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서 제목인 ‘이불 속에서 봉기하라’는 이불 속에서 꼼짝하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 지었습니다. 괴로움에 휩싸여 눅눅한 이불 속에서 몸부림치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을 돌아보며 힘없이 주먹을 쥡니다. 지금 죽어버릴까 문득 생각하며 무의미하게 SNS를 계속 봅니다. 저는 바로 그런 사람과 연대하고 싶습니다. 함께 이불 속에서, 괴상한 존재로서 사회에 들어앉아, 괴로운 신음 소리에서부터 모든 것을 시작합시다. 저는 분통 터지는 진흙탕 속에 있는 당신과 손을 잡아보고 싶습니다
--- p.17~18
운동에서 ‘했는가, 안 했는가’를 추궁하는 것은 정말로 난센스다. 가령 시위에 참여했는가, 안 했는가. 조직 선전 활동을 했는가, 안 했는가. 이처럼 행동을 기준으로 사람을 둘로 나누어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의 하위로 보는 발상을 나는 부정하고 싶었다. ‘움직일 수 있는 사람’만 칭찬받는 혁명은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을 싹둑 잘라서 내버린다. 그로써 사회가 변한다 해도, 그 자리에 나타나는 것은 새로운 마초이즘의 ‘제국’이 아닌가? 이불 속에 웅크린 사람을 끌어들이지 못하는 혁명은 나의 혁명이 아니다. 이는 온갖 차별을 부정하고 약한 삶을 옹호하는 페미니즘으로부터 배운 점이다.
--- p.39~40
내가 결혼을 싫어하는 이유는 국가에 사적인 관계를 신고해서 승인을 얻는 행위에 대한 불쾌함에 더해, 가족 재생산이 가능하다고 간주되는 관계에만 사회적 특권을 부여하는 시스템이 마음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또 남성이 아닌 상대와 (연애 감정이 아니라 해도) 강한 마음으로 연결되어 있는, 내 눈으로 본 현실의 사람들에게 아무런 사회보장도 없다는 사실에 대한 분함이 나로 하여금 결혼을 거부하게 만들었다. 다시 말해 결혼에 대한 내 생각은 나의 섹슈얼리티와 깊게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 나는 나의 섹슈얼리티를 언어로 표현해야 한다고 충동적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그 충동을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
--- p.52
“죽여버릴 거야”가 넘쳐난다. 살의는 문을 닫은 방을, 몸과 마음을 가득 채워 목이 메게 만든다. 나는 그것을 필사적으로 토해내야 한다. 삼켰을 때와는 다른 형태로, 먹이를 비축하는 땅벌처럼 그것을 잘게 씹어 언어로 성형해야 한다. 내가 잘게 씹은 미트볼이 언젠가 세상을 바꿀지도 모른다. (…) 내가 여기에 쓸 수 있는 말은 하나다. 만약 지금, 누군가를 죽여서 ‘모든 것을 끝낼’ 작정인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살의와 다른 형태로 함께 싸우고 싶다. 함께 화를 내자. 나의, 그리고 당신의 살의는 사람을 살리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
--- p.65~66
시스터여, 나는 언제나 당신들에게 미치자고, 돌아버리자고, 폭동을 일으키자고 호소하지만 그것이 역시 힘들고 괴롭다는 점도 안다. 실은 미치지 않아도, 돌지 않아도, 날뛰지 않아도 마음 가는 대로 길을 선택해 죽음의 그림자나 뼈를 밟는 소리를 겁내지 않고 걸어갈 수 있다면 그것이 틀림없이 좋은 일이다. 그런 일이 가능해져야 비로소 그 길을 함께 걷는 타자가 몰라보게 늘어날 것이다. 그것이 나의 길이 아니라 해도 수많은 여성, 수많은 퀴어 들이 마음 편히 나란히 서서 걸어갈 수 있는 길이 이 세상에는 훨씬 많이 필요하다. 현재로서는 도무지 충분하지 않은 것이다. 나는 언제나 그 점이 분해서 견딜 수 없다. (…) 이야기가 필요하다. 여자와 여자의, 퀴어와 퀴어의. ‘여기에 길이 있어’라고 이야기할 언어가 이 세상에는 너무도 부족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격렬한 불길의 소용돌이부터 버스 정류장 벤치에 이르기까지, 모든 풍경을 다시 이야기해야만 한다. 한두 개로는 부족하다. 몇천 개, 몇만 개가 필요하다.
