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어차피 안 돼요.” “이것도 몰라요?” “아무튼 못 합니다.” 때로 어떤 개발자는 타인과 소통을 거부한 채 이런 식의 말로 자신의 입장을 관철시키려 한다. 실제로 기술이 작동하지 못할 수도 있고, 혹은 안 되는 이유를 개발지식 없는 이에게 설명하기 어려워 단칼에 끊어낸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이런 말은 듣는 이에게 오해와 불쾌감을 남긴다. 동료를 무시하거나 비하하는 방식은 매우 잘못되었고 분명 개선되어야 할 언어습관이다. 그런데 그런 습관이 단지 개인의 문제인 걸까?
---「01. “이거 안 되는데요?” 개발자 ‘독성 말투’의 이면, p.30~31쪽」중에서
새로운 서비스에는 새로운 위험성이 따른다. 인스타그램에 장소 태그가 생겨나면서 사이버 스토킹의 위험이 생겨나고, 페이스북에 ‘함께 아는 친구’가 노출되면서 프라이버시 침해 이슈가 떠오른 것처럼 말이다. 최근에는 인공지능의 발전에 따라 사진을 합성해 직접 성착취물을 제작·유포하는 디지털 성범죄도 가시화되고 있다. 물론 모든 서비스가 처음부터 이런 사건에 사전 대응할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단 서비스를 악용하는 사례가 보고되었다면 어떻게든 조치해야 한다. 문제가 발생한 순간, 서비스 제작자에게도 책임이 생긴다.
---「02. IT 서비스에도 중립은 없다, p.45~46쪽」중에서
지금 우리 사회는 다른 if를 묻고 있다. ‘만약 카카오가 다중화를 제대로 설계했다면’이 아니라 ‘만약 카카오가 독식하지 않았더라면’이라고 말이다. 2022년 5월 동반성장위원회에서는 대리운전업을 중소기업 적합 업종으로 결정했고, 카카오모빌리티와 티맵모빌리티에 대한 사업 확장 제재를 권고한 바 있다. 대기업이 선진적인 기술력을 무기 삼아 돌격할 때,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건 중소기업뿐만이 아니라 그 아래 계약된 개별 노동자다. 플랫폼은 이용자에게는 일상의 편리를 돕는 순풍이지만, 해당 산업이나 생태계에는 파괴적으로 몰아치는 폭풍이다. ‘공동 성장’은 테크 업계가 아니라 그들이 침투한 생태계에, 그리고 어쩔 수 없이 플랫폼 노동자가 된 모든 이를 향한 단어여야 한다.
---「03. 신비롭지 않은 기술들, p.54~55쪽」중에서
젠더데이터 공백은 신당역 역무원 살인 사건과도 관련이 있다. 살인 사건의 피해자는 스토킹 범죄의 피해자이기도 했다. 그가 가해자를 고소하자 검찰은 즉각 법원에 구속영장을 신청했지만 기각됐다. 구속영장은 왜 기각됐을까? (…) 그러나 관행에 의거하지 않더라도 법원은 스토킹 범죄가 무엇인지, 왜 피해자들이 두려움에 떠는지, 가해자를 구속시키는 것이 왜 필요한지 ‘증명’하지 못한다. 여성 대상 스토킹 범죄의 특수성을 가늠할 만한 데이터가 사실상 공백에 가깝기 때문이다. 젠더데이터는 존재하지 않아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수없이 보고되었지만 수집하지 않았기에 없는 영역이다.
---「04. 우리에게는 더 많은 젠더데이터가 필요하다, p.66~67쪽」중에서
손택의 문장은 지금까지 논의한 이미지 기술의 맥락으로 가져와도 손색이 없다. 여성은 가정주부로, 남성은 직장인으로 표현하는 홍보물이나 길거리라는 키워드에 여성의 불법촬영 사진을 노출시키는 포털은 이 사회에서 성차별이나 편견, 불법촬영과 같은 것이 충분히 통용될 수 있다고 여기게 만든다. 포털이 고스란히 노출하는 이미지가 이용자들이 여성을, 나아가 사회를 인식하는 ‘일종의 참조점’이 되는 것이다.
