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는 적멸하고 인류는 사멸합니다. 그러나 이 멸망해가는 우주와 인류 간에도 영구불멸의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신념이요 지성(至誠)이요 진리요 사랑이외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멸망해서 자취를 찾을 수 없으나 그대로 인간에게 남아 있는 것은 사랑입니다. 우주 건설의 전초가 사랑이요 지지가 사랑이요 인생의 토대가 사랑이외다. --- pp.23~24
사람 사람마다 잠시 사랑이라는 것을 맛보고는 그것이 전체의 사랑인 줄로 오해합니다. 그래서 혹은 실패니 실연이니 합니다. 참으로 우스운 것입니다. 사랑은 무한대이외다. 사랑은 무한대이외다. 아름다운 K양이여, 아무쪼록 이 혼돈한 사회에서 아름다운 구원의 여성이 되기를 바랍니다. 비록 남녀의 갈피는 있으나 이 긴 편지를 사랑으로 받으세요. --- p.27
‘단발’은 여자에 있어서도 남자에 있는 것과 같이 서슴지 않고 실행하여도 무방할 것입니다. 또 단발을 한다고 여자의 미를 손실하는 것도 모름지기 없을 터인즉 사람의 형체에 따라서는 한 개인을 미화하는 화장(化粧)도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단발을 하였다고 그 경우와 필요를 사회에서 특별히 논의해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겠습니다. --- p.53
당신들은 나를 비웃기 전에 내 운명을 비웃어야 옳을 것이다. 나는 이 지경에 겨우 이르렀어도 힘 있는 대로 싸워왔노라. 아아 벗들이여, 더러운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그 동안에도 합해질 여러 냇길과 강과 바다와 가늘게 굵게, 짧게 길게, 머물렀다 급했다, 천천했다, 모든 일이 당연한 듯이 서로서로 합해도 지고 갈리워도 졌으리라. 그동안에는 너희들 중 한 여인의 말과 같이 깨끗하던 것이 더러워지고 더럽던 것이 깨끗해도 져서 내[川]가 되고 바다가 되고 또 짜지기도 했을 것이다. --- p.65
하나 언니여 슬프지 않습니까. 사랑은 지극히 드물게 있습니다. 사람의 인격 완성과 같이 드물게 있습니다. 아득거리고 변하고 속이는 것이 사랑이 아님은 당연합니다. 참사랑을 얻으면 노래하지요. 그때까지 밀어입니다. --- p.88
역시 나는 내 이상을 실현하자고 끊임없이 붓을 잡을 것이다. 아아 참 인생의 아득함이야 악마로다” 하며 그는 창백한 손가락으로 물끄러미 유리창에 쓰기를 “너희들 아무리 곤란하더라도 희망하여라! 보앙카레” 하고 굵고 튼튼히 하였다. 겨울날 맑은 빛이 빛나듯이 그의 눈에는 청신(淸新)한 빛이 빛났다. --- p.120
이제 막 우리의 숙제는 시작되었고 앞으로 긴 시간 계속될 것입니다. --- p.172
반복해 읽을수록 깊이를 더해가는 단어와 문장. 그것을 되뇌며 보낸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이었습니다. 이 낯선 단어가 품은 뜻은 무엇일까, 이 문장 속에 깃든 것은 어떤 마음일까. 김명순, 그를 헤아리는 시간이 좋았습니다. 다 좋았습니다. “차디찬 겨울의 따뜻한 꿈이로구나”(「시필」) 합니다.
김명순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지극히 적다. 근대 지식인들 중 눈에 띄는 여성 문인이라는 것, 여성 작가 최초로 창작집을 발간했고 여성해방을 부르짖었다는 것, 미완의 소설을 남기고 기록되지 않은 어느 날 영원히 눈을 감았다는 것 등등 그에 대한 기본적인 사실조차 모르는 이들이 태반이다. 나 역시 그랬다. 전업으로 소설을 쓰면서도 나는 김명순을 몰랐다. 그를 알게 된 건 여성 소설가로서의 나를 자각하게 되면서부터였다. 그의 목소리는 백 년이라는 긴 시간을 뛰어넘어 종이를 뚫고 나와 나의 심장을 깊숙이 찌르는 창이 되었다.
“네 길을 간다 할지라도 갈수록 남의 길일 것이며 남아 보이는 것이 학대일 뿐이니 (…) 네 몸 위에 값없이 던져지던 남의 생활의식 남의 감정을 전부 뽑아내어 던져라!”
서슬 퍼런 그의 목소리에 나는 어른의 길이라 퉁치고 살았던 날들이 부끄러웠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김명순은 말한다. “사랑이 끊긴다 하면 곧 죽음이요 멸망”이며, “사랑은 무한대”라고. 그를 다시 우리 눈앞으로 데려오는 것만큼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일은 없을 것이다. 한 명의 작가를 되살리는 일은 그가 품은 무한대의 사랑을 되살리는 일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