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미국 특유의 진취적 기상을 대표하는 작곡가였다. 그는 또한 뉴욕의 심장 고동소리였다. 그를 그저 미국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인물 정도로 치부하는 건 온당한 대접이 아니다. 에런 코플런드는 혁신자들로 가득한 나라에서도 단연코 돋보이는 선구자요, 개척자였다. 미국에서 태어나 세계 음악계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작곡가를 꼽으라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름이 그리 많진 않다. 아이브스, 거슈윈, 바버, 번스타인 정도가 전부다. 하지만 이 목록의 가장 꼭대기 자리는 응당 코플런드의 몫이다. --- p.6「레너드 슬래트킨(디트로이트 심포니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중에서
맨해튼의 뉴 스쿨 포 소셜 리서치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라는 학교에서 ‘음악에서 무엇을 들어 낼 것인가What to Listen for in Music’를 주제로 진행한 강의록을 모은 단행본으로, 자그마한 분량 안에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엄청난 가치를 담은 책이었다. 코플런드의 책은 클래식 음악을 쓰고 듣는 경험을 언어로 옮기려 시도한 최초의 사례는 아니었지만, 실제로 음악을 창조하는 일을 업으로 삼은 이른바 ‘내부자’가 자신을 둘러싼 예술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표현해 담은 책이라는 점에서는 선례가 없는 최초의 시도였다. 바로 그러한 점이 수많은 열혈 독자를 양산하게 된 이유이리라. --- p.12「앨런 리치(음악평론가)」중에서
1936년과 1937년을 잇는 겨울, 코플런드는 여러 차례 강연회를 열었고 그것이 밑거름이 되어 2년 후 이 책의 출판으로까지 이어졌다. 강의 제목 역시 이 책과 마찬가지로 ‘음악에서 무엇을 들어 낼 것인가’였다. ‘들어 낼’이라는 표현이 문법적으로 어딘가 어설프게 들릴지도 모르겠으나, 거기에는 ‘음악을 듣는 법’이라는 심심한 문구로는 결코 담아낼 수 없는 뉘앙스가 실려 있어 그만큼 더 정확한 표현이라 하겠다. “이 곡이 내게 놀랍게 다가오는 결정적 이유는 바로 이런 것들이다”라는 식으로, 코플런드는 아름답게 엄선한 단어를 이용해 독자를 끊임없이 일깨우고 있다. --- p.17「앨런 리치(음악평론가)」중에서
코플런드가 가르쳐준 덕분에 우리는 시벨리우스Jean Sibelius(1865-1957) 교향곡의 구조적 특이성, 쇼팽Frederic Chopin(1810-1849)의 작은 전주곡에 담긴 극적 충격, 차이콥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1840-1893)의 교향시가 스토리라인과 음악을 연결하는 방식을 이해하게 된다. 그렇게 가슴으로 배운 교훈을, 이 얇은 책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마찬가지로 훌륭한 다른 작품에 적용하는 법을 깨우치게 된다. 위대한 작곡가들의 작품 세계, 그 핵심에 흠뻑 빠져들면 우리 또한 위대한 감상자가 된다. 저녁 식사쯤이야 좀 늦는다고 해서 큰일은 아닐 테니 말이다. --- p.27「앨런 리치(음악평론가)」중에서
우리 음악가들은 평론가나 작가로도 활동한 작곡가들이 음악 기술적인 문제에 대해 쓴 글을 익히 봐왔다. (…) 음악과 글에 고루 능통한 작곡가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일반인을 대상으로 작곡 기술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코플런드가 최초다. 이 책은 유례를 찾을 수 없는, 한마디로 유일무이한 것이다. 렘브란트가 ‘그림에서 무엇을 보아 낼 것인가’라는 책을 썼다고 한번 가정해보라. 그러면 코플런드의 책이 가진 위상이 가늠될 것이다. --- p.38「윌리엄 슈먼(전 줄리아드음악원장, 링컨센터 초대 회장)」중에서
일개 작품의 운명은 기본적으로는 작곡가와 연주자의 손에 달린 것이긴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듣는 이의 태도와 능력에도 좌우되곤 한다. 작품과 연주를 받아들일 것인지 내칠 것인지를 결정하는 책임도 궁극적으로는 청취자에게 있다. 같은 작품을 같은 연주자들이 공연하더라도 그에 대한 반응은 관객에 따라 천차만별로 갈린다는 것을 음악가들은 경험으로 알고 있다. 달리 말하면, 사람들이 인지하는 음악의 품질 여하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청자의 수준 여하에 따라 오르락내리락한다는 이야기다. 음악으로서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많은 이들이 그저 감정이라는 욕조 속에 들어앉은 채 소리에 둘러싸이는 감각적 차원의 반응에만 안주하고 만다. 하지만 음악에는 질서와 체계가 있음을, 음악은 감각적 호소력뿐만 아니라 지적인 호소력 역시 가지고 있음을 잊어선 안 된다. --- p.35
