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규어 삼각샤프(포함 유아/어린이/청소년 2만↑, 포인트 차감, 한정수량)
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턴아웃
『턴아웃』 창작 노트 |
저하은경
관심작가 알림신청하은경의 다른 상품
〈백조의 호수〉 3막이다. 제나는 숨을 크게 내쉬고 나서 무대로 뛰어들어갔다. 흑조 오딜이 왕자에게 사랑을 갈구하는 장면이다. 홀릴 듯한 미소를 지으라고 서 단장이 수십 번 가까이 다그쳤던 장면이었다. 토슈즈를 신은 발끝이 심상치 않았다. 뭔가 이물질이 들어 있는 것처럼 걸리적거린다. 미소를 잃지 않으려 애쓰며 푸에테 동작을 시작했다. 한쪽 다리로 중심을 잡은 채 다른 쪽 다리를 놀리며 서른두 번의 회전을 시도하는 순간이었다. 발끝이 아팠다. 유리 조각이 순식간에 엄지발가락 한 마디를 관통하더니 두 번째 마디를 푹 쑤셨다. 아프다……. 아프다……. 너무 아파 쓰러질 것 같다.
제나는 안간힘을 쓰며 객석을 내다보았다. 이천여 명의 객석이 빈틈없이 꽉 찼다. 어둠 속에서 관객들이 숨을 죽이며 자기를 쳐다보고 있다. 제나는 발가락이 아파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당장이라도 무대를 뛰쳐나가고 싶었다. 객석 가운데 두 번째 줄에 앉아 있는 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딸의 갑작스러운 표정 변화를 눈치챈 걸까. 엄마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리더니 이내 고양이같이 도도한 눈으로 제나를 응시했다. 이제 무대를 뛰쳐나갈 수도 버틸 수도 없다. 제나의 눈가에 눈물이 고여 들었다. 엄마는 눈물을 감지한 게 틀림없었다. 입술을 앙다물며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제나야, 계속 춤을 춰야 해! 엄마처럼 뛰쳐나오면 안 돼! 죽더라도 무대 위에서 죽어! --- pp.7~8 어린 시절에는 치열하게 경쟁해야 할 대상도 이유도 없었다. 그저 발레가 좋아 열심히 연습했다. 발레스쿨 1년 차 때만 해도 소율은 제나와 친하게 지냈다. 함께 발레 공연을 보고 난 뒤 감상을 이야기할 때면 열에 들떠 두 눈을 반짝이던 소녀들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제나와 벌어지는 격차를 견딜 수 없었다. 어딜 가든 제나 이야기뿐이었다. 소율은 정말로 풀이 죽었다. 죽도록 연습하는데, 왜 자기가 제나한테 밀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연습량이 소율 자신보다 많은 학생은 없었다. 소율은 지독한 연습벌레로 유명했으니까. 소율은 타고난 자질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 깨달았다. 처음으로 연습과 노력의 한계를 맛보았다. 모두 제나 때문이었다. ‘제나가 사라져버렸으면 좋겠어!’ 그런 생각을 하며 몸을 가늘게 떨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적이 있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이 무서웠다. 그러나 발레리나 세계에서 선의의 경쟁이란 말은 가식이었다. 우열이 드러나는데 어떻게 선의가 있을 수 있겠어! 그런 식의 경쟁은 적어도 소율에게는 없었다. 최고 발레리나가 되어 무대를 장악하는 것, 그것만이 소율이 발레를 하는 목적이었다. --- pp.41~42 “비비안, 요즘 제나와 무슨 이야기를 했니?” 비비안의 눈에 파란 불빛이 켜졌다. 불빛이 좌우로 흔들리더니 곧 안정적으로 파란빛을 내비쳤다. “제나 님은 요즘 종종 별에 대해 물었어요. 밤하늘에 떠 있는 별들이 지구와 얼마만큼 먼 거리에 떠 있는지 궁금해했어요.” “별이라고?” “네, 요즘 천문학에 부쩍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뭐, 천문학?” “네, 천문학은 지구 대기권 너머 우주 전체를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또 우주 안에 있는 다른 천체를…….” “그만!” 수연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천문학이라면 전 남편 태영의 연구 분야였다. 태영은 제주도에 있는 천문학 연구소에서 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대학교수직을 버리더니 아예 제주도로 내려가 밤하늘에 떠 있는 별을 연구했다. 수연은 언제나 태영이 못마땅했다. 별을 연구하는 그가 몽상가처럼 느껴졌다. 그뿐이면 다행이었으나 문제는 어릴 적부터 제나가 남편의 일에 관심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동안 잠잠하더니 왜 하필 요즘 제나가 천문학에 또다시 관심을 갖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가 없었다. --- pp.53~54 서 단장이 김 형사를 빤히 보며 물었다. “그런데 오늘은 또 어쩐 일로 오셨나요? 