---「05. 이미지에도 젠더편향이 있다, p.87쪽」중에서
우리는 인공지능 챗봇으로부터 예의 바른 대답이 오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챗봇이 생성하는 안전한 답변은 다른 사용자나 노동자가 겪는 폭력적 상호작용에 대한 대가다. 제3세계 데이터 레이블러뿐만 아니라 폭력과 소수자성에 민감한 이들이 앞서 상처받았기 때문에 비로소 안전한 챗봇이 가능해진다. 그렇다면 다시 물을 수밖에 없다. 지금 우리의 안전은 무엇을 기반으로 가능한 것인지. 그리고 그 과정이 과연 윤리적인지.
---「06. 낙관하기도 비관하기도 이른 인공지능, p.101쪽」중에서
어떤 이는 접근성을 기존 기획에 더해야만 하는 플러스 알파처럼 여긴다. ‘그들’을 위해 할 도리를 했다는 식으로. 그러나 접근성은 특정한 소수 그룹을 향해 시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경계에 선 고통까지도 포괄한다. (…) 장애인들이 이동권 투쟁을 벌여 지하철 엘리베이터와 저상버스가 생겼기에 유아를 데리고 이동해야 하는 사람도, 나이가 많아 계단을 오르내리기 힘든 사람도 대중교통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 접근성은 장애인만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 모두를 위한 것이다.
---「07. 누구를 위한 웹 접근성인가, p.115~116쪽」중에서
서비스의 종료 시점과 방법을 정해놓고 시작하는 개발진은 많지 않다. 모두 자신의 서비스가 성공하고 영속하길 바라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서비스를 어떻게 닫아야 하는지 고민해두지 않으면, 어렵사리 쌓아올린 사용자와의 신뢰를 쉽게 저버릴 수 있다. 지금까지 수많은 웹진이 문을 열고 닫으며 얼마나 많은 콘텐츠가 공중분해되었는지 우리는 여러 차례 목도해오지 않았는가.
---「08. 서비스에도 끝이 있다, p.125쪽」중에서
개발자가 아니라 개발진으로 인식의 범위를 확대할 때, 개발진의 성비는 어떻게 달라질까?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지금의 처참한 개발자 성비보다는 훨씬 나아질 것이다. 이는 단순히 숫자만 다르게 셈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의 확장을 꾀하는 일이다. 우리는 테크 산업 안의 여성들을 더 다채롭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미 일터에 있는 여성들을 지워 내지 않고 그들의 성공과 실패를 있는 그대로 직시할 수 있도록.
---「09. ‘개발진’으로 시선을 옮길 때 드러나는 존재들, p.145~146쪽」중에서
나는 가끔 우리 사회의 편리함이 너무 매끈하다고 생각한다. 저녁에 상품을 주문하면 다음 날 아침 문 앞에 택배가 도착하고, 언제 어디서든 핸드폰으로 연락을 주고받는다. 디지털을 매개하기 때문에 이 모든 게 자동으로 이뤄진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 모든 편리함은 수동이고 누군가의 노동이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세상이 멀쩡하다면, 자는 동안 우린 그만큼 다른 이의 노동에 빚진 것이다.
---「10. 48시간 정도, 안 잘 수 있나요?, p.159쪽」중에서
실력은 만능을 요하는 마법의 단어다. 여기에는 어떤 문제든 척척 풀어내고 회사가 요구하는 과제를 모두 제출할 수 있는 능력, 열정과 승부욕, 도전,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트레스 받지 않으며 금방 회복하는 성격까지 포함된다. 조직이 준비할 건 연봉계약서라는 레드카펫뿐이다. 개인들은 실력을 갖춰야 한다는 이유로 기꺼이 갈려 나가고, 때로 도태되는 자신을 책망하고 원망한다. 실력이라 이름 붙은, 혹독한 자기계발과 자기책망의 굴레다.
