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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 <침대와 책>을 시작하며 꽃 같은 그대가 울고 있을 때 우울한 다음 날 술 한잔 딱 걸치고 돌아오는 길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리고 싶은 아침 도시의 연인들이 여자들의 가슴 크기에 주목하게 될 때 이 세상 바깥이기만 하면 어디로라도 떠나고 싶어! 내 옆의 남자들이 매력 없고 한심해 보이면 별일 없이도 기분이 좋아지는 마술 버지니아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 사랑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면 고독해서 사랑을 하나? 사랑을 해서 고독한가? 성형수술이 우리를 유혹할 때 오늘은 내 꼴이 추레하고 처량하구나 사랑이 끝나버린 걸 아는 순간 기죽지 않고, 눈치 보지 않고 자유롭게 살고 싶어 낯선 사람에게서 걸려온 한 통의 전화, 마음의 평화가 깨졌다 세월은 가고, 헛되이 나이 들어가거나 늙어간다고 느낄 때 '나 젊어져서 돌아올게' 귓가에 울리는 이 말! 부장님께 된통 깨지고 나서 외로운 날 꼭 듣고 싶은 한 마디 꿈은 있지만 꿈에 이르는 길을 몰라 불안할 때 밉고 싫고 감정은 파도치고 삶은 휘청대는 날 이 글이 우리를 가깝게 할 수 있다면 <침대와 책>에 바치는 엔딩의 사(辭) - 지상에서 가장 아늑한 침대 정혜윤의 침대 위 책들 |
저정혜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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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왜 책을 읽지?”
“난, 당신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책을 읽어.” 지난 봄부터 한 온라인 서점의 웹진에 실리기 시작한 칼럼 <침대와 책>이 출판계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기라성 같은 칼럼니스트들을 제치고 최고의 조회수를 기록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독서의 방대함과 깊이와 관능적으로 풀어내는 글솜씨를 자랑하며 콧대 높은 독서광들, 그리고 출판사 에디터들을 심하게 자극했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그 칼럼의 주인공은 이미 사람들 사이에 발 넓고 책 많이 읽고 글 잘 쓰기로 소문이 자자한 CBS의 정혜윤 PD였다. 정혜윤의 칼럼을 읽으면서, 온라인서점을 내 집처럼 드나들던 수많은 독서가들과 북 마니아들은 겉으로 티내고 싶진 않았겠지만 그간 자신이 해온 독서와 쌓아온 책 리스트의 초라함에 실망하고 상처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아, 이제껏 해온 나의 독서는 잘못되었는가!’라는 탄식이 절로 나올 만큼 정혜윤은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부터 《공산당 선언》까지, 말랑말랑한 소설과 딱딱한 인문서, 오래된 고전과 가장 최근의 베스트셀러, 국내외 분야를 모두 아우르며 폭 넓고도 깊은 책 읽기를 선보였다. 엄마는 나의 검은 피부를 싫어했고, 나는 나의 갈색 피부를 좋아했으며, 엄마는 나의 헝클어진 머리를 싫어했고, 나는 나의 부스스한 머리를 좋아했다. 엄마는 레슬링과 가요와 관광버스를 좋아했으며 나는 레슬링과 관광버스를 싫어했다. 우리는 많은 부분 통하지 않았는데 그래도 엄마는 내가 책을 읽을 때면 항상 자기를 닮아서 애가 이렇게 책을 좋아한다고 칭찬하고 인정해줬다. 칭찬받을 일이 많지 않았던 시절이라 그 뒤로도 쭉 책 읽는 분위기를 연출하면서 사랑받았다. 언젠가는 라디오 PD의 좋은 점을 글로 써보겠지만, 라디오 PD로 산다는 것은 자신이 얼마나 사소한 인간인지 깨닫는 직업이면서 동시에 남이 얼마나 위대한 인간인지를 깨닫는 직업이므로 참 근사한 일인 것 같다. 나는 라디오 PD가 된 뒤로 잘 놀라지도 상처 받지도 않는다. 사람이 자기를 사랑하는 수만 가지 방식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은 전적으로 책과 라디오 때문이다. 그럼 그녀는 왜 책을 읽기 시작했을까. 사실 내성적인 성향임에도 불구하고 PD라는 직업적 특성 때문에 하루에도 수십 명의 사람을 만나야 했기에, 낯선 사람과 말을 트고 친해지기 위해 책을 읽었단다. 내 기억 속에 들어 있는 어떤 인상 깊은 책을 상대방도 읽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는 더 이상 낯선 사람이 아니고, 갑자기 꽉 끌어안고 싶을 정도로 친숙한 사람이 된다는 그녀에게 있어, 결국 책은 세상과 사람과 소통하는 가장 지적인 도구인 셈이다. 