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적극적인 후원이 있었으나, 집현전의 학자들에게도 불만은 있었다. 세종의 결정으로 오랜 기간 근무하는 장기 근속자들이 늘어났고, 연구기관의 특성상 승진이 늦어져 다른 부서로 옮기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 세종은 사가독서, 즉 왕이 하사하는 유급 휴가를 처음 실시하였다.
---「세종이 집현전을 설치한 까닭은?」중에서
최근의 연구에서는 강우량을 측정하는 기구인 측우기의 발명도 문종의 손에서 이루어졌음이 밝혀졌다. 문종은 국방, 과학 분야에서 상당한 역량을 보인 왕세자였다. “동궁에 있을 때 날마다 서연을 열어서 강론함에 게으르지 않았으며, 모두 동작을 한결같이 법도에 따라 하였다. 희노를 얼굴에 나타내지 않고 성색을 몸에 가까이 하지 않으며, 항상 마음을 바르게 하여 몸을 수양하였다”는 기록에서도 모범적인 세자 시절을 보냈던 문종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준비된 왕세자, 문종」중에서
1455년 8월 16일 세조는 공신들에게 잔치를 베푸는 자리에서 돌출 행동을 보인 적도 있다. 세조는 왕의 술상인 어상에서 내려와 왼손으로 이계전을, 오른손으로 신숙주를 잡고 술잔을 주고받자고 말했다. 놀란 이계전 등이 엎드려서 일어나지를 않자, 세조는 “우리는 옛날의 동료이다. 같이 서서 술잔을 주고받는 것이 어찌 의리에 해롭겠느냐?”라고 하면서 다가섰고, 신하들은 어색해 하면서도 세조의 뜻을 따랐다. 이어서 세조는 특정한 사람을 지목하여 춤을 추게 했고, 화기애애한 술자리는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자신과 공신은 동지라는 점을 강조하며, 왕과 신하가 잔을 나누는 상황을 연출한 것이다.
---「세조가 술자리를 자주 베푼 까닭은?」중에서
워낙 독재군주였던 만큼 연산군 시대에는 엽기적인 형벌들이 다수 개발됐다. 『연산군일기』를 보면 손바닥을 뚫는 천장, 몸을 지지는 낙신, 가슴을 빠개는 착흉, 뼈를 바르는 과골, 손을 마디마디 자르는 촌참을 비롯하여, 뼈를 갈아 바람에 날리는 쇄골표풍 등의 갖가지 형벌이 나온다.
---「연산군의 흥청망청 독재정치」중에서
네덜란드 출신으로 1627년 제주도에 표류해 조선에 귀화한 벨테브레Weltevree(박연)가 한양에서 내려와 하멜 일행의 통역을 맡게 되었다. 하멜은 “57~58세로 보이는 벨테브레가 모국어를 거의 잊고 있어서 더듬더듬 말하는 것을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한 달 정도 같이 지내다 보니 그가 다시 모국어를 기억해냈다”라고 했다. 벨테브레는 당시의 왕 효종의 “그대들이 새라면 본국으로 날아갈 수 있겠지만 우리는 외국인을 나라 밖으로 보내지 않는다. 그대들을 보호해주겠으며 적당한 식량과 의복을 제공해줄 테니 이 나라에서 여생을 마쳐라”라는 말을 전했다. 이후 하멜 일행은 실질적인 억류 생활로 들어가게 되었다.
---「하멜의 표류와 효종의 나선정벌」중에서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누구나 찾고 싶은 곳 온천, 조선시대 온천은 왕실의 최고 휴식처였다. 이 중에서도 가장 각광을 받았던 곳은 온양이었다. 조선 초기에는 평산과 이천 온천에 왕이 거둥하기도 했다. 그러나 온천의 뛰어난 치료 효능과 지리적 여건 때문에 온양에 행궁을 조성하고 이곳에서 정사를 보는 경우가 많았다. ‘평산 온천은 너무 뜨겁고 이천은 길이 험해 온양으로 정한다’라는 『현종실록』의 기록에서 온양이 왕들의 온천으로 자리매김했음을 알 수 있다.
