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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유전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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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09월 20일
쪽수, 무게, 크기 272쪽 | 420g | 136*210*20mm
ISBN13 9791165348144
ISBN10 1165348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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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 이쪽으로 피하십시오.”
메케한 연기와 폭음의 아수라장 속에서 부하 한 명이 다가왔다. 첩자로 의심받은 안드레이. 사내의 눈에만 보이는 붉은 후광이 안드레이 머리 뒤에 드리운다. 사내는 아무렇지도 않게 안주머니에서 모제르 권총을 꺼내 그의 이마에 총알을 박는다. 또 다른 부하가 숨을 헐떡이며 다가왔다.
“대장! 성공입니다. 여기!”
코테가 짊어진 돈 자루를 건넸다. 첩자 안드레이를 죽이라는 사내의 명령을 수행하지 않은 코테. 그의 뒤에도 붉은 후광이 드리운다. 사내는 다시 권총을 꺼내 코테의 머리를 박살 낸다. 아직도 광장에는 흙먼지와 화염 그리고 비명과 폭음이 가득했다. 사내는 돈 자루를 들고 마차를 대기시켜 놓은 외진 골목으로 사라진다.
“기차역으로.”
마차에 탄 사내는 묵직한 돈 자루를 만져 본다. 족히 30만 루블이다. 이 정도면 사내의 윗선인 ‘그분’이 세상을 뒤엎을 공작금으로 넉넉한 액수다. 사내는 그 길로 부모와 처자식을 내팽개치고 유유히 고향을 떠난다.
--- p.9

“네 아비 베소는 악마가 될 만한 배포가 없는 사람이었다. 한낱 불쌍한 주정뱅이일 뿐이었어.”
평생 술을 입에 대 본 적 없는 노파가 테이블로 잔을 가져와 보드카를 따랐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진짜 악마는 따로 있다. 그 악마가 베소와 나를 완전히 망가뜨렸어.”
노파는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보드카를 반 잔이나 마셨다. 아들은 난생처음 보는 어머니의 음주에 적잖이 당황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평생 숨겨 왔던 비밀을 막 풀려는 참이었다.
(중략)
두 번 다시 못 볼 외아들과의 마지막 밤에 비밀을 털어놓지 않을 어머니는 없을 것이다. 사내는 내심 어미의 마음속으로 침입한 보드카가 오래된 비밀들을 입 밖으로 내쫓아 주길 고대했다.
“시베리아 어디쯤이니?”
“투루한스크 변경주요.”
“투루한스크?”
놀란 노파는 반쯤 남은 보드카 잔을 비워 버렸다.
“참나…… 운명이…….”
비밀은 이미 목젖까지 올라왔다.
--- p.19~20

동토의 땅 시베리아 안에서도 유난히 춥다는 투루한스크. 그 툰드라에서도 매서운 한파로 유명한 유쥐나야. 그 마을의 외곽, 깊은 산속에 고립된 홀로드나야. 그곳은 남녀가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고, 아이들만 살고 있다는 것은 유쥐나야 마을 사람들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홀로드나야의 아이들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도 아이들은 얇은 속옷만 입고 생활했다. 그리고 매일 아침 7시와 저녁 7시에 한 명도 빠짐없이 광장의 저수지에서 ‘입수 기도’라는 특별한 의식을 치러야만 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진행되는 저수지 입수는 후작과 수도원의 모든 인력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치 미사 집전처럼 엄격하고 경건하게 진행되었다
--- p.34

눈이 수북이 쌓인 언덕길의 응달을 타고 내려갔다. 발걸음에 찌부러지는 눈과 짜개지는 살얼음 소리가 밤을 깨웠지만, 밤 구름이 어디선가 나타나 슬며시 달을 가려 주었다. 언덕을 거의 다 내려올 때까지 어떠한 추격의 조짐도 없었다.
텅 빈 홀로드나야는 어둠보다 검었다. 3번 통나무 오두막은 굳게 잠겨 있었다.

케케는 저수지로 걸어갔다. 후작의 방에서 내려다본 것처럼 하얗고 단단하게 얼어 있었다. 저수지 옆에 놓인 큰 돌을 양손으로 들고 빙판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누군가 뚫어 놓은 작은 구멍이 있었다. 큰 돌로 구멍 주변의 얼음을 깨 커다란 검은자를 만들었다. 케케는 돌을 품에 안고 얼음 구멍 앞에 섰다. 각막이 간지러워 올려다본 밤하늘은 오롯이 오로라 차지였다. 케케는 언덕 위 수도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안녕, 베소.”
엄마의 자궁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케케는 흰자 속으로 가라앉았다.
---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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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야비 작가를 공연 작업을 통해 오랫동안 알고 지냈다. 그는 주로 작품의 스토리텔링을 분석하는 드라마트루그 역할을 해 왔다. 그런 그가 자신이 쓴 소설을 쓰윽 읽어 봐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의 두 번째 장편 소설이었다.

‘과연 인간에게 악은 유전될 수 있는 것인가’라는 주제를 담고 있었다. 하루라도 ‘상실’과 ‘환멸’을 거치지 않으면 지나가기 힘든 요즘 시대에 명확한 메시지를 던지는 이야기였다. 읽는 내내 작가의 인문학, 과학, 역사에 대한 깊은 사유에 감탄했다. 공연장에서는 주인공이 아닌 채로 늘 조용히 자신의 역할을 해 오던 그가 이야기 속 주인공들을 데리고 세상에 ‘조용한 외침’을 시작했구나!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던, 악의 근원을 찾아가는 이야기로 작가는 페이지의 곳간을 꽉 채워 놓았다.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 정동환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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