--- p.110~111
요컨대 내가 상상하는 것은 자신의 외모를 싫어하는 채로도 쉽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다. 이 세상은 외모에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며, 외모가 인간의 생존 문제에 너무 깊게 침투해 있다. 해체해야 할 것은 이 부분이다. 토마토가 싫다는 이유로 죽을 만큼 괴로워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데, 자신의 외모가 싫다는 이유로 죽을 만큼 괴로워하는 사람은 수없이 많다는 것은 분명 이상한 일이지 않은가? 외모의 사회적 의의가 한없이 가벼워질 때야말로 우리─굳이 우리라고 말하련다─의 호흡은 비로소 편해질 게 아닌가!
--- p.132
아름다움과 추함의 게임판을 무한히 만들어내는 것 말고는 우리에게 길이 없는 것일까? ‘자기 긍정’의 감방에서 빠져나와 추한 채로, 이해할 수 없는/이해받지 않는 존재인 채로 그냥 거기에 존재할 수는 없을까?
--- p.140
이불에 엎드려 얼굴을 내내 파묻은 채로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누군가가 말해주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괴로운 처지에 있는 사람과 나는 언제나 함께하고 싶다. 내가 바로 그렇기 때문이다. 봉기를 위해 필요한 것은 그 생명 단 하나이지 않은가. 우리─굳이 우리라고 말하겠다─는 이미 이곳에 있는 이상 존재에 트집을 잡힐 여지가 없다. 그 이상의 것은 기본적으로 전부 옵션이며, 사회로부터 위협적으로 행동을 요구받는 것은 원래 이상한 일이다. 아무리 움직이지 못하더라도 지금 거기서 사회와 마찰을 느끼며 존재하고 있다면 나는 그 생존을 실컷 축복하고 싶고, 그 뒤로 이어지는 생존 자체를 저항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눅눅한 이불 속에서 힘없이 쥔 그 주먹을, 나는 절대적인 봉기의 증표로 인정하고 싶다.
--- p.157~158
아무것도 하지 못해도 당연히 살아 있어도 되고, 몸을 둘 곳 역시 잃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세상은 쓸모없는 사람에게 차갑다. 쓸모없는 사람에게 차가운 세상은 옳지 않다. (…) 통속 도덕이 가로놓인 사회에서는 어쨌거나 열심히 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고, 성공하지 못하면 모든 게 ‘본인의 노력 부족’으로 귀결된다. 돈이 없다고요? 게으름을 피운 게 아닙니까? 병에 걸렸다고요? 건강 관리를 못한 당신 잘못 아닙니까? 가족들 사이가 나쁘다고요? 효도를 안 해서 그런 게 아닐까요? …전부 그럴 리가 없다. 이 세상에는 개인의 노력으로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일이 차고 넘친다. 아니, 그보다 일단 노력을 누구나 할 수 있는 행위로 보는 것도 틀린 생각이다. 체력도 정신력도 운도 환경도 자신의 힘으로는 마음대로 조종할 수 없는 요소이며, 동시에 이들은 개인의 행동에 늘 영향을 준다. 노력하려고 해서 그게 되는 것도, 노력하려고 했는데 그게 되지 않는 것도 개인의 능력만으로 설명을 끝낼 일이 아니다.
--- p.163~164
설령 ‘참된 자신’을 확신할 수 있는 순간이 인생에서 찾아오지 않거나 또는 그것을 추구하는 경험을 하지 못한다 해도, 그 생에 대해서도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고 싶다. 극적인 일도 없고, 툭하면 헤매고, 나약하고, 주저하고, 종종 떳떳하지 못한 기분과 고독에 짓눌리는 생존을, ‘생’과 동등하게 존귀한 혁명 전야의 신체로서 인정하고 싶다. 아마 누구보다도 나 자신을 위해.
--- p.172
역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채로 있는 건 괴롭고 분하다. 심정상 어떻게도 해결하기 힘든 일이 있는 이상, 더더욱 언어를 통해 나 자신의 괴로움을 거듭 허용해두고 싶다. 실제로 어려운 일이다. 진흙처럼 이불 속에 뭉개져서 대낮까지 자고, 부모님이 차려준 밥으로 살아 있는 것이 정말로 면목 없다. 하지만 지금 상황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역시 소극적으로 멍하니 생존에 매달려 있는 상태를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수밖에 없다. 아무리 진흙이라 해도 생존을 손에서 놓지 않는 선택은 훌륭하다. 너무나도 장하다.