마치 모노드라마를 연기하듯 자신이 읽었던 책 이야기를 다른 누군가에게 들려주는 것을 좋아하고, 누군가 모르는 책 이야기를 하면 무관심한 척 듣고 있다가 득달같이 서점에 달려가 일단 사놓고 보는 책 쇼핑광이며, 운전하다가 빨간 신호등에 걸려 있을 때‘그새를 못 참고’책을 읽다가 뒤차의 우렁찬 클랙슨 소리에 깜짝 놀라곤 하는 그녀는 현재 CBS 라디오의 시사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있는 베테랑 프로듀서이다. 후배들 사이에서 깐깐하게 일 잘하기로 소문나고 재기발랄한 시사 프로그램을 기획하기로 유명한그를 직접 만나면 사람들은 또 한 번 놀란다. 누구나 시사 PD 또는 라디오 PD라고 했을 때 떠올리는 머릿속의 일반화된 이미지들을 여지없이 깨뜨리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부스스한 까만 머리카락에 가무잡잡한 피부, 끈 달린 짧은 원피스를 즐겨 입고, 한 번 보면 누구나 눈이 휘둥그레질만한 독특한 무늬의 스타킹에 하이힐을 신거나, 누드핑크 립스틱을 매일 아침 꼭 챙겨 바른다는 정혜윤 PD. 그렇기에 그녀의 책《침대와 책》을 가리켜 ‘지상에서 가장 관능적인 독서기’라 명명해도 전혀 어색하지가 않다. 왜 침대와 책인가? 침대로 끌어들일 수 있다, 시간을 헷갈리게 만든다, 서로에 대해 불행한 애정을 품고 있다, 많은 후손을 만든다. 이것은 바로 산문집 《일방통행로》에서 발터 벤야민이 이야기했던 ‘책과 매춘부의 공통점’이다. 허리에 엄청난 무리가 간다는 주위 사람들의 수차례 충고에도 불구하고 정혜윤은 여전히 침대에 누워 책 읽는 것을 이 세상 다른 무엇보다 좋아한다. 침대는 그녀에게 도서관이자, 여행지이자, 은신처며, 라디오다. 오죽하면 아주 납작하고 넓으며 발치에 책을 잔뜩 쌓을 수 있도록 프레임이 달린 특별 제작한 다다미 침대가 그녀의 재산목록 1호일까. 그녀에게 있어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유혹 두 가지, 침대와 책. 그렇다면 정혜윤이 이야기하는 그 둘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침대와 책의 공통점 1 한번 빠져들면 쉽게 헤어나기 어렵다. 2 역시 시간을 헷갈리게 만든다. 밤을 낮처럼, 낮을 밤처럼 지배한다. 3 양자에게는 저마다 이들을 갈취하고 괴롭히는 사람들이 달라붙어 있다. 책에는 비평가들이, 침대에는 게으른 육신들이. 4 특별한 사람에게만 빌려주고 싶다. 5 화려한 커버를 두르고 있더라도 진가는 내용에서 드러난다. 6 전시장에서는 누워 있는 것을 좋아한다. 7 같이 있다 보면 신체의 변형을 가져온다. 8 때론 잠을 부르고, 때론 잠을 쫓는다. 9 결코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생긴다. 10 필요에 따라 접기도 하고 펴기도 한다. ∥ 책으로 만든 침대를 향한 그녀의 열렬한 구애 정혜윤이 쓴 《침대와 책》은 그간 읽어온 책들의 Favorite List를 마구 읊어대고 그 지식을 자랑하여 결국엔 읽는 이로 하여금 심한 박탈감 내지 좌절감을 맛보게 하는 무지막지한 독서 편력기가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은 그녀가 왜 책과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로맨틱한 일기이며, 책에게 보내는 열렬한 연애편지에 가깝다. 실연의 상처를 잊게 해주고, 외로운 밤에는 친구가 되어주는 널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그녀의 눈물 어린 고백이다. 새가 모이를 집어 나르듯 그녀는 수많은 책을 서재가 아닌 그녀의 침실로 사 나른다. 삼면이 검은색 나무 프레임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위에 수많은 책들이 무질서하게 섞여있는 침대가 그녀의 책 둥지다. 감정이 휘몰아쳐 삶이 휘청대는 날, 참을 수 없을 만큼 내 꼴이 추레하고 처량하게 느껴질 때, 부장님에게 된통 깨진 날, 사랑이 끝났음을 알아버린 순간, 헛되이 나이 들어가고 늙어가는 것 같아 불안할 때마다 그녀는 침대 속으로 책을 들고 들어간다. 피곤과 불안과 염려와 설렘과 기대와 내일의 일을 책으로 대치해 버리는 것은 그녀의 아주 오래된 버릇이다. 그녀에게 책은 ‘존재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라기보다는 현실에서 즉각적으로 도움을 주고자 전 세대, 전 지역의 현자가 수만 가지 스토리를 동원해 윙크를 하며 인생의 힌트를 주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잠자는 시간을 줄여가며 책을 읽지 않을 수 있으랴. ∥ 침대, 트뤼포와 벤야민을 애인 삼아 눕는 곳 곳곳에서 그리고 삶의 모든 단계에서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을 완벽한 장소, 오로지 책하고만 있을 수 있는 장소와 시간을 얻으려고 애썼던 프랑스 작가 콜레트처럼, 정혜윤 PD에게 있어서도 침대에 누워 오로지 눈동자만 움직이는 그 시간은 인생의 해답을 흥미진진하게 얻어나가는 시간이다. ‘인생은 단파 라디오’라고 말하는 그녀는 책장을 넘기듯 다음 회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자신의 삶을 밤마다 침대 위에서 절찬상영하고 있다. 