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06년 11월 2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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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185쪽 | 362g | 크기확인중 |
ISBN13 | 9788934921271 |
ISBN10 | 8934921271 |
발행일 | 2006년 11월 2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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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185쪽 | 362g | 크기확인중 |
ISBN13 | 9788934921271 |
ISBN10 | 8934921271 |
지식인마을로의 초대 그대 아직 꿈꾸고 있는가? 지식인과의 만남 1장 안다는 것, 즉 지식이란 무엇인가? 지식을 찾는 사람들 ㅣ ‘지식’과 ‘지식이 아닌 것’의 차이 2장 의심하는 그들, 데카르트와 버클리 데카르트를 아시나요? ㅣ 퀴즈로 풀어보는 버클리 3장 확실한 지식을 찾아내려면? 뿌리 깊은 지식 l 의심하고 또 의심하라 ㅣ 긍정적 의심 4장 올바르게 의심하는 방법 네가 느끼는 것을 의심하라 ㅣ 꿈인지 생시인지 의심하라 ㅣ 악마의 장난을 조심하라 5장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속기 위한 마음의 자세 ㅣ 코기토, 에르고 숨 ㅣ 2% 부족한 데카르트 ㅣ 시작은 창대하였으나……. ㅣ 몸 따로 정신 따로 6장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 저 사과가 진짜 존재하는가? ㅣ 사과를 느껴보자 ㅣ 사과 자체와 내 느낌은 어떻게 다를까? ㅣ 세상을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을까? ㅣ 버클리 일병의 실재론 구하기 ㅣ TV 프로그램을 송신하는 신 ㅣ 미궁에 빠진 버클리 7장 그래서 누가 회의론자인가? 지식토크, 테마토크 철학자들의 엽기발랄 채팅방 이슈@지식 지식은 경험에서 오는가, 이성에서 오는가? 그 후 회의론은 어떻게 되었을까? 징검다리 같이 토론하기 영어로 보는 원문 지식인 지도 지식인 지도 키워드 찾기 깊이 읽기 |
철학은 꼭 배워야 할 학문이다. 두 말하면 입 아플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초중고 교과서에 '철학교과서'는 없다. 아니, 고등학교 교과서에는 '철학'이 있긴 하지만, 역시나 가르치는 학교가 거의 없다. 이유는 명확하다. 수능에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국에서는 다르다. 미국이나 프랑스와 같은 유럽국가들, 그리고 인도와 중국, 심지어 일본이나 동남아시아도 '철학교과'를 가르친다. 그런데 우리는 굉장히 등한시하고 있다. 아직도...
하지만 우리도 철학을 가르치긴 한다. '도덕과목'과 '윤리과목'에서 철학을 일부 다루고 있고, 다른 과목에서도 '철학'과 관련된 지문이나 문제를 다루면서 '철학이야기'를 하고 있긴 하다. 그런데 '겉핥기 수준'이라서 아쉬울 따름이다. 그렇다면 '철학교육'은 꼭 필요할까?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두 말하면 입 아프긴 하지만, 안 할 수가 없다. 정말 너무도 철학을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철학은 정말 가르치기 쉽다. '국어과목'에서도, '수학과목'에서도, '사회/과학과목'에서도 언제 어디서나 가르칠 수 있다. 바로 '질문'을 통해서 말이다. 그 질문은 "넌 어떻게 생각하니?"라고 물으면 된다. 정말 간단하지 않은가. 철학은 이처럼 아주 쉽다. 아이가 쉽사리 '생각의 물꼬'를 터뜨리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다면, 먼저, "난 이것에 대해선 이렇게 생각한단다"라고 귀띔을 해주면 더욱 좋다. 그러면 아이들은 "아, 그런 거라면 저도 생각해본 적이 있어요"라면서 스스럼없이 철학에 한 발을 내딛기 시작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렇게 쉬운 '철학수업'을 왜 도입하지 않는 걸까? 여전히 '학생 수'가 많은 것을 꼬집는다. 현재, 한 반에 30명 남짓의 학생이 있는데, 이 아이들이 한 마디 하는데 '10초씩'만 잡아도 300초가 되며, 5분을 잡아먹는다고 말이다. 거기다 선생님도 한 마디씩 거드니 10분이 훌쩍 넘어버리기 일쑤고, '논쟁'이라도 벌어지게 된다면 수업시간을 홀랑 잡아먹기 때문에 '수업진도'를 나갈 수가 없노라고 말이다. 본색이 드러났다. 우선, 학생 수가 많음을 핑계거리로 삼지만, 결국은 '수업진도'를 빼앗길 수 없다는 것이 '문제의 발단'인 셈이다. 애초에 '철학과목'이 없으니 이런 일이 발생한 셈이다. 어쨌든, 5분~10분 동안 아이들이 '자신의 생각'을 마음껏 얘기할 수 있는 마당을 열어놓는 것이 얼마나 큰 효과가 생기는지도 한 번쯤 생각해보았으면 좋겠다.