---「현종이 왕으로서의 존재감이 약한 까닭은?」중에서
영조는 사치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자신이 병이 없는 것은 일생 동안 거친 음식을 먹고 얇은 옷으로 생활했기 때문이라 했다. 영조의 어머니인 숙빈 최씨는 숙종의 후궁 출신이었기 때문에 영조는 정통 왕세자 교육을 받지 못했고, 18세부터 28세까지는 궁궐이 아닌 사가에서 살았다. 영조가 왕이 되기 전 살았던 곳은 경복궁 서쪽 지역으로 영조가 왕이 된 후 창의궁으로 불리게 된다. 영조는 이 집을 사위인 김한신에게 물려주었다. 김한신은 화순옹주의 남편으로 추사 김정희의 증조부가 된다. 현재 이곳에는 김정희가 당시 청나라에서 종자를 가져와 심었다는 백송이 남아 있다.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 어울려 살았던 삶의 경험은 왕이 된 이후에 영조가 철저히 사치를 금지하고 금주령을 자주 내린 것이나, 군역의 부담을 덜어준 균역법을 제정하고 청계천을 공사하는 등 서민 위주의 경제 정책을 펴는 데도 큰 영향을 미쳤다.
---「서민을 위했던 왕, 영조와 균역법」중에서
김홍도는 산수화와 기록화, 신선도 등을 많이 그렸지만 정감어린 풍속화를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밭갈이, 추수, 씨름, 서당 등에서 자신의 일에 몰두하는 사람들의 특징을 소탈하고 익살스러운 필치로 묘사했다. 이러한 풍속화는 정조의 국정 자료로 활용되었다. 정조는 국정 개혁에 대한 의지가 매우 강했고 따라서 일반 서민들의 삶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왕이라는 신분 때문에 직접 서민들 가까이에서 그들의 삶을 관찰하고 생활의 문제점을 시정하기 위한 의견을 들을 수는 없었다. 이에 정조는 자신의 최측근인 김홍도에게 서민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담아오라고 지시를 했고 김홍도는 이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김홍도는 정조가 필요로 하는 그림을 다수 작업했다. 금강산 일대를 여행하고 온 후에 주요 장면을 그림으로 그려 올린 것이나, 용주사의 후불탱화(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의 원찰) 제작에 참여한 것에서도 확인된다.
---「정조 시대의 편찬 사업과 문화 중흥」중에서
현대에 들어와 낙선재 영역에는 마지막 황비 순정효황후, 마지막 황태자비 이방자 여사, 마지막 옹주 덕혜옹주 등이 거처했다. 때문에 낙선재는 국권을 빼앗긴 조선 황실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주는 공간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사실 낙선재는 헌종과 경빈 김씨의 이야기가 얽힌 곳이다. 낙선재가 세워진 과정에는 정조를 닮고자 했던 헌종의 의지와 더불어 경빈 김씨에게 후사를 기대했던 사랑이 있었다.
---「헌종과 낙선재, 그리고 경빈 김씨」중에서
갑신정변을 전후하여 고종은 서양의 여러 나라들과 통상했고, 왕비는 고종의 통상을 적극 후원했다. 당시 서양 사람들의 눈에 비친 왕비는 매우 총명하고 지략이 많은 모습이었다. 조선을 방문해 왕비를 직접 본 영국의 여행가 버나드 비숍 여사는 “왕후는 가냘프고 미인이었다. 눈은 차고 날카로워서 훌륭한 지성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명석하고 야심적이며 책략에도 능할 뿐 아니라 매우 매혹적이고 여러 가지 면에서 매우 사랑스러운 여인이었다”라고 왕비를 묘사하고 있다.
---「고종과 명성황후, 동반자인가 경쟁자인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