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15년 01월 0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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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396쪽 | 433g | 140*209*20mm |
ISBN13 | 9788925554990 |
ISBN10 | 8925554992 |
발행일 | 2015년 01월 0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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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396쪽 | 433g | 140*209*20mm |
ISBN13 | 9788925554990 |
ISBN10 | 8925554992 |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STONER)/RHK/김승욱 옮김』는 ‘1965년 미국에서 발표된 후, 오랜 시간 동안 독자들에게 잊힌 작품’이었다가 50년 후, 작가 존 윌리엄스가 세상을 떠난 지 20년 만에 비로소 제대로 된 세상의 평가를 받게되었다.(출판사소개) 초판이 출간 1년 만에 절판되었지만 2010년대에 와서 유럽 전역에서 재출간되며 역주행 베스트셀러 신화(출판사 소개)를 일으킨 작품이라는 특이점은 비현실적이다. 이 비현실성이 저자인 존 윌리엄스를, 그리고 주인공 윌리엄 스토너를 사라진 흔적으로써가 아니라 시간을 초월해 숨쉬는 인물로 불러낸다.
“윌리엄 스토너는 1910년, 열아홉의 나이로 미주리 대학에 입학했다. 8년 뒤, 제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그는 박사학위를 받고 같은 대학의 강사가 되어 195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강단에 섰다.”(p.8) 작품의 첫 문장은 책의 줄거리이자 그의 일생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 작은 농가에서 농부의 외아들로 태어나 아주 어려서부터 집안일과 농사일을 돕던 스토너는 ‘집에서 하는 어드렛일보다 조금 덜 피곤한 허드렛일을 하듯이 학교에서 공부’(p.10)를 한다. 날로 척박해가는 땅의 수확에 도움받기 원하던 아버지는 그를 컬럼비아의 농과대학으로 보낸다. 그는 처음 캠퍼스에 들어섰던 때를 잊지 못하듯 아처 슬론 교수의 영문학 개론 시간,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질문받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그후, “모르겠나, 스토너 군?”(p.31)하고 물었던 슬론 교수는 스토너를 새로운 세계, 문학의 세계로 이끈다. 문학은 이제 그에게 새로운 소명이 된다. 슬론 교수 덕분에 ‘처음 시작한 곳에서 다시 출발’(p.42)하는 기회를 잡고 ‘땅’에 메였던 부모의 기대와 행로로부터 다른 길로 들어선다.
‘무남독녀였기 때문에 일찍부터 고독이 삶의 일부로 자리 잡았’(p.79)던 이디스 보스트윅을 향한 스토너의 구애와 결혼은 자연스럽게 진행된 듯 보였다. 이디스의 어머니 보스트윅 부인을 보았을 때 스토너는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금방 알아차렸다.’(p.85) 습관적 불만과 앙심과 절망이 베어나오는 목소리까지. 그날 밤 ‘그는 어둠 속을 빤히 바라보며 자신의 삶이 왠지 낯설고 이상해졌다는 생각을 했다.’(p.88) 자신의 행동이 현명한 것인지 확신하지 못하던 그가 이 결혼이 실패작임을 깨닫는데는 한 달이 걸리지 않는다. 그녀와의 결혼 생활은 살얼음판처럼 위태롭고 낯설고 두려운 무엇으로 변해간다. 그 중에서도 가장 슬픈 것은 딸 그레이스 스토너, 태어나 처음 1년동안 오직 아버지의 손길과 목소리, 사랑으로만 자랐던 아이, 어린 아이였을 때부터 얼굴에 ‘그 내면에서 움직이고 있는 지성이 드러나’던 아이, 스토너의 서재에서 온전한 충만함으로 서로에게 기쁨이었던 아이와의 분리다. 이디스는 두 부녀를 있는 힘껏 떼어낸다, 전략적으로, 철저히.