한편, 이 책은 '근대철학의 시작'을 알리는 <데카르트>에 대한 철학책이다. 물론 '버클리'도 언급되어 있고, '흄'과 그밖의 많은 철학자들도 언급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데카르트 철학'을 설명하기 위한 들러리에 불과할 뿐이므로 살짝 몰라도 상관 없다. 그래서 분량도 '데카르트'가 70%를 차지하고, 나머지를 '다른 철학자들'이 노나 먹고 있다. 그렇다면 '데카르트 철학'이란 무엇인가?
'데카르트 철학'은 한 마디로 '인식론'이다. '인식'이란 '안다'는 뜻이니, 무언가를 안다는 것에 대한 철학인 셈이다. 우리는 '알기' 위해서 두 가지 방법을 떠올릴 수 있다. 하나는 '경험을 통해' 아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지를 했기 때문에' 안다고 하는 것이다. 이를 굳이 어렵게 설명하자면, 영국의 '경험론'과 대륙의 '합리론'으로 설명할 수도 있지만, 이딴 걸 자꾸 언급하니까 '철학'이 어렵게만 느껴지는 거다. '안다'는 건 그냥 '아는 것'이다. 내가 경험을 해서 알든 인지를 해서 알든 뭐가 그리 중요하단 말인가. 허나 하나만 기억하면 좋을 듯 싶다. 원래 '철학자'들끼리는 '단어 하나', '표현 하나'를 가지고 평생을 씨름하는 족속들이라고 말이다. 그러니 일반독자들은 '철학자들의 싸움 구경'이나 재미나게 하면 되지, 굳이 머리 아프게 '이해'하려고 할 필요는 없다는 걸 '인지'하시고, '경험'적으로 터득하시면 도움이 될 거다.
그런데 데카르트는 '대륙쪽 사람'이므로 합리적인 스타일로 '인지'하며 인식하려고 했다. 물론 '경험'을 부정하는 건 아니다. 그런데 어느 날, 데카르트는 궁금해졌다. '생각하고 있는 나'가 내가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뭔 소린고 하니, '장자'의 '나비의 꿈' 이야기로 설명하면 이해가 쉬울 듯 하다. 즉, 꿈 속의 내가 '진짜'인지, 현실의 내가 '진짜'인지 헷갈릴 수 있다는 말이다. 이 책을 쓴 저자 '최훈'은 이를 더욱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영화 <매트릭스>와 <토탈리콜>로 빗대어서 설명하였다. 심지어 '이경규의 몰래카메라'까지 끌어들여서 말이다.
허나 중요한 건 '재미난 비유'가 아니다. 데카르트가 '의심'을 했다는 점이다. 여기서 유명한 말인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Gogito ergo sum)'가 등장한다. 풀이하면, 어느 쪽이 진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의심하고 있는 나'만은 부정할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른 것이다. 철학이 이쯤에서 끝나면 참 재미있을텐데, '의심하고 있는 나'마저 부정하는 상황이 펼쳐지면서, 철학자들끼리 설왕설래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결론만 말하면, 신부였던 버클리는 '신의 존재'를 끌어들이며 '관념론'으로 이 논제를 해명하려 하였고, 흄은 더욱 철저한 '합리론'으로 문제를 깔끔히 해결하려 하였다. 뭐,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다.