새벽 세시, 사랑하는 후배가 우주 전체가 울릴 만큼 큰소리로 울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그녀는 후배를 위해 영화감독 프랑수아 트뤼포의 자서전을 빌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사전을 만든다. 또 내 우울 때문에 다른 인간을 할퀴고 싶지 않은 날에는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토성 편을 펼쳐들고 지구보다 유난히 지루하고 긴 토성의 겨울에 동질성을 느끼거나, 수잔 손택의 《우울과 열정》을 통해 자신의 우울은 토성적 기질이며 토성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해석한 발터 벤야민을 소개 받는다. 살아오는 내내 아주 성실한 독자였다고 말하기 어렵고,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한 영재도 아니었지만 정혜윤이 책을 좋아한다고 감히 자부할 수 있는 것은, 책을 읽는 순간 바닥까지 내려가 있던 기분이 완전히 좋아졌던 적이 있고, 그렇다보니 그 누구라도 책 이야기를 하는 사람 말에는 항상 자연스레 귀를 기울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 책은 ‘인생의 힌트’를 담은 레비의 윙크 맛집을 추천하는 책, 술집을 추천하는 책, 인테리어가 아름답고 커피 맛이 탁월한 카페, 와인, 옷, 여행지, 온갖 것을 추천하는 책이 있기에 정혜윤도 그 책들 덕에 인생의 풍요를 맛봤다. 그래서 그녀도 자신에게 윙크를 보낸 그 수많은 작가들과 책에 대해 보은을 해보고자 《침대와 책》을 쓰기로 맘먹었다. 그녀에게 책 읽기는 일상이 주는 무게와 피로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도피처가 아니라, 일상을 향해 더 적극적으로 달려들기 위해 몸을 웅크리고 숨을 고르는 행위에 더 가깝다. 깊은 밤 전화를 받지 않는 친구를 대신하는 것도 책이며, 내 어떤 질문도 거뜬히 받아주는 애인을 대신하는 것도 책이다. 지난 4월에 있었던 버지니아공대 총기난사 사건 이후 쓴 <버지니아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는 그녀가 쓴 다른 칼럼의 7-8배에 육박하는 조회 수를 기록할 정도로 독자들의 많은 호응을 얻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한국인 청년 조승희가 일으킨 총격 사건의 소식을 듣고 할 말을 잃은 채 판단불능의 공황상태에 빠졌을 때,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진행된 일의 결과로 모든 희망이 사라져버린 사람들을 생각하며 그녀는 프레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의 한 문장을 떠올렸다. 그녀는 레비가 주는 힌트를 통해, 인생을 영원히 바뀌어버릴 것 같은 고통이 찾아온다 해도 고통을 끝장내버리는 것보다는 고통에 강하게 대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많은 독자들이 거기에 공감한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시사 PD로 경험을 쌓아온 덕분에 말랑말랑하고 관능적으로 보이는 그녀의 글 속에 시퍼렇게 세상과 사회와 사람에 대한 날이 서 있다는 것을 느끼는 사람들은, 이 책을 진심으로 이해한 것이다. 《침대와 책》을 더욱 빛나게 하는 요소들 ∥ 전세계 패션피플이 인정한 세계적인 포토그래퍼 케이티 김과, 《끌림》이병률의 사진 조르지오 아르마니, 토미 힐피거, 케이트 모스, 나오미 캠벨 등 세계를 휘어잡는 쟁쟁한 패션 피플들을 모두 만나본 단 한 명의 대한민국 포토그래퍼 KT. KIM(케이티 김)은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사진작가이다. <보그> <에르메스> <엘르> <마담 휘가로> 등 세계적인 잡지에서 최고의 모델들과 작업해온 그가 직접 촬영한 《침대와 책》의 표지 사진은 처음 시안이 공개되자마자, 그 몽환적인 분위기로 보는 이들의 탄성을 자아냈다. 또한 표지뿐 아니라 파란 하늘과 구름, 그 사이를 나는 새가 잘 어우러진 면지의 이미지 또한 모두 정혜윤 PD의 침실에서 직접 촬영되었다. 그렇다면 하얀 원피스를 입은 채 아찔한 뒷모습의 각선미를 자랑하는 표지 모델은 누구일까? 평소 침실에서 책을 읽는 모습으로 자연스럽게 촬영에 임한 그녀, 바로 저자 정혜윤이다. 또한 본문과 잘 어우러져 글의 맛을 더해주고 있는 사진들은 최고의 인기 여행산문집 《끌림》의 저자 이병률이 직접 촬영한 것으로, 정혜윤 PD의 글에 반해 기꺼이 제공해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