---「11. ‘네카라쿠배’라는 새로운 입시, p.174쪽」중에서
기술이 사회를 변화시킨다는 말에는 좀 더 복잡한 속내가 들어 있다. 테크 업계는 사회가 기술에 더 많이 의존하기를 바란다. 사람들이 항상 접속해주기를, 무언가 올려주기를,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통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기를. 방향성은 나중에 결정해도 된다는, 일단 서비스가 성공 가능성을 입증하기만 하면 된다는 낙관주의에 맹목적인 한, 우리는 서비스가 불러일으키는 영향력에 무감해지고 무책임해진다. 서비스를 만들어내는 테크 업계 노동자들조차 마찬가지다.
---「12. 왜 테크 업계는 대량해고를 밥 먹듯 할까, p.186~187쪽」중에서
얼마 전에 내가 속한 온라인 개발자 커뮤니티에서 한 주니어 개발자가 “회사에서 개발하고 있는데 실력이 부족하다고 여겨져 개발을 더 공부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야근이 많고 통근시간이 길어 평일에 공부할 시간을 내기 어렵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냐”고 조언을 구했다. 이미 모든 시간이 꽉 차 있는 듯 보여서 할 말이 없었는데, 다른 사람들이 저마다 “잠을 줄여라.” “통근시간을 활용하라.”고 조언하는 걸 보고 마음이 답답해졌다. 이미 그들도 그렇게 잠을 줄여 공부를 하고 있다고 했다. 12시간 일하고 2시간 통근하지만 잠을 조금씩 줄여 개발을 공부하고 주말에는 사이드 프로젝트를 하는 이런 일상이 정말 괜찮은 걸까?
---「13. 불안과 시간빈곤이 그리는 러닝커브, p.199쪽」중에서
유연근무는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인 선택지가 아니다. 개개인이 돌발상황에서도 생활을 지켜내기 위해서 유연근무는 필수다. 그러나 유연근무가 그 자체로 보다 나은 삶을 담보하는 건 아니므로, 그것이 삶과 조화롭게 어우러질 수 있는 방법을 깊이 논의하고 연구할 필요가 있다. 돌봄노동과 근로를 동시에 해내는 노동자 모두 슈퍼히어로가 아니며,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
---「14. 유연근무제는 일·가정 양립에 도움이 될까, p.217쪽」중에서
커뮤니티는 내게 다른 이를 만나 나를 확장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준다. 작게는 새로운 책을 소개해주거나 사람을 만나게 해주고, 때로는 직장을 선택하는 경로에 도움을 주며, 나아가 세계를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시야를 트이게 한다. 물론 그렇다고 커뮤니티가 확장의 왕도라거나 정답이라는 말은 아니다. 저마다 맞는 방법이 있을 테니 그것을 찾아 나가면 좋겠다. 중요한 건 그 모든 게 성장으로 나아갈 필요는 없다는 사실이다. 인생은 소년만화가 아니고, 우리의 장르에 성장물만 있는 건 아니니까.
---「15. 커뮤니티는 나의 힘, p.228쪽」중에서
아무도 컵을 씻지 않는다면 어떨까. 누구도 거리를 청소하지 않는다면. 고장 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는 사람도, 전봇대에 올라가 전선을 고치는 사람도 없어진다면. 대륙을 끊임없이 횡단하는 설국열차조차 어린아이가 노동하지 않으면 금세 멈춰버릴 만큼 허술하지 않았나. 어쩌면 나는 바로 그런 장면을 기다리는지도 모르겠다. 아무것도 유지보수되지 않아 모든 것이 멈춰 섰을 때, 우리가 미처 몰랐던 노동을 발견하는 한순간을, 노동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비로소 떠올리는 시간을.
---「나가며_우리는 모두 무언가를 유지보수한다, p.238쪽」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