일까. 죽음을 둘러싼 진실을 알리기 위해, 자신이 나서지 않으면 영원히 묻힐지도 모르는 진실을 위해 이런 일을 벌인 걸까.
하지만 그 아이는 누구인가. 짐작이 가는 아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맞은편에서 긴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동호가 다시 한번 현진을 빤히 쳐다봤다.
“이제 끝났죠?” --- p.100
“나 선생, 지옥이 어떤 곳인지 알아요?”
뜻밖의 질문에 현진은 눈을 깜박였다.
“그거야…… 죄를 지은 사람들이 죽어서 벌을 받는 곳이 아닌가요?”
“그 벌이 괴로운 이유는 상황이 바뀔 수 있다는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옥은 아무런 희망도 없는 곳입니다. 그 아이가 나경 고등학교에서 목숨을 버린 이유도 이곳에서 희망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겠죠. 혹시 이 자리를 지킬 수 있다면 나도 변해보고 싶네요. 한 명의 마음이라도 어루만질 수 있다면, 그러니까 조금의 희망이라도 줄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못하겠습니까. 나름대로 고생한 거 알아요, 나 선생. 애썼습니다. 질책이 아니라 이 말을 하려고 불렀습니다.”
“아닙니다. 실망시켜 드려서 죄송합니다.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교장 선생님은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허리를 펴고 현진을 똑바로 쳐다봤다. 익숙한 위엄이 다시 그 작은 몸을 감쌌다.
“상황이 갖추어지는 대로 학교폭력위원회가 열릴 겁니다. 선도위원회도 함께요. 각자 할 수 있는 일을 준비하며 기다려야죠. 그뿐입니다.”
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네. 저도 제 일을 하겠습니다. --- p.155
“처음부터 윤이에게 그런 일들이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았겠지. 성규와 우진이는 그런 사진을 찍지 않고, 소영이는 사실을 고백했다면 윤이는 여전히 우리 곁에 있었을 거야. 하지만 아무리 솔직하고 바르게 살아간다 해도 나쁜 일은 반드시 벌어져. 윤이가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였다면 좋았을 텐데. 포기하고 싶은 오늘을 버티게 하는 건 그저 약간의 다정함인데. 아무도 윤이에게 그렇게 해주지 못했지. 윤이의 죽음은 결국 우리 모두의 책임이야.”
--- p.177~1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