이디스는 적의 얼굴을 하고 스토너를 공략한다. 그의 거처를 서재에서 일광욕실로, 결국 학교의 좁은 공동 연구실로 몰아내기까지 수위를 높여가는 행동은 충격적이다. 결국 ‘그래서 그는 가끔 이만하면 살 만하다고, 심지어 행복하기까지 하다’(p.180)고 생각하는 스토너의 포기와 수용과 합리화의 단계들은 독자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적의 얼굴이 이쯤에서 끝나면 좋으련만 스토너의 세미나 추가 수강을 요청하던 찰스 워커, 그의 지도교수이자 노골적으로 워커를 변호하면서 기이할 정도로 스토너에게 적대적이던 로맥스 박사까지 스토너를 이중 삼중으로 애워싼다. 부모님의 쓸쓸한 죽음 또한 물론이다. ‘이제마흔 두 살인 그의 앞날에는 즐겁게 여길 만한 것이 전혀 보이지 않았고, 뒤를 돌아보아도 굳이 기억하고 싶은 것이 별로 없었다.’(p.254) 그런 가운데 그의 세미나를 들었던 젊은 강사 캐서린 드리스콜과의 만남은 위안이고 다행이고 슬픔이며 그럼에도 다시 다행이 아니었나 하는 여러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이제 중년이 된 그는 사랑이란 은총도 환상도 아니라는 것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사랑이란 무언가 되어가는 행위, 순간순간 하루하루 의지와 지성과 마음으로 창조되고 수정되는 상태였다.’(p.274) 캐서린과의 마지막 선택 또한 서로에게 최선이었고 다른 여지는 없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고든 핀치의 사무실을 나선 순간부터 그는 알고 있었다. 존재의 작은 중심에서 자라난 무감각한 공간 속 어딘가에서 자기 인생의 일부가 끝나버렸음을, 자신의 일부가 거의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이라서 다가오는 죽음을 거의 차분한 태도로 지켜볼 수 있을 정도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p.301) 스토너는 ‘일이 망가질 것’을 ‘우리 자신이 파괴될 것’과 동의어로 생각한다. 그만큼 어느날 그에게 다가왔던 문학은 모든 것을 불구하고 지켜져야 할 가치이자 유일한 삶의 의미다. 그는 공격을 회피하는 법이 없다. 고통을 호소하는 법 없이 시선을 고정하고는 묵묵히 견뎌낸다. 그의 딸 그레이스 또한 그녀가 될 수 있었을 모든 가능성에 도달하지 못한 채 도망치는듯한 삶을 감수한다. 인간이 인간을 해롭게 하는데는 이유도 끝간데도 없어보인다. 작품의 마지막, 작가는 ‘죽음’을 묘사한다. 노쇠와 쇠약, 병과 죽음으로의 긴밀한 바통터치는 익숙하고 보편적인 경로를 보여주면서도 특별한 대단원의 막을 그려낸다. 이 마지막 장면들, 그 먹먹함은 『타타르인의 사막(디노 부차티/문학동네)』‘ 의 끝 페이지들을 연상시킨다. 조반니 드로고가 ’인류 공동의 적‘을 대면하는 순간의 밀폐된 공간, 드로고의 마지막 몫인 ’별들‘처럼 스토너는 ’그 자신의 책‘에 손을 뻗는다.
작가가 그려낸 윌리엄 스토너라는 인물은 무엇보다 ‘투명하다’는 단어의 인간화처럼 보인다. 그가 열정적으로 소망하는 순간이나 무기력하게 구석으로 내몰리는 순간이나 스토너는 외부의 것들을 투명하게 통과시킨다. 스토너를 통과해 곧바로 독자에게 닿는 충격은 그래서 더 이상 캐릭터의 것, 작중 인물의 것이 아니고 아림과 통증으로 되살아나고 증폭된다. 왜 이런 일이,이럴때는 어떻게 등의 대안과 처방과 방책을 끌어모으다가도 기대했지만 헛될 수 있고 헛되리라는 ‘인간 조건’을 인정하게 만든다. “그는 온전한 순수성, 성실성을 꿈꿨다. 하지만 타협하는 방법을 찾아냈으며, 몰려드는 시시한 일들에 정신을 빼앗겼다. 그는 지혜를 생각했지만, 오랜 세월의 끝에서 발견한 것은 무지였다.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그는 생각했다. 또 뭐가 있지? 넌 무엇을 기대했나? 그는 자신에게 물었다.”(p.388) ‘넌 무엇을 기대했나?’ 그의 마지막 성찰은 시처럼 노래처럼 유연하게 흐른다. 어쩌면 그를 처음 이끌었던 ‘소네트’만큼이나 완벽하다. 역자가 인용한 작가 인터뷰에처럼 스토너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그 일에 애정을 갖고 있고, 의미도 있다고 생각했다(p.395)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작가는 그를 ‘진짜 영웅’으로 생각했다고 밝힌다. ‘진짜 영웅’,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사랑이었건 고난이었건 불평도 핑계도 없이 감당했던 스토너는 그런 면에서 영웅이었음은 분명하다. 또 한 편의 시처럼,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가 적절한 인사인지 모르겠다.