--- p.198~199
자신이 어떤 것에 대해 무엇을 느끼는지를 치밀하게 언어화하는 작업, 자신의 우주를 개별적이고도 구체적인 것으로 재인식하는 작업을 당연한 일로 여기며 게으름 부리지 말고 해나갈 필요가 있다. (…) 그때그때 가장 불안하게 여기는 것에 대해 글로 쓰면 가슴속 응어리가 조금 풀린다. 오늘 밤은 어젯밤보다 조금 낫다.
--- p.227
풍경을 쉽게 받아들이지 마라. 풍경에 잡아먹히지 마라. 풍경이 바뀌는 상상을 멈추지 마라. 풍경 속에 있는 자신을, 풍경을 풍경으로 만드는 자신의 내면을 의식하라. 아무것도 못 한다고 느끼는 시간에도 우리는 풍경의 일부다. 그러므로 불의를 미워하고 혁명을 믿으며 살아가는 것은, 이미 저항이다.
--- p.236
거대한 의례 공간으로서의 사회에 저항하려면, 예컨대 갑자기 의미 없는 말을 외치거나 집에 가는 길에 불현듯 신발을 벗는 등 사회 속에서 상정된 행위의 바깥으로 일탈하는 행위가 중요하다고 본다. 결국 대화를 할 때든 이동할 때든, 생활 속에는 ‘일반적으로 이렇게 한다’라는 명문화되지 않은 규칙이 숨어 있고 그것들이 어딘가에서 누군가를 궁지로 몰아넣는다. 온갖 것들이 밈처럼 변한 사회란 결국 ‘일반’밖에 허용하지 않는 사회, ‘이상(異常)’을 배척하는 사회가 아닐까. 살의, 분노, 짜증은 자신의 목을 조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유연 체조에 써야 한다. 아무도 하지 않는 이야기를 하고, 싫은 것이 무엇인지 큰 소리로 지적하고, 의례에서 도망가고, 아무런 예고 없이 내달린다. 질서 역시 오래된 아파트의 벽지처럼 매일 가장자리부터 손톱으로 조금씩 뜯어내면, 언젠가 전부 훌렁 벗겨질 날이 올 것이다.
--- p.254
나는 내가 만난 죽은 이/타자를 내 나름대로 짊어지고 목소리를 내고 싶다. 내 나름대로밖에 짊어지지 못한다 해도, 짊어질 수 있는 범위 내에서는 성실하고 싶다. 아나키(anarchy)란 보이지 않는 타자의 의지를 존중하는 일이다.
--- p.301
나는 독자 여러분을 삶으로 선동한다. 그리고 당신의 삶이 다른 누군가를 삶으로 선동할 가능성을 믿는다. 이는 결코 삶을 선, 죽음을 악으로 나누는 사상이 아니다. 나는 죽음이 얼마나 매력적인 선택지인지,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죽음에 평온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럼에도 여전히 괴로운 삶으로 헤쳐 들어가는 길에야말로 사회를 변화시킬 힘이 있다고 말하고 싶다. 생존은 저항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나의 이기심으로 당신이 살아 있기를 바란다. 이 책의 모든 것은 그 때문에 존재한다.
--- p.303~304
신체에 직접적으로 가해지는 폭력이든 시스템적으로 일어나는 폭력이든, 또는 왜곡된 인식과 사회 분위기로 인해 발생하는 폭력이든, 반격하기 힘든 거대한 폭력을 당해 한없이 무력해지는 경험은 불행히도 현 사회에서 그리 드물지 않다. 저자는 이불 속에 웅크려 힘없이 주먹을 쥐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런 이들을 향해 그래도 살아남으라고, 저항하라고, 그래서 몇 번이든 만나자고 힘주어 말한다.
그러므로 이 책은 선동문이다. 저자 스스로도 망설이고 실패하고 다시 쓰며 겨우 완성해낸 기나긴 선동문이다. 나는 저자와 마찬가지로 이 책을 읽는 분들이 저자가 말하는 ‘혁명’에 기꺼이 휩쓸려주기를 소망한다. 그것은 결코 대단한 행동이나 거창한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 아니다. “아무리 움직이지 못하더라도 지금 거기서 사회와 마찰을 느끼며 존재하고 있다면”, 그 생존 자체가 저항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일단은 살아남자.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일에서부터 혁명을 시작하자.
--- 「옮긴이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