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늦었고, 끝내 막을 수 없게 되었지만 김종성 건축가는 코 밑으로 흘러내린 안경 너머로 우리를 담담하게 바라보며 “이번 논의와 노력이 현대건축물도 우리의 소중한 자산이구나, 지킬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만 심어줄 수 있다고 해도 다행”이라고 했다. 그가 옛이야기처럼 들려주는 ‘힐튼 이야기’는 그 담담함 덕분에 더 선명하고 안타깝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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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건축은 오랫동안, 조금씩 발전했지요. 정치, 경제의 격변기에 힐튼은 남산 자락의 랜드마크 노릇을 했어요. 나름의 이정표였습니다. 내가 1970년대 중반 한국에 들어왔는데, 긍지를 느끼는 부분은 힐튼의 시작과 끝이에요. 처음 하는 이야기인데, 플라자 호텔이나 롯데 호텔은 일본에서 설계했어요. 내가 미국에서 공부했지만, 힐튼은 한국 사람이 지은 첫 번째 대형 호텔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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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가르치던 앨프리드 콜드웰 교수가 졸업한 제자들에게 전화를 걸어 “여기 종성 킴이라는, 아주 가난한 나라 한국에서 온 학생이 있는데 그가 만든 건축 모형이 아주 훌륭하다. 한번 보러 왔으면 좋겠다”라고 했대요. ‘가난한 한국 학생’이란 말은 한두 번 들은 것이 아니야. 교수가 내가 가난하다는 것을 알았거든. 그래서 나만 재료비를 요청해 학과 예산에서 줬어요. 그 졸업 전시가 계기가 돼 설계 사무실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던 선배들이 나의 존재를 알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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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설계안에 대한 여러 이야기가 나왔는데 당시 정부의 공식 건축 담론은 어떻게든 한국의 전통을 반영하는 거였어요.
나는 당연히 반대했지. ‘힐튼이 독립기념관이면 한국의 전통을 생각하는 게 맞다. 하지만 이곳은 호텔이고 숙박 시설인데 무슨 전통이냐’ 하고 얘기했지. ‘그건 아니다’라고 의식적으로 저항을 한 거야. 큰 반대가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수월하게 통과됐어요. 그때 국토건설부 도시국장을 지낸 사람이 유 국장이라고(이름은 기억이 안나는데) 미국에서 공부한 분이에요. 나랑 같은 연배인데 내 의견을 타당하다는 쪽으로 받아들여 주더라고. 과정이 순탄하지는 않았지만 인허가 과정까지 거치고 나니 이 프로젝트를 정말 잘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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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멀리즘 같은 개념만 가지고서는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없어요. 풍부하고 정확한 사고와 숫자가 들어가야지. 반복적으로 시뮬레이션해 보면서 폭을 10cm 더 늘려 3.5m를 확보하면 어떤지, 거기에서 한 단계 더 넘어가 폭을 3.8m로 만들면 또 어떤지 끝없이 분석하지. 호텔업계에도 공간에 대한 통계치가 다 있어요. 오랫동안 가장 이상적이라고 정한 폭이 3.9미터, 약 13피트예요. 1970년대까지만 해도 이 숫자가 절대적이었는데 1980년대 중반쯤 되면서 방폭을 30cm 늘려요. 3.9미터(약 14피트)에서 4.2미터가 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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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서는 정말 자랑하고 싶은 게 박물관, 미술관, 음악당이 있다는 거예요. 미리 계획하지 않아도 어느 날 아침 신문을 보다가 내일 어디에 어느 악단이 온다고 하면 깜짝 놀라서 표를 사려고 가봅니다. 그러면 저렴한 표는 다 나가고 아주 비싼 표만 남았어. 표를 사서 음악회에 가요. 나는 시카고에서 교수 생활을 했기 때문에 거기서 나오는 연금이 있어요. 1년간 쓰는 예산의 25% 정도를 그 연금으로 해결하니까 나쁘지 않지. 돈을 쓰는 건 쓰라리지만(웃음) 그런 음악회를 접할 수 있는 게 얼마나 기쁩니까. 그리고 우리 집에서 길을 건너면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500m 걸어가면 구겐하임 미술관, 버스로 20분 거리에 모마가 있어요. 볼거리가 사방에 있으니 얼마나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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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내가 가르치던 일리노이 공과대학에 미스 반데어로에 소사이어티라고 있는데 거기서 5년째 이사로 봉사 활동을 하고 있어요. 