문학, 언어, 정밀하고 기묘하며 뜻밖의 조합을 이룬 글 속에서 그 무엇보다 검고 그 무엇보다 차가운 글자를 통해 저절로 모습을 드러내는 마음과 정신의 신비, 이 모든 것에 대한 사랑을 그는 마치 위험하고 부정한 것을 숨기듯 숨겨왔지만, 이제는 드러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그러다가 대담하게, 종내는 자랑스럽게.(p.159)
그는 다시 숨을 쉬었지만, 그의 몸 안에서 뭐라고 꼭 집어 말할 수 없는 차이가 느껴졌다. 자신이 뭔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떤 지식 같은 것을. 세상 모든 시간이 자신의 것인 양 느긋해도 될 것 같았다.(p.390)
하지만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원한다면 그들을 무시할 수도 있었다. 세상의 모든 시간이 그의 것이었다. (p.391)
어떤 이의 지난한 삶이 감동을 불러일으키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누구나의 삶 역시 마찬가지로 지난하고 고단하기 때문이다. 행복은 남의 것이 커 보이지만 고난과 역경은 내 것이 더 크게 보이는 까닭이다. 고귀하고 특별한 삶을 바라지만 종래에는 고만고만하게 시류에 휩쓸려 살아왔음을 다행으로 여기기도 한다.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삶에는 언제나 기대라는 몹쓸 녀석이 따라붙는다. 때로는 희망이라는 명목으로 포장해서 기대치를 한껏 상승시키기도 한다. 그게 우리가 삶에 임하는 자세이기도 하다. 아니 그렇게 믿어왔다. 윌리엄 스토너,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이렇게 단조로운 삶도 있을까. 소설을 읽는 독자의 시선으로 보이는 그의 삶은 지극히 단조로웠다. 물론 그 나름대로는 자신의 삶에 치열하게 임했던 건 사실이다.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평생을 영문학 조교수로 책과 공부에 파묻혀 살아갔던 사람이다. 이 삶 안에 학문을 향한 신념과 불꽃같이 타오르던 사랑, 동료 간의 암투(거의 일방적인)도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게 스토너라는 사람에게 투과되면 소소하고 평면적인 인생의 한 '과정'이 될 뿐이다. 철저하게 자기 신념으로, 그저 지극히 자연스럽게 거쳐 가야 하는 하나의 여정쯤으로 여기고 마는 그의 행동을 바라보는 내가 오히려 슬퍼질 뿐이었다.
넌 무엇을 기대했나?
