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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연구

인생 연구

정지돈 | 창비 | 2023년 05월 26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리뷰 총점9.4 리뷰 7건 | 판매지수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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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05월 26일
쪽수, 무게, 크기 272쪽 | 288g | 128*188*20mm
ISBN13 9788936439057
ISBN10 8936439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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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소설 비슷한 걸 쓰고 싶은데 마땅한 소재가 없었다. 친한 동료 작가에게 무서운 이야깃거리 없냐고 물었다. 동료는 잠깐 고민하더니 곤지암에서 살던 어릴 때 이야기를 들려줬다. 자기는 기억이 안 나는데 윗집에 갓 신내림을 받은 무당이 살았단다. 어머니는 신이 들어선 지 얼마 안 된 무당이 특히 용하다는 얘기를 듣고 점을 봤다. 아이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궁금했던 것이다. 무당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 그 자식은 커서 소설가가 될 거라고 말했단다. 그때만 해도 동료 작가는 가나다도 제대로 모르는 유치원생이었는데 말이다.
“소름 돋네요.” 내가 말했다. “어떻게 맞힌 걸까요?”
동료 작가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이 이야기를 며칠 전에 어머니에게 처음 들었다고 했다.
“엄마도 무서웠대요. 하나뿐인 애가 진짜 소설가가 될까봐. 그래서 삼십년 동안 말 안 했는데 이젠 별 수 없으니까 말한다고 하시더라구요.”
“아.”
동료는 이 이야기에서 무서운 건 무당이 아니라 어머니인 것 같다고 했다. “자식이 등단하고 책까지 냈는데 말 안 하고 수년을 버티신 거잖아요.”
---「우리의 스크린은 서로를 바라본다」중에서

JS가 나를 자신의 아들과 동류로 생각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JS는 나를 아들로 착각했다. 그가 벨을 눌렀을 때 내가 문을 열었기 때문이다. JS는 “잘 있었냐”고 하더니, 영문을 모르고 있는 내 손을 잡고 집에 가자고 말했다. 그의 손은 땀으로 흥건했고 시퍼렇게 물든 입술은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가 조 칩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조 칩은 잠깐 나갔어요.”
“헛소리는 집어치워.” JS가 말했다. “어서 가자.”
“죄송한데, 저는 윤이 친구고요, 윤이는 조금 이따 들어올 거예요.” 나는 조 칩을 윤으로 바꿔 말했다. 그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니가 지금 여기 있는데 무슨 소리냐.”
“저는 아드님이 아니라 친구예요.”
“너희 엄마가 많이 아프다. 너는 그걸 알아야 돼.”
“아, 그러면 제가 윤이 찾아올게요.”
---「괜찮아, 목요일에 다시 들를게」중에서

아기를 진짜로 죽여야겠어. 진양이 말했다.
뭐? 잠꼬대라도 하는 거야? 내가 말했다.
내가 아기를 진짜로 죽일 테니까 니가 그걸 찍어. 진양이 붉게 충혈된 눈을 치켜뜨고 말했다. 진양은 진심이었다. 우리가 충분히 급진적일 수 있을 때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그건 범죄야. 1983년, 카를 카르스텐스가 독일연방공화국에 핵무기를 설치하려고 했을 때 귄터 안더스는 이렇게 썼어. “현실은 시작되어야만 한다.” 진양은 영화에서 현실이 시작된다고 믿었다. 그게 진양의 리얼리즘이었다. 그렇다고 아기를 죽여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B! D! F! W!」중에서

그날 밤, 차코이 마을을 떠나는 보트 위에서 또또는 해안가의 풀숲 사이에 피워놓은 횃불을 보았다. 그건 보트가 올 방향을 알려주기 위해 켜져 있는 거라고 누군가 알려줬다. 또는 그건 꿈에서 본 것이지 현실이 아니라고 말했다. 마약 성분의 구름이 밤의 강 위를 떠돈다. 보트의 짐백에는 또또와 59가 쓸 무기가 가득하다. 또또는 자신이 너무 멀리 왔음을 깨닫는다. 모든 일이 너무 쉽거나 너무 어렵다. 트랑킬로, 아미고. 진정해라, 친구야. 하람베의 얼굴을 한 앵무새가 말한다. 인간의 언어는 죽은 언어이니 언어를 살아 있게 하라. 부서지고 조악한 언어들로, 매일 새롭게 태어나는 언어들로, 끝없이 반향하는 언어의 그림자로 가득하게 하라.
---「나, 슈프림」중에서

병원에서 전화가 와 베티 아줌마를 데려가라고 했다. 어머니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우야노,라는 감탄사 비슷한 의문문을 반복하는 것밖에 없었다. 간호사인 듯한 상대방은 어머니를 다그쳤다. 본의는 아니었겠지만 말이다.
“모른 척하시면 안 돼요.”
“우야노.”
“환자 분이 유일하게 기댈 분인데 그러시면 안 되죠.”
그러니 어머니가 전화를 끊고 나에게 구조요청을 한 건 당연한 일이다. 나는 어머니와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 그렇다고 베티 아줌마를 우리 집으로 데리고 올 생각은 없었다. 베티 아줌마에겐 멀쩡한 집이 있다. 하지만 그녀에게 그 집은 전혀 멀쩡하지 않았다. 베티 아줌마의 말에 따르면 벽이 말을 건단다.
---「베티 블루」중에서

블룸 앤 블룸 L.P.의 모토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더 대단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문장은 블룸타워 로비의 우주비행선 모양의 모니터에서 24시간 쉬지 않고 번쩍거린다. 하지만 직원이라면 누구나 진짜 모토가 뭔지안다. ‘남의 돈으로 내 일을 하자.’
나는 블룸 앤 블룸의 진짜 모토가 마음에 들었다. 가난한 부모를 둔 아시아계 미국인이 성공할 수 방법이 그것 말고 어디 있을까. 오리엔테이션 첫날 간부급인 사십대 후반의 백인 남성이 연단에 올라 전통에 따라 소리쳤다. “쇼 미 더 머니!” 그의 선창에 따라 명문대 출신 머저리들이 소리쳤다. “쇼 미 더……”
---「끝없이 두갈래로 갈라지는 복도가 있는 회사」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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