다시 데카르트로 돌아와서, '데카르트'는 이 논제를 '끝없는 의심'으로 의심하고 또 의심하고 나서 더는 의심할 수 없는 '점'에 도달하고 나서야 끝맺으려 했다. 그러다 실수를 하였는데, 그건 '회의론자'도 아니면서 '회의론'의 빌미를 제공하고 말았던 거다. '회의'라는 것이 '의심을 품다'는 뜻이기 때문에 데카르트는 자신의 합리적인 의심으로 인해 결국 '세상에 믿을 것 하나 없다'는 회의론자들의 선구자가 되고 말았던 거다. 그런 까닭에 '데카르트'는 회의론자도 아니면서 회의론자라고 오해받곤 하는데, 이 또한 '철학자들의 몫'이니, 그닥 궁금해 할 것이 못 된다.
자, 그렇다면 이 책을 통해 배울 수 있는 '철학'이 무엇이냐? 고 묻는다면, 대답할 것이 없다. 이 책의 풀이 수준이 '전문가용'인 탓에 일반독자들에게 남는 것이 없다. 괜히 '철학이 어렵긴 어렵구나'하는 인상만 남겨줄 뿐이다. 물론, 이런 문제는 '트랜드'가 달라진 탓이기도 하다. 10여년 전에는 이처럼 '상세한 설명'이 담긴 교양책이 유행을 했다면, 근래에는 '무조건 쉽고 간결한 설명'이 담긴 교양책이 주목 받는 탓이다. 그 덕분에 이 책이 좀 어렵고 접근하기 불편한 책이 되고 말았지만, '철학'을 좀 더 깊이 있게 접하고픈 독자라면 충분히 권하고 싶은 책이다.
하지만 요즘 '대세'는 쉽고 재미난 교양책이다. 왜냐면 '지적욕구'는 더욱 높아진 탓이다. 이는 청소년도 마찬가지다. 근래에는 '독서광'이 대입에 유리하다는 입소문을 타고 책을 읽으려는 용감한 청소년들이 참 많아졌다. 그 때문에 '청소년책' 분야도 참 다양하게 출간되고 있는데, 진정 용감한 청소년이라면 이 책도 한 번 도전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쉽진 않겠지만 말이다.
대학 시절, 철학의 이해라는 수업의 중간 고사 시험 문제로 'Cogito ergo sum'을 비판하라는 문제가 나왔다. 그때 내가 썼던 답안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였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난 오늘, 나는 또 한번 'Cogito ergo sum'을 만난다. 여전히 쉽지 않은 문제지만 이제는 나도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만은 않다.
정말?
솔직히 고백하면, 이 책을 두 번이나 정독한 지금도 난 이 말의 정확한 의미를 모르겠다. 'Cogito ergo sum'이란 르네 데카르트 철학의 정수이며 그 짧은 길이에도 불구하고 이후의 서양 근대 철학사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고농축 선언이다. 이 말을 완벽히 이해하고 논박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대학 강의와 저술만으로도 평생을 먹고 살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의 원리를 알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할까? 영국의 경험론자들은 '감각 경험'에 의한 귀납 추론을 선택했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방법은 '명석판명한 지식'을 토대로 한 연역 추론이었다.
명석판명한 지식이란 어떠한 경우에도 의심 할 수 없는 절대적 진리를 뜻한다. 절대적 진리란 대충 따져보아 '참인 명제'를 의미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 예를 들어 '동물은 모두 죽는다'라는 명제를 살펴보자. 이것은 경험적으로 봤을 때 참일 가능성이 크지만 어디까지나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지 절대적으로 옳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모든 동물의 죽음을 목격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설령 이 명제가 참이라 하더라도 문제는 여전히 존재한다.