죽음을 앞에 두고 스토너는 자문한다. 묻고 싶었다. 그래, 당신은 뭘 기대한 건가. 아니면 아무런 기대도 없었기에 인생의 굴곡을, 평생을 따라다녔던 동료 교수의 시기와 위협을, 아내의 히스테릭을 아무렇지도 않게 참아내고 견뎌냈던 건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시골의 농부로 살아갈 뻔했던 스토너였다. 그런데 영문학개론 수업을 통해 '문학'에 눈 뜨고 새 삶을 살기를 결심한다. 누구에 의해 정해진 삶의 길이 아니라 본인이 좋아하고 하고 싶은 것을 갈고 닦는 삶의 길을 택한 것이다. 단지 좋아하고 하고 싶어서 열심히 했고 충실한 삶을 살아갔을 뿐이었다. 첫눈에 반한 아내 역시도 그의 선택에 의한 결정일뿐이었다. 하나 그가 선택했던 것들이 주는 시련은 몇 배의 고통과 절망의 무게로 삶의 뿌리까지 뒤흔들고는 했다. 적어도 내가 바라보기에는 그랬다. 그러나 스토너는 이 모든 것을 관조적인 시선으로 묵묵히 받아들이고 감수한다. 어떻게 보면 삶에 대한 열의가 없기에 모든 일에 초연할 수 있었던 건가, 같은 섣부른 생각을 하게도 한다. 아니었다. 누구보다 삶을 뜨겁게 바라보고 신념이 투철했기에 가능했던 인내였다. 부귀영화를 바라지도 않고 드높은 명성과 권력을 바라지 않았다. 원하고 좋아하는 문학에 투영된 삶을 살아갈 수만 있다면, 그래서 자기가 습득한 것을 누군가에게 전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만족하는, 괜찮은 삶을 살았다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스토너다.
그래서 한 달 만에 실패했다고 결론 내린 결혼일지라도 아내가 있는 그가 캐서린과 사랑에 빠졌을 때 참으로 놀라웠다. 모든 일을 그저 묵묵하고 담담하게 수긍하며 인내하는 사람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안에 본인도 미처 알지 못했던 열정을 발견하는 시간이었으니까. 책을 읽으며 가장 감정 이입이 됐던 부분이기도 했다. 이제까지 알던 스토너라는 사람과 전혀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랑의 끝은 결국 그답게 끝맺지만 말이다. 삶을 뒤흔드는 순간은 언제나 가까이 근접해있다. 가만 보면 스토너의 평생, 그의 의지대로 오롯이 이뤄진 일은 학업과 지도자의 길을 향한 신념 정도였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길의 여정도 녹록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토록 태연한 양반이라니! 마치 삶의 모든 과정을 초월한 사람처럼, 담담히 인내하는 그가 참 많이 답답해 보인 것도 사실이다. 왜 아니겠는가. 누가 보아도 자기 삶과 본분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고 있는데도 주변 사람 대부분이 훼방만 놓았으니 말이다. 그조차도 삶의 과정처럼 껴안는 모습이 미련해 보이면서도 대단하게 여겨지는 부분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못하겠다. 나는 과연 스토너의 상황에 놓인다면, 그처럼 태연하게 참아낼 수 있을까. 아니 삶에 있어 지나쳐야 하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라고 받아들이고 승복할 수 있을까. 시간이 흐른 후에는 가능하겠지만 직접 겪고 있는 상황에서는 그처럼 수용하기란 쉽지 않을 것 같다. 오히려 상실감에 사로잡혀 한없는 심연 속으로 침잠하고 말 것 같다. 삶을 향한 기대와 정반대로만 흘러가고 있다고 생각할 게 뻔하니까 말이다.
삶을 향한 기대는 언제나 평행 선상을 달린다.