이야기는 모두 다 한 것 같은데요?” 서 단장은 일찌감치 방어선을 그었다. 김 형사는 역시 여우 같은 여자라는 생각을 했다. 조금 뒤 김 형사가 입을 열었다. “송라희 씨 휴대전화에 저장된 파일을 계속 조사하고 있습니다.” 서 단장이 정색을 했다. “파일이라면 그때 이미 다 말씀드린 걸로 알고 있어요. 저는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김 형사가 느긋한 얼굴로 서 단장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좀 다른 게 발견됐습니다.” 서 단장이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김 형사는 비로소 오늘 이곳을 찾아온 용건에 대해 설명했다. “저희 쪽에서 며칠 전에 송라희 씨 휴대전화에 저장된 파일의 출처를 알아냈습니다.” “출처라니요?” 서 단장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김 형사는 그 모습을 살피며 다시금 말했다. “그 파일의 출처는 단장님 컴퓨터였습니다. 때문에 바쁘신 줄 알지만 송구하게도 또 이렇게 찾아뵙게 됐습니다.” 서연조는 침묵했다. 방금 전까지 보였던 들뜬 모습은 사라지고 긴장한 낯빛을 했다. --- p.118 서 단장이 소율을 바라보았다. 잠시 동안의 침묵 뒤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소율아, 난 네가 제나를 뛰어넘으면 좋겠어.” 소율은 무슨 말인지 와닿지 않아서 단장을 빤히 보았다. 서 단장도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소율을 바라보았다. 조금 뒤 서 단장이 특유의 매력적인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제나를 뛰어넘는다면 발레 역사에 한 획을 긋는 발레리나가 나올 거라 믿어. 그리고…… 방금 전 내가 한 말은 진심이야. 정말 그럴 수 있으면 좋겠어.” 소율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발레 역사에 한 획을 긋는 발레리나라니. 발레를 시작하며 많은 칭찬을 들은 소율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가슴을 떨리게 만드는 칭찬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 안에 칭찬만 들어 있는 게 아니었다. 그동안 서 단장은 자신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또 밤늦도록 혼자 연습실에 남아 있는 자신을 지켜보며, 제나와 제대로 경쟁했으면 했을 것이다. 소율은 용기가 났다. 제나를 영원히 이길 수 없다고 체념했는데 다시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pp.137~138 공연만 보고 식당으로 바삐 달려간 엄마 아빠의 얼굴이 떠오르자 마음이 무거웠다. 자신을 열심히 지원해준 엄마 아빠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오늘 자신의 무대 점수는 70점을 밑돌았다. 착지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게 두고두고 마음에 걸린 탓이었다. 신물이 넘어올 정도로 연습했으나 결국 실수를 하고 말았다. 서 단장의 눈빛에 신경 써서는 안 됐다. 그 때문에 무대에 집중하지 못한 자신이 너무 후회스러웠다. ‘소율아, 택시 타고 와! 내일 또 공연해야 하잖아!’ 사람들 앞에서 소율에게 택시비를 건네주며 엄마가 큰 소리로 말했다. 소율은 또다시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언제나 엄마가 부끄러웠다. 엄마는 아무리 차려입어도 후줄근했고, 공들여 드라이한 파마머리는 끝이 갈라져 부스스하기만 했다. 각종 콩쿠르에서 제나 엄마와 나란히 앉아 있는 엄마를 보면 창피해서 숨고 싶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제나 엄마와 너무나 비교됐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묘하게도 엄마 때문에 자꾸 웃음이 나왔다. 정직하게 번 돈으로 자식에게 투자하는 엄마가 멋지게 느껴졌다. --- pp.202~203 |
유전자 조작과 나노칩 시술이 성행하는 시대, 대부분의 유럽 발레단은 발레리나의 유전자 조작이나 나노칩 시술을 허용하지만 한국은 이를 철저히 금지하는 얼마 남지 않은 나라 중 하나다. 그런 서울시립발레단의 ‘제나’는 과학적 시술 없이도 그 어려운 턴아웃 동작마저 완벽하게 해내는, 발레리나로서의 재능을 타고난 아이다. 천문학자인 아빠처럼 광활하고 먼 우주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네덜란드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출신인 엄마 ‘수연’의 집착과 밀착 코칭을 받으며 발레리나로서 날개를 펼쳐간다.
