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치 없는 후배와 그 후배의 입단속을 담당하는 선배. 둘은 이미 동아리 내에서 굳어진 만담 듀오 같은 관계였다. 편히 웃는 우리를 따라 두 신입도 눈치껏 경직된 몸을 풀었다. 전반적인 흐름은 나쁘지 않았다. 윤주가 이 질문을 하기 전까진. “근데 한경우가 누구예요?” --- p.17
“엄마, 우리가 소고기 못 먹는 이유가 뭐야?” “몸에 안 좋으니까. 참, 너 주말에 엄마랑 마트나 같이 가자. 보여줄 사람이 있어.” “그게 다야?” “그래, 삼촌 재혼 준비하는 건 알지?” “내 질문에 제대로 답부터 해줘. 자꾸 꿈에 소가 나온단 말이야.” --- p.38
나는 엄마에게 방금 아빠가 한 이야기가 무엇이냐 물었다. 엄마가 답이 없자 얼마 전 점집에서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으며 꿈에 자꾸만 소가 나온다는 말을 다시 한번 전했다. 악신과 저주. 믿고 싶지 않으나 나를 둘러싼 거대한 흐름이 존재하는 걸지도 모른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덧붙이자 엄마의 호흡이 불규칙해졌다. --- p.66
그러던 중에 멀리서 어떤 노인의 시선이 느껴졌다. 처음에는 우연히 눈이 마주치는 건가 싶었는데 반복적으로 힐끔거리며 나와 오빠를 살폈다. 둔한 오빠까지 시선을 느낄 정도가 되자 우리 또한 티가 날 정도로 노인을 응시했다. 그러자 노인은 기어코 구부정한 허리를 일으켜 우리 쪽으로 오고야 말았다. --- p.99
열어둔 문 너머로 찬 바람이 불어닥쳤다. 바람결에 숨어 있던 먼지가 눈에 들어가 나는 무의식적으로 눈을 비벼댔다. 눈을 다시 떴을 때 태석은 완전히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다. --- p.129
석구는 희영과 사는 한 평생 도를 닦아도 마음의 불안을 떨치지 못할 운명이었다. 그가 사랑의 감투를 쓴 고집을 선택한 이상 감내해야 하는 천수의 불행이었다. --- pp.151~152
결국 모든 건 처신을 잘못한 탓이었다. 까다롭지 못한 천성은 죄악이 됐다. 온몸을 짓누르는 고통을 심장에 각인하며 희영은 자발적으로 속박을 만들었다. ‘처신을 잘해야 해, 처신을…….’ --- p.171
정말 나의 잘못인가? 무당의 말처럼 진정한 속죄가 눈에 보이는 죄마저 초월하려는 마음이라면 간단한 확신 정도는 줘야 했다. 내가 정말로 뭔가를 사죄한다면 이 상황이 좋게 바뀔 거라는 확신 말이다. 나아지리라는 보장 없이 고개를 숙이라 윽박만 지르니 필적하지 못할 상대를 향한 미지의 공포와 불안 그리고 그만큼의 반감이 부풀었다.
일상적인 현실감으로 시작해 해가 지는 것처럼 서서히 어둠으로 빨려 들어간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흡인력 좋은 영화 한 편을 감상한 기분마저 든다. 종교, 샤머니즘, 복수, 애니미즘 등 소재만으로도 매력적인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오컬트 마니아로서 반가운 마음을 감출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