삶에 기대를 품지 않으면 열정은 모습을 감춰버린다. 반면 기대를 품을수록 높은 이상향에 허우적대는 광경을 보게 된다. 하지만 기대감이 있기에 추동하는 삶이 된다는 걸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누구나 마음으로 바라는 이상향의 삶이 있다. 어디까지나 이상적으로 상상하는 풍경 같은 삶 말이다. 때로 이 이상향은 세상의 흐름과 맞물려 마찰하고 날개를 꺾여버리기도 한다. 소설이 그리는 시대적 상황인 양차 대전과 대공황 상황이 그러하다. 스토너는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동료가 자원입대하는 순간에도 대외적인 수순을 따르기보다 자신의 길을 향한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동료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면서도 말이다. 보통의 사람은 대외적 명분을 따르기에 급급하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스토너의 삶은 일반적으로 추구하는 삶과는 간극이 있다. 멀리서 바라보면 특별하게 명성을 얻은 삶도 아니고 행복한 삶도 아닌 건 분명하다. 가까이서 바라보면, 그러니까 스토너 개인의 영역 안에서 바라보면 자기 자신은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삶이었기에 나쁘지 않은 삶이었나 보다 정도가 된다. 먼 훗날, 삶의 끝에서 내 삶을 바라봤을 때 이런 만족과 받아들이는 자세가 된다면 충분하지 않을까, 바람을 가져보기도 한다. 무엇보다 어떤 풍파에도 휩쓸리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죽을 때까지 하면서 살았다는 게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귀감이 될 만하다. 그래서 출간된 지 50년이 지난 뒤에야 입소문을 타고 현대인의 삶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게 아닐까. 지금 내게는, 내가 기대하고 상상했던 삶이 있고 현실의 삶이 있다. 하지만 기대와 상상은 어디까지나 기대치로 남아 있을 뿐이다. 삶을 향한 기대는 불가항력이며 그 기대치가 한껏 충족되기도 어렵다. 다만, 언제까지나 삶과 함께 평행 선상을 달린다.
우리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스토너>(알에이치코리아, 2015)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는 1965년 미국에서 발표된 후, 오랜 시간 동안 독자들에게 잊혀졌다. 작가는 미국 텍사스주에서 1922년에 태어나 세계 1,2차 대전을 직·간접 적으로 겪었다. 특히 세계2차 대전은 공군으로 참여했다. 전쟁을 참여하면서도 덴버대학에서 학사와 석사를, 미주리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덴버대학으로 돌아와 문예창작을 가르치는 교수로 활동, <스토너>외에도 3권의 소설과 두 권의 시집을 발표했다. 그리고 94년에 세상을 떠났다. 작가의 삶 이후에 <스토너>가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 스토너가 독자들의 삶을 바라보게 했기 때문이다.
<스토너>는 윌리엄 스토너가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문학을 사랑했으며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고자 했던 내성적인 한 남자의 일생을 그린다. 주인공의 강력한 무기는 근면과 성실이다. 아버지의 권유로 집에서 멀리 떨어진 농과대학에 입학하지만, 셰익스피어가 말을 걸어오는 것을 뿌리치지 못하고 영문학으로 전공을 바꾼 후 대학에서 벗어나지 않는 삶을 산다. 이를 두고 미국 배우 톰행크스는 “이것은 그저 대학에 가서 교수가 된 사람의 이야기 일 뿐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매혹적인 이야기다.”라 밝혔으며, 이 밖에도 유명·문인들이 극찬을 아끼지 않은 작품이다.
스토너에게 대학은 도피처와 같았다. 부모님에 의해 지적 호기심을 채우기도 하지만, 친구들이 전쟁에 참여할 때도 스토너는 대학을 지켰다. 첫 눈에 반해 시작한 결혼생활은 한 달 만에 실패를 인정했다. 실패를 인정하면서 그는 침묵을 배웠다. 그리고 한 발자국 떨어져 가족을 지켜본다. 그의 아내 이디스는 토너를 남편이 아닌 자신의 욕구를 채워주는 한 사람으로 보는 듯하다. 이디스가 자신만의 세상에서 나오지 못한 탓도 있지만, 스토너의 일방적인 사랑으로 인한 피해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스토너는 지적 호기심으로 영문학 연구와 교수법으로 이어졌고 저술활동까지 하게 됐고, 대학에서 조교수로 활동한다. 도피처였던 학교는 스토너를 배신하지 않은 유일한 공간이기도 하다.
이런 스토너가 딸이 태어나면서부터 바뀌었다. 자신의 딸 그레이스를 가르치면서 자신을 돌아보게 됐고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다. 스토너는 ‘성찰하는 버릇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의도와 동기를 찾아 헤매는 일이 힘들 뿐만 아니라 살짝 싫다는 생각’(p.55)도 했다. 이는 딸이 태어나면서부터 바뀌었고 이러한 과정은 스토너의 내면을 단단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딸에게 가르침은 이디스에 의해 단절됐다. 딸과 아버지와의 관계를 엄마가 질투한 것이다. 이디스는 딸에게 집착한다. 자신의 삶을 되물림 해주고 싶은 마음인가보다. 가족관계가 단절될수록 스토너는 학업에 집중할 뿐이다.