너무나 완벽한 제나의 능력을 질투하고 시기하는 같은 발레단의 단원 ‘소율’은 어느 날 이상한 일을 겪게 된다. 같은 발레단의 ‘라희’가 죽기 얼마 전, 자신에게 의문의 파일 하나를 전달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제나의 메디컬테스트 기록이었다. 소율은 제나의 메디컬테스트 기록을 생명과학 연구원인 사촌 오빠에게 보내며 해독을 부탁한다. 〈지젤〉 오디션에서 주연 지젤 역을 제나에게 빼앗긴 소율은 곧 놀라운 사실을 맞닥뜨리게 되는데……. |
만들어진 꿈, 강요당한 꿈이 아닌
‘내 마음이 가리키는 길’을 따라ㅡ 『턴아웃』의 이야기는 서울시립발레단의 두 발레리나를 중심으로 흘러간다. 숙련된 발레리나도 완벽하게 해내기 어려운 턴아웃을 흠잡을 데 없이 해내는 천재 발레리나지만, 마음속으로는 엄마의 강요로 선택한 발레가 아닌 별과 우주를 동경하는 유제나. 그리고 제나와 달리 오직 발레만을 사랑하지만 타고난 재능과 환경의 차이로 영원히 2인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열등감에 괴로워하는 김소율. 서로 다른 상황에 처해 있지만, 결국 똑같이 진심으로 원하는 꿈을 마음속에 품고 있는 십대들이이다. 빛나는 별들을 한없이 바라보며 제나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과연 자신이 바라던 꿈이 무엇이었는지를 골똘히 생각해보았다……. -본문에서 두 사람은 부모에게 강요당한 꿈이 아닌, 남을 이기기 위한 꿈이 아닌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한 길을 찾아나간다. 이 여정 끝에는 궁극적으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기다리고 있다. 과연 제나는 엄마의 그늘에서 벗어나 나 자신을 찾을 수 있을까? 소율은 ‘제나를 이기기 위한’ 발레가 아닌,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한 발레를 향해 갈 수 있을까? 『턴아웃』은 하루하루 자신의 진정한 꿈이 무엇인지, 또 자신이 누구인지 답을 찾아나가는 청소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줄 것이다. 마치 발끝으로 땅을 딛고 높이 뛰어오르는 발레리나처럼……. 창작 노트 유전자 조작이라는 소재를 가져왔으나 이 글은 가까운 미래 청소년들의 꿈에 대한 이야기이다. 유전자 조작 시술이 만연한 사회, 예술에 대한 신념이 다른 소녀들이 끊임없이 고민하며 자신의 꿈을 찾아가는 이야기라고 할까. 문제는 최고의 발레리나 주인공 때문에 글을 쓰는 내내 고민에 빠졌다. 과학 시술로 이미 최고 발레리나라는 찬사를 받고 있는데, 굳이 다른 꿈을 찾으려고 할까? 그러나 발레리나의 꿈이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나 타인의 강요에 의해 만들어진 꿈이라면, 그건 가짜일지도 모른다고. 과학의 힘을 빌어 맞춤형 아기가 태어나는 현실은 솔직히 좀 섬뜩하다. 그 맞춤형 아기가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처럼 창조주를 원망하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 수 있는 건 큰 축복이라는 생각을 종종 한다.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이 생긴다면, 꼭 밀고 나가라고 말해주고 싶다. 재능이 부족하다는 생각에, 때로는 자신의 꿈이 너무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에 좌절할 때도 있겠지만,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 행복한 자신과 마주할 거라고 믿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