스승님이 디자인한 건물이 일리노이 공과대학에 22개가 있거든. 그걸 유지·관리하는 임무를 맡고 있지요. 설계나 디자인과 관련해 캠퍼스를 안내하는 활동도 하고, 논의해야 하는 부분은 화상회의도 하고. 논문을 쓰는 후배들의 이런저런 질문에 꼭 대답을 해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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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튼 호텔이 올라가는 당시의 상황은 마디마디 영화 같은 구석이 있었다.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 장면이 그려졌고, 그것을 영상으로 만들 수 있다면 넷플릭스를 통해 바로 방영해도 될 것 같았다. 두 사람이 기억하는 그때는 한마디로 자부심의 시절이었다. 내가 이런 호텔 건설에 참여하고 있다는, 가슴이 빵빵한 채로 하루하루가 차곡차곡 쌓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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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에서 대우센터를 바라보면 오른쪽에 남대문경찰서, 왼쪽에 삼주빌딩이라는 오피스 빌딩이 있었어요. 그 뒤에 남대문세무서가 있고. 양동 전체를 빙 둘러 도로가 나 있었는데 그 일대를 정비해 도시 사업까지 진행하는 것이 애초의 목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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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힐튼 호텔이 오픈 세리머니를 했는데 당시 외국 브랜드의 호텔은 호텔리어 사관학교나 마찬가지였어요. 웨스틴 조선이 그랬고 하얏트도 유명했지요. 서비스며 운영 노하우가 한국하고는 완전히 달라 그런 매뉴얼을 받아 흉내 내듯 하나하나 배워나갔지. 힐튼은 대한민국 최초로 호텔 운영에 전산 시스템을 도입한 호텔이었어요. 당시 하얏트만 해도 객실 표시장에 딱지가 다 꽂혀 있었어요. 초록색은 더블 베드 룸, 핑크색은 싱글 룸. 객실이 600개에 이르는데 딱지 유무를 보고 그 방이 비어 있는지 손님이 있는지 알 수 있는 거예요. 계산도 다 손으로 계산기 두드려서 하고. 그런데 힐튼은 이 모든 걸 컴퓨터로 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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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면은 무엇을 그리고 적을지 오랫동안 고민한 후 마침내 선과 글자, 숫자를 정성 들여 기재한 듯 깨끗하고 말끔했다. 지우개로 지운 흔적 하나 없었다. 그 자체로 기록과 여백 간 비례와 균형이 맞아떨어지는, 호텔이라는 거대한 시스템을 구현하기 위해 치밀하고 정확하게 준비한 밑그림들. 트레이싱페이퍼에 잉크 펜으로 그린 스케치가 낯설면서도 매혹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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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튼 호텔 외관은 비례에 집중한 미니멀한 모습이지만 로비는 또 다른 느낌이에요. 대리석 계단이 아래층을 향해 미끄러지듯 이어지고, 브론즈로 만든 난간 손잡이 라인도 무척 아름답지요. 천창으로는 자연광이 쏟아져 들어오고요. 정인하 교수님의 연구에 따르면, 채광은 미스 반데어로에의 건축과 차별화되는 요소 중 하나였어요. 미스 반데어로에는 천창을 별로 안 썼는데 김종성 선생의 작업에는 넓고 환한 천창이 자주 보이지요. 경주의 우양미술관도 그렇고 육군사관학교 도서관도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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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두진 건축가는 건축계가 문화유산으로 지정할 만큼 가치 있는 건물을 보존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어떤 방법을 찾을 수 있는지 함께 고민하고 싶다고 했다. 힐튼 호텔의 생명을 더 이상 연장시키지 못한다는 최종 결론을 들었을 때는 ‘할 수 있는 것이 이것밖에 없나?’ 하고 무력감을 느꼈다고 했다. ‘이렇게 열심히 하면 그 너머엔 무엇이 있을까? 보존을 위한 무언가가 있기는 할까?’ 그럼에도 그는 계속해서 작은 공을 쏘아 올리리라 다짐했고, 이번 인터뷰도 그 의지의 연장선에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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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주장하는 바는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에 이룩한 건축적 성취를 보존하면서 개발업체의 이윤도 창출하는 윈윈의 대안을 고려해 보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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