건조한 스토너 일상에도 단비가 내린다. 진짜라고 느끼는 사랑이 찾아온 것이다. 금지된 사랑일 수 있다. 자신의 제자였기 때문이다. 제자 캐서린 덕분에 “사랑은 종착역이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라는 것.”(p. 272)라 알게 된다. 주인공은 사랑을 통해 인간적인 따스함을 느끼지만, 때는 늦었다. 학교와 이디스가 그들을 놔두지 않았다. 스토너는 캐서린의 퇴장으로 이유 없는 열병을 앓게 된다.
소설은 스토너의 죽음을 암시하며 끝난다. 소설 속에 죽음은 네 번 등장하는데, 첫 번째는 그의 동료였던 “우리는 실패자”라 말한 매스터스다. 전쟁에 참여한 매스터스의 죽음은 ‘인정하기 싫을 만큼 충격적‘(p.59)라 밝힌다. 두 번째는 스토너를 강단에 세운 독일 교수 아처 슬론의 사망이다. 독일의 폐망소식이 후 쇠약해져 자신의 의지로 심장을 멈춘 것 같다고 표현한다. 교수의 사망은 “세상에 뿌리부터 배신당해 더 이상 참고 살아갈 수 없게 된 그의 마지막 선택”(p. 127)이었다고 생각한다. 세 번째는 자신의 부모님이다. 부모님은 “즐거움 없는 노동에 평생을 바쳤다. 그들의 의지는 꺾이고, 머리는 멍해졌다.”(p.153)이라 말하며 부모님은 자신들이 일군 땅의 무의미한 일부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죽음은 개인이 선택할 수 없다. 그렇기에 스토너의 주변 사람들의 죽음은 유의미했다. 그가 책과 함께 교수의 삶을 살았지만 남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지식에 다가갈수록 공허함과 무지를 느꼈다고 말한다. 이처럼 표현에 서툴고, 관조적인 삶을 사는 스토너를 바라보면서 답답하거나 비겁하다고 느끼는 독자도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스토너’라는 인물을 설정했을까? 이에 작가는 “윌리엄 스토너는 젊은 동료들이 잘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세상을 알고 있었다. 그의 마음속 깊은 곳, 기억 밑에 고생과 굶주림과 인내와 고통에 대한 지식이 있었다. 그가 분빌에서 농사를 지으며 보낸 어린 시절을 생각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지만, 무명의 존재로서 근면하고 금욕적으로 살다 간 선조들에게서 혈연을 통해 물려받은 것에 대한 지식이 항상 의식 근처에 머무르고 있었다. 선조들은 자신을 억압하는 세상을 향해 무표정하고 단단하고 황량한 얼굴을 보여주자는 공통의 기준을 갖고 있었다.”(p.309)라고 말한다. 결국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방법으로 자신만의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65년에 발표된 소설이 왜 지금에 읽히는 것일까? 스토너는 누군가의 삶을 대신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또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 있지만 외부 조건에 의해 끊임없이 타협하는 독자일 수도 있다. 어쩌면 작가가 추구한 삶이 스토너 일지도 모른다. 혹은 무언가를 향해 더 열심히 성실하게 달려온 독자일 수도 있다. 스토너는 매스터스가 말한 ‘실패’한 삶을 살았을까? 작가는 삶에 실패와 성공을 말하지 않는다. 개인의 선택이 주어지지 않은 죽음 앞에서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묻고 있다. 그리고 “죽음은 이기적이라며, 죽어가는 사람은 혼자만의 순간을 원한다.”(p. 390)고 말한다. 스토너는 죽음 앞에서 자문한다. “넌 무엇을 기대했나?”(p. 282)라고. 이에 독자는 어떤 삶을 살고있는지, 어떤 기대를 하고 있는지 답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