우리는 '동물은 모두 죽는다'라는 명제에서 '동물'이나 '죽는다'라는 단어를 너무나 쉽게 얘기하고 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가 동물이나 죽음의 존재를 아무런 의심없이 받아들이고 있다는 얘기다. 젠장 무슨 말이냐고? 좀 더 쉽게 설명하기 위해 동물을 토끼로 바꿔 보자.
지금 당신의 눈 앞에 흰색 토끼 한 마리가 있다. 눈이 빨갛게 충혈된 귀여운 토끼 한 마리다. 귀를 쫑긋 세우고 당근을 갉아 먹는다. 이제 손을 뻗어 토끼를 만져보자. 그 보드라운 털이 만져지는 순간 당신의 손에 토끼의 실재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토끼의 존재가 이렇게 생생하게 전해오는데도 여전히 토끼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생각인가? 하지만 더 생각해 보자. 당신의 감각이 거짓이 아니라고 할만한 증거는 어디에 있는가? 실제로 인간의 감각은 너무나 불완전하다. 같은 길이의 직선인데도 엄청나게 차이가 나 보이는 아래 그림을 보라. 충격적인 사실을 하나 더 얘기해 주자면, 당신이 방금 만진 그 토끼는 내가 일본 로봇 연구소에서 빌려온 정교한 토끼 로봇이었다. 손 끝에 전해지던 보드라운 촉감은 최고급 캐시미어 가죽으로 만들어낸 가짜 털 덕분이었다.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는가? 하지만 정교한 로봇 기술이 발달한 오늘날 이같은 경험을 만들어 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물론 속았다고 낙심하기엔 이르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곰곰히 생각해 보면 여기서 철학적 통찰을 얻을 수도 있다. 'Cogito ergo sum'이라는 것도 사실은 이같은 의심에서 딱 한 발자국 전진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의심해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은 확실치 않다. 완벽히 증명이 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믿을 수 없다. 이렇게 생각을 거듭해 나가다 보면 결국 의심의 여지가 없는 단 한 가지 생각에 다다르게 된다. 그것은 바로 의심하는 나 자신의 존재를 의심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당신은 의심하고 있는 중이다 고로 당신은 존재한다.
근대 사회는 데카르트의 작품이다. 의심할 것 없는 정확성. 제1 명제의 반석 위에 하나하나 차곡차곡, 추론을 통한 지식을 쌓아 세계를 구축한다. 이것은 마치 정교한 건축을 연상케 한다. 철저한 엔지니어링적 사고. 데카르트가 닦은 사상의 반석은 곧이어 아이작 뉴턴이라는 신성한 건물을 탄생시키고, 드디어 과학과 기술과 우리의 '오늘'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데카르트에겐 치명적인 오류가 있었다. 그는 의심하는 나의 사고 작용이 곧 나의 실체를 증명한다고 보았다. 아무리 의심에 의심을 거듭해 봐도 지금 내가 이 자리에서 의심을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도저히 의심할 수가 없으니까. 여기까지는 수긍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의심하고 있는 그 내가 '직접 만질 수 있고 냄새 맡을 수 있고 볼 수 있는 실체'라고 말하는 건 명백한 비약이다. 데카르트가 알 수 있는 건 단지 '의심하고 있는 그 순간, 그 사실'일 뿐이지 그것을 수행하고 있는 실재적인 '육체'는 아니다. 그러니까 데카르트는 정신 작용을 하기 위해서는 '육체'라고 불리는 껍데기가 있어야 한다는 증명할 수 없는 명제를 자신의 '명석 판명한 지식'의 전제로 이용하고 있는 셈이다.
천하무적 승승장구 할줄만 알았던 근대 사회가 오늘날 다양한 문제를 드러내며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는 이유는 이 세계가 데카르트의 명석판명하지 않은 지식으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일까?
