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아이를 기다리는 시간을 보내면서 나는 엄마와 할머니, 그리고 나보다 앞서 아이를 낳았던 집안의 여성들에 대해 생각했다. 선조들의 이야기를 알아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바로 그때였다.
--- p.12
에브라임에게 있어서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는 자신을 다른 무엇보다 사회주의자라고 정의 내렸다. 그는 모스크바식으로 모스크바에서 살고 있었다. 그가 유대 회당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로 한 이유는 단지 미래의 아내가 그것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었다.
--- p.19
“어이, 거기 유다.”
가는 길에 그런 소리가 들렸다. 개들이 뒤따르고 있는 남자아이들 한 무리가 라비노비치 가족을 향해 작은 자갈을 던지기 시작했다. 미리얌은 날카로운 돌에 눈 바로 아래 부위를 맞았다. 여행을 위해 차려입은 예쁜 원피스에 몇 방울의 피가 튀었다.
“별일 아니야. 그냥 멍청한 애들이야.”
엠마가 말했다. 엠마는 손수건으로 핏자국을 지워보려 했지만 미리얌은 눈 밑에 빨간 점이 남았고, 나중에는 검은색으로 변했다. 에브라임과 엠마는 미리얌을 안심시키려 했지만, 미리얌은 자신의 부모님이 ‘무언가’에 의해 위협을 받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 p.43
엠마는 이상하리만치 모든 게 완벽하다는 생각에 조마조마한 마음이 들었다. 반면 에브라임의 기쁨은 극에 달했다. 그의 두 딸은 이제 파리의 엘리트 계층에 속하게 되었다. ‘꼭 행인에게 자신이 키운 열매들을 자랑스레 보여주는 밤나무 같군.’ 내크먼이라면 그를 보고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 p.71~72
에브라임은 귀화 신청 절차를 진척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당국과 면담을 할 때마다 매번 한 걸음 뒤로 밀려나는 듯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매번 새로운 문제가 등장했다. 서류가 하나 빠졌다거나, 명확하게 밝혀야 할 사실이 생긴다거나 하는 식이었다. 에브라임은 면담 이후 어두워진 낯빛으로 집으로 돌아왔고, 고개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저으며 현관 입구에 모자를 걸어두었다. 아버지가 말했던 표현이 다시금 떠올랐다.
「한 무리의 군중에 속할 순 있어도, 그들 중의 진정한 한 사람으로 여겨질 순 없을 거다.」
--- p.94
「나머지 세상은 이전과 똑같이 흘러갔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잠자고, 필요한 만큼 휴식했다.…무심하다. 정말이지 무심하다. 두 눈을 감은 천진함과 순진함.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이 시각에도 우리는 평소처럼 토론하고, 소리를 지르고, 머리끄덩이를 잡고 싸우고, 또 화해한다.」
--- p.109
그해 8월의 마지막 날들은 그와 같은 행복한 순간들이 다시는 오지 않을 것 같다는 막연한 인상을 주었다. 태평한 나날과 무용한 순간이었다. 이제껏 경험한 모든 것들이 이미 사라져 버렸다는 불쾌한 감정이었다.
--- p.111~112
에브라임은 엠마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자신이 이제껏 지나왔던 길을 담은 풍경이었다. 그는 아내의 발을 잡았다. 가축용 객차의 추위로 인해 딱딱하게 얼어있었다. 에브라임은 따뜻한 숨을 불어넣으며 아내의 발을 녹였다.
--- p.232
히브리어 음조의 이 이름들은 마치 피부 아래에 있는 또 다른 피부 같아. 우리 이전에 존재했고, 우리를 초월하는, 우리보다 더 큰 역사의 피부. 나는 그것들이 어떻게 우리 안으로 ‘운명’이란 개념과 같이 혼란스러운 무언가를 들여보냈는지 알 것 같아.
--- p.395
나의 엄마 렐리아는 바로 그날,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1950년, 초등학교 안뜰에서. 그렇다. 일은 그렇게 일어났다. 갑작스럽고 아무런 설명도 없이. 엄마에게 날아왔던 돌멩이는, 엄마와 비슷한 나이대의 미리얌이 처음으로 가족들을 만나러 갔던 우쯔에서 폴란드인 아이들로부터 맞았던 돌과 닮아 있었다. 1925년은 1950년으로부터 그리 먼 과거가 아니었다.
--- p.563
데보라, 나는 ‘진짜 유대인’이라는 말이나, ‘진짜 유대인이 아니’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어요. 나는 그저 생존자의 아이일 뿐이에요.…죽음이 언제나 가까이 있는 것처럼 느껴져요. 먹잇감이 되었다는 기분을 떨칠 수 없어요. 종종 일종의 점멸에 처할 것 같다는 기분도 느끼죠.
--- p.564~5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