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는 서사가 아니다. 스토리, 즉 정보는 끊임없이 등장하는 다음 스토리로 대체되어 사라진다. 반면 서사는 나만의 맥락과 이야기, 삶 그 자체다. 나의 저 먼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하기에 방향성을 띤다. 곧 사라져 버릴 정보에 휩쓸려 자신만의 이야기를 잃은 사회, 내 생각과 느낌과 감정을 말하지 못하고 입력한 정보를 앵무새처럼 내뱉는 사회의 끝은 서사 없는 ‘텅 빈 삶’이다.
--- p.7, 「역자 서문」 중에서
프랑스 일간지 《르 피가로》를 창간한 이폴리트 드 빌메상(Hippolyte de Villemessant)은 정보의 본질을 다음의 한 문장으로 정리했다. “우리 독자들은 마드리드에서 일어난 혁명보다 파리 라틴 숙소에서 일어난 지붕 화재에 더 큰 관심을 보인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이를 더욱 구체화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더 이상 멀리서 오는 지식이 아닌, 바로 다음에 일어날 일의 단서를 제공하는 정보만이 공감을 얻는다.” 신문 독자들의 관심은 코앞에 놓인 것 이상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들의 관심은 호기심거리로 축소된다. 근대의 신문 독자들은 시선을 멀리 두고 머무르는 대신, 하나의 뉴스거리에서 다른 뉴스거리로 관심을 이동시킬 뿐이다.
--- p.13, 「이야기에서 정보로」 중에서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 같은 디지털 플랫폼의 ‘스토리’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들은 어떠한 서사적 길이도 보이지 않는다. 일련의 순간 포착일 뿐이며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사실상 이들은 빠르게 사라지는 시각적 정보에 불과하다.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인스타그램의 광고 슬로건은 이렇다. “일상의 소중한 순간을 스토리로 올려보세요. 스토리는 보통 재미있고 가벼운 내용을 담고 있으며 24시간 동안만 지속됩니다.” 시간제한은 특별한 심리적 효과를 일으킨다. 수시로 변하는 듯한 느낌을 들게 해 더 많은 소통을 향한 미묘한 강박을 만든다.
--- p.46, 「설명되는 삶」 중에서
디지털화된 후기 근대에 우리는 끊임없이 게시하고 ‘좋아요’를 누르고 공유하면서 벌거벗음, 공허해진 삶의 의미를 모르는 척한다. 소통 소음과 정보 소음은 삶이 불안한 공허를 드러내지 못하게 만든다. 오늘날의 위기는 ‘사느냐, 이야기하느냐’가 아닌 ‘사느냐, 게시하느냐’가 된 데 있다. 셀카 중독마저도 나르시시즘 때문이 아니다. 내면의 공허가 셀카 중독으로 이어진 것이다. 나에게는 안정적 정체성을 부여하는 의미 제공이 결여되어 있다. 내면의 공허에 직면한 ‘나’는 스스로를 영구히 생산해 낸다. 셀카는 텅 빈 자기의 복제다.
--- p.64-65, 「벌거벗은 삶」 중에서
프로이트도 고통을 개인의 이야기 속에 나타나는 막힘을 드러내는 증상으로 이해했다. 막힘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나갈 수 없다. 심리적 장애는 막혀버린 이야기의 표출이다. 치유는 환자들을 이야기의 막힘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고, 이야기할 수 없는 사람들이 이야기를 말로써 표현할 수 있게 하는 과정에서 일어난다. 환자는 스스로 자유롭게 이야기할 때 치유된다.
--- p.114, 「치유의 스토리텔링」 중에서
이야기는 사회적 응집성을 만든다. 이야기는 의미를 제공하며, 공동체를 형성하는 가치를 전달한다. 이들은 체제를 만드는 서사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신자유주의 체제의 기초가 되는 서사는 공동체 형성 자체를 방해한다. 신자유주의적 성과 서사는 모든 사람을 스스로 자기 자신의 기업가가 되게 한다. 모두가 다른 사람과의 경쟁 속에 존재한다. 성과 서사는 사회적 응집성, 즉 우리를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연대뿐 아니라 공감까지 해체한다. 자기 최적화, 자기실현과 같은 신자유주의적 서사 또는 진정성은 사람들을 고립시킴으로써 사회를 불안정하게 만든다. 자기 자신에 대한 숭배를 좋아하고 스스로가 지도자인 곳, 모두가 스스로를 생산하고 스스로를 공연하는 곳에는 안정적인 공동체가 형성되지 않는다.
--- p.126, 「이야기 공동체」 중에서
삶은 이야기다. 서사적 동물(animal narrans)인 인간은 새로운 삶의 형식들을 서사적으로 실현시킨다는 점에서 동물과 구별된다. 이야기에는 새 시작의 힘이 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모든 행위는 이야기를 전제한다. 이와 반대로 스토리텔링은 오로지 한 가지 삶의 형식, 즉 소비주의적 삶의 형식만을 전제한다. 스토리셀링으로서의 스토리텔링은 다른 삶의 형식을 그려낼 수 없다. 스토리텔링의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소비로 환원되기 때문이다. 우리로 하여금 다른 이야기, 다른 삶의 형식, 다른 지각과 현실에는 눈멀게 한다. 바로 여기에 스토리텔링 시대 서사의 위기가 있다.
--- p.136-137, 「스토리셀링」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