나는 앞서 데카르트의 명제를 반박하면서 '의심하고 있는 그 순간, 그 사실'을 의심할 수 없다는데에는 동의했다. 데카르트가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말한 데는 그의 철학이 '관념론'을 반박하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애매모호하고 흐릿한, 실재하는지 아닌지 증명할 수 없는 불안정한 세계를 도무지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데카르트는 '의심하는 나'와 '육체를 가진 나' 사이에 놓인 거대한 심연을 대담한 비약으로 메꿨던 것이다.
역사는 이후 데카르트 철학의 논리적 상처를 봉합하려는 많은 사람들을 배출한다. 아일랜드의 대주교 '조지 버클리'도 그 중 하나였다.
조지 버클리는 경험론자라는 측면에선(귀납적 추론) 데카르트와 반대점에 서 있는 사람이었지만 '세계의 실재를 규명'하려는 목적에 있어서는 동지였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버클리가 증명하려한 '실재'는 데카르트의 '실재'와는 차원이 달랐다. 데카르트에게 '실재'라는 것은 외부 세계에 떡하니 공간을 차지하고있는 '물질적 실재'였던데 반해 버클리의 '실재'는 '관념론적 실재'였다.
집, 산, 강 그리고 한마디로 모든 감각 가능한 대상들은 이해력에 의해 지각되는 것과 독립적으로, 자연스럽게 또는 실제로 존재한다는 생각이 이상하게도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다. (113p, 원출처: 인간 지식의 원리론, 버클리 작)
버클리는 우리가 지각하는 것이 외부 세계에 실제로 존재한다는 믿음으로 이어지는걸 의아하게 생각했다(지극히 당연한걸 의심하고 비판해야만 철학자가 될 수 있다!). 따지고 보면 버클리의 말에도 일리는 있다. 우리는 아무런 의심없이, 아무런 증명없이, 우리가 인지하는 것에 실체가 존재한다는 믿음을 갖고 살아왔다. 본능적으로. 하지만 지각은 결코 외부 세계의 실체를 증명해주진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지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 뿐이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지각하는가? 그것은 관념이다. 해의 실체가 아닌 해라는 관념, 사과의 실체가 아닌 사과의 관념. 하지만 어떻게 실체 없이 관념이 존재할 수 있는거지? 구체적 물질이 없다면,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대상이 없다면, 그것에 대한 관념도 존재할 수 없잖아! 관념과 실체가 분리되어 있는 이상 우리는 이 같은 딜레마에 빠져 뫼비우스의 띠 위를 걸어야 한다. 그리하여 버클리는 과감히 칼을 뽑아들었다. 버클리는 말한다. 외부 세계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관념' 뿐이다.
버클리는 우리가 보는 사과, 모니터, 키보드, 아이폰 등이 모두 물질이 아닌 관념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가정하면 모든 문제가 말끔히 해결된다. 굳이 실체와 관념을 나눠 골치 아프게 따질 일이 없다. 세계는 관념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관념을 지각한다. 우리는 지각되는 관념 자체를 부인할 수는 없기에 이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명명백백히 알 수 있다. 그리하여 버클리는 Cogito ergo sum에 버금가는 유명한 명제를 도출해 낸다.
Esse est percipi(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
자, 버클리에 의해 세계는 다시 안전한 반석 위에 올라왔다. 세계는 명명백백히 존재한다. 물론 그것이 물질이 아닌 관념의 형태이긴 하지만. 얘기는 여기서 끝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역사는 언제나 대립과 투쟁을 통해 세계를 이끌어 간다.
자,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각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귀를 닫고 눈을 가리고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진공 속에 우리 자신을 가둬보자. 세계는 여전히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대답할 사람은 아마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버클리의 이론에 따르면 이 경우에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는 내가 볼 때만 존재한다. 내가 보지 않을 때 세계는 사라져 버린다.
버클리도 이 문제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철학을 완전 무결한 이론으로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아일랜드의 대주교 조지 버클리. 그는 이 퍼즐을 완성할 마지막 조각을 자신의 직업 안에서 찾았다. 그의 해답은 신이었다.
