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비건 지향에 관대하다면, 음식에 대한 호기심이 넘치는 나는 적어도 먹는 것에 있어서는 지금보다 더 느슨해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마주한 세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엄격한 비건도 아니고 단지 고기를 안 먹는 정도만으로도 식탁에서 불편한 상황을 겪는 친구들을 하나둘 만나면서 점차 나도 그들 곁으로 이동했다. 그들이 자꾸 부당한 말을 들어야 하는 상황이 불편했다. 다시 말해 나는 기후위기나 동물권 같은 굵직한 정치적 사안 때문만이 아니라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들이 부당하게 비난받는 상황을 도저히 봐줄 수 없어서 그저 내 입 하나를 이동시켰을 뿐이다. 눈치 보게 만드는 권력에 가담하고 싶지 않아서.
--- p.9
김장이 생각보다 고된 노동이더라구요. 전날 저는 공연이 있었고, 늦은 시간까지 음주가무를 즐겼기 때문에 오전에 일어나기도 쉽지 않았어요. 가자마자 무를 깨끗이 씻고, 채 썰고, 양념에 버무려서 속을 만들기만 했는데도 녹초가 되었죠. 밥 먹고 겨우 힘을 내서 배춧잎 사이사이 속을 넣었습니다. 겨울을 나려면 김치가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욕심만큼 배추를 담그려니 너무 힘들었어요. 결국 두 통만 챙겨서 낑낑 들고 왔지요. 며칠 뒤, 가스가 차서 폭발해버린 김치통을 열어서 맛을 봤어요. 고생한 보람을 느꼈습니다. 하루 세 끼 김치볶음밥, 볶음김치, 두부김치를 먹었어요. 들기름, 두부, 밥, 김치, 그리고 김의 조화는 정말이지 천하무적이에요.
--- p.65
저는 기본적으로 ‘살아 있는’ 생명은 결국 모두가 살생에 동참하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것을 받아들일 때 나의 ‘살아 있음’이 다른 생명에 기대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고, 그것이 다른 생명을 제대로 존중할 수 있는 첫걸음이라고 믿어요. 우리는 아무도 죽이지 않는다기보다는 조금이라도 덜 죽이는 방향으로 가기 위해 애쓰는 것이겠죠.
--- p.96
태어날 때부터 어떤 역할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야말로 억압이고, 여성에게 강요하는 그 역할은 인간이 다른 동물에게 요구하는 역할과 동일해요. 여성주의가 가부장제의 구조적 폭력을 드러내도록 이끌었다면, 비거니즘은 인간 중심주의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줍니다. 이 사회에서 누군들 자유롭지 않지만 그래도 아주 조금이라도 꿈틀거려야 착취를 막아낼 수 있겠지요.
--- p.136
생명을 옮기는 행위야말로 소외의 본질입니다. 전쟁이나 댐 건설 때문에 마을을 옮기는 것과 자본의 논리 때문에 파프리카와 감자를 옮기는 것은 다를 바 없습니다. 사람과 환경, 생산자와 생산물, 창조자와 피조물의 연결을 끊는 거니까요. 옮김은 죽임의 시작입니다. 멀리 옮겨진 음식을 먹을수록 우리는 죽음에 둔감해집니다. 아마존 원주민이 자명하게 겪고 있는 생태의 파괴가 지구 반대편 소비자에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 p.167
딜 옆에는 바질이, 그 옆에는 샐러리가 있었습니다. 서로 상호작용을 하며 자란답니다. 고수, 딜, 바질, 샐러리, 깻잎, 애플민트, 버터헤드레터스를 얻어 왔어요. 샐러리는 아예 세 뿌리를 얻어서 지금 베란다에서 키우고 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샐러리를 살피는 게 요즘 작은 기쁨이랍니다. 애플민트를 우려 밤마다 차를 마셨더니 잠을 잘 잡니다. 딜을 넣어 방울토마토 초절임을 만들었고, 오늘 저녁에는 남은 딜을 오이 초절임에 넣으려 합니다. 오이와 딜이 잘 어울려요.
--- p.176
텃밭에서 따온 못생긴 오이를 자르면서 생각했습니다. 마트에 있는 미끈한 호박과 줄기가 튼실한 샐러리는 사실 인간의 욕망이 성형해낸 모습이죠. 어느 순간 인간들은 그 모습이 ‘정상’인 줄 아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아주 작은 흠집도 견디지 못하는 인간이 되었습니다. 약하고 상처 받은 것들을 외면하죠. 타자의 결핍과 상처를 견디지 못하는 인간은 스스로의 결핍도 부정할 것입니다.
--- pp.196~197
저는 갈수록 책임에 대해 생각합니다. 세상에서는 무책임이 자유의 동의어처럼 유통되기도 해서요. 책임감은 어느덧 억울함의 배경처럼 취급 받습니다. 무책임은 많은 문제들을 외면하게 만들지요. 알기 싫은 것들을 외면하며 책임에서 벗어날 ‘자유’가 자유는 아닌데, 어쩐지 제 눈에는 책임감이 이 자유의 외피를 두른 무책임에 밀려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 p.221
먹기의 ‘예능화’는 식문화뿐 아니라 식탁 예절까지 위협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먹는 인간들이 입을 쩍 벌리고 음식을 집어삼키거나 과장된 감탄사를 내뿜는 모습을 쉽게 만납니다. ‘면치기’라는 말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르겠어요. 면을 후르륵 후르륵 시끄럽게 먹고, 큰 덩어리 음식을 한입에 먹는 걸 마치 먹음직스럽게 먹는 것처럼 다루더군요. 저는 보기가 몹시 거북해요. 게다가 각종 먹는 방송에는 정말 육식이 많이 나옵니다.
--- pp.235~236
나는 이 책이 지구 살림을 위한 연대의 가능성을 보여주었으면 한다. 기후생태위기에 맞서는 페미니즘과 비거니즘의 조화. 살리는 맛이 담긴 식탁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이라영 작가와 내가 그렇게 만났다. 살리는 마음으로 차린 우리의 식탁에 여러분을 초대한다.
--- p.2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