당신은 당신이 지각하지 않는 동안 이 세계가 사라질 걱정 따위 하지 않아도 좋다. 왜냐고? 전지전능하신 신께선 우리가 잠들어 있는 순간에도 이 세상 만물을 빠짐없이 지각해 주시고 계시니까!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 하지 않은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시편 23편)
신을 믿는 다는 건 이토록 편리한 일이다. 당신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영어 점수가 안나와 승진을 걱정할 지라도, 공부를 안해 수능을 망칠 것 같아도, 두려워 말라 주께서 당신과 함께 하실지니.
알면 알 수록 철학만큼 재밌는게 없다. 특히 인식론은 언제나 세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갖게 해줘 더더욱 흥미롭다. 원래부터 그렇게, 자연적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이지만 곰곰히 따져보고 천천히 돌아보면 모든게 새롭다.
철학이 좀 더 쉬웠다면,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철학을 논할 수 있다면, 세상은 좀 더 나아졌을까? 꼭 그렇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철학을 폄하하는 누군가의 말마따나 그들은 쓸데 없는 고민을 사서하는 사람이니까. 그러고 보면 김영사 '지식인 마을' 시리즈 만큼 부질없는 기획도 없을 것이다. 이 시리즈는 진심, 진정으로 철학을 쉽게 설명하는 책들로 가득한데, 우리가 이 모든 사상을 섭렵한다 할지라도, 행복은 머나먼 정글일 테니까.
데카르트에게 문제는, 끝까지 의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의 사고를 더 밀고가면, 결론은 "나는 존재한다"가 아니다. 5분전 나는 분명 이와 같은 의심을 했다, 그런데 5분 뒤의 나는 5분 전의 나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없다. 그 생각을 한 것이 나라고 확신할 수 없다. 지금 5분 전의 나를 의심하는 나는 나지만 그전의 나는 나라고 할 수 있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사이 또 시간이 1,2초 흐르면 1,2초전의 나는 지금의 나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없다. 이걸 끝까지 밀고 간 이가 흄이다. 흄은 그건 우리가 확실하게 경험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낸 가설일 뿐이라고 한다. 버클리는 데카르트의 한계를 지적했을 뿐이다. 같은 빨간 사과를 봐도, 데카르트는 '빨간사과를 봤다'고 하겠지만 버클리는 '사과의 빨감'을 봤다고 할 것이다.
이쯤 되면 일반인의 눈에는 데카르트나 버클리나 흄이나 다 미친놈으로 밖에 안 보일 것이다. 이런 미친. 먹고 맛있으며 되고, 보이면 보이는대로 말하면 되지, 얼어죽을 의심은! 그래 우리 눈에는 저들이 미친놈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방에 가둬놓고 혼자서 천장 바라보면서 어 왜 천장은 위에 있고 평평하지 라고 생각하거나 평평하다는건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만지면 증명가능할까, 아니야 그걸 어떻게 알아, 이렇게 혼자 중얼거리게 놔둬야될 거 같다. 저자 최훈은 이에 대해 적절한 대답을 안겨준다.
"철학의 임무가 상식을 보존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과학 이론이 상식과 어긋난다고 해서 잘못된 이론이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철학 이론의 장점과 결점도 상식과 부합하느냐에 따라 판단할 것이 아니라 다른 확립된 이론과 충돌하지 않는가, 충돌한다면 더 그럴듯하게 설명해낼수 있는가, 그 이론 내부에 모순은 없는가 등에 따라 판단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철학이 아무리 의심해도 지나치지 않는 이유이다. 끊임없이 의심하라. 그리하면 지금 내 머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고민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머리 속을 하얗게 비우고 처음부터 단계를 쌓아나가자. 그럼 나름의 결론에 도달할테니. 철학을 한다는 것은 삶을 살아간다는 것과 같다. 삶에서 겪는 온갖 고민들은 처음부터 의심함으로써 해결된다. 고민이 해결될 기미는 보이지 않으면서 머리를 아프게 하는건, 처음으로 돌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머리가 복잡할 땐 처음으로 돌아가 모든 것을 의심하라. 그리하면 길이 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