‘지적인 음악 감상의 기초를 최대한 뚜렷하게 정립한다’는 것이 이 책의 목적입니다. 음악을 ‘설명’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제가 그 일을 다른 사람보다 더 잘할 수 있다고 우쭐댈 수도 없는 형편입니다. 하지만 음악 감상에 관한 책은 열이면 열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교육자나 음악 평론가의 입장에서 문제에 접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반면 이 책은 작곡가의 관점에서 쓴 책입니다. 작곡가에게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단순한 과정입니다. 다른 사람들이라고 해서 그렇게 느끼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듣는 이가 무엇을 얻어내야 할지 굳이 설명해야 한다면 작곡 과정에 투입된 바가 무엇인지를 낱낱이 아는 작곡가보다 적임자는 없을 겁니다. --- p.39
음악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저자세를 보일 이유가 없다는 뜻입니다. 만약 당신이 음악을 듣고 느끼는 본인의 반응에 대해 어떤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떨쳐버리도록 노력하십시오. 그러한 열등감은 그럴 만한 근거를 가지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 p.48
독자들이 목표해야 할 과제는 좀 더 적극적인 종류의 청취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차르트를 들을 때도, 듀크 엘링턴Duke Ellington(1899-1974)을 들을 때도 인식의 폭을 넓히기 위해 깨어 있는 자세를 가질 때만이 음악에 대한 깊은 이해가 가능하니까요. 그저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들어 내려 노력해야 합니다. --- p.63-64
만약 현대음악은 어느 것 할 것 없이 시종일관 숨 쉴 틈조차 주지 않고 이어지는 불협화음의 연속으로만 들린다면, 그건 현대음악을 들은 경험이 부족한 탓이라고 결론을 내려도 무방할 겁니다. 대부분의 경우가 그렇잖습니까. 과거의 음악에 비해 요즘 음악을 더 많이 듣는 사람이 얼마나 귀한지 말입니다. --- pp.123-124
음악에 있어서 구조란 작품을 창조하는 사람이 재료를 논리 정연하게 조직하는 방식입니다. 다른 예술과 다를 바가 없지요. 다만 여타 예술과의 차이점이라면 음악의 재료는 유동적이고 다소 추상적인 성격을 띤다는 점입니다. 음악의 본질이 그러하기 때문에 구조를 쌓아 올리는 작곡가의 책무는 이중으로 난해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 p.163
무엇보다 앞서 유념하셔야 할 점은 대개의 창조적 예술가들은 진지한 의도를 가지고 작업에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곧, 듣는 이를 골탕 먹이기 위해 곡을 쓰는 사람은 드물다는 뜻이지요. 따라서 듣는 입장에서도 작곡가의 좋은 뜻을 믿고 열린 마음을 가지는 게 필요합니다. 기질과 표현 면에서 작곡가의 성향은 천양지차로 갈립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현대음악 역시도 단 하나로 갈무리할 수 없는 다양한 음악적 경험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 p.308
대부분의 사람들은 음악이 논쟁거리가 되는 것을 마뜩치 않아 하는 것 같습니다. 또한 지금까지 음악을 들어온 버릇이 뒤흔들리는 걸 꺼립니다. 그들은 음악이 마치 소파처럼 아늑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폭신한 베개처럼 그 위에서 뒹굴고 싶어 합니다. 일상생활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음악에서 풀고 위안을 얻으려 합니다. 그러나 진지한 음악은 정신을 몽롱하게 하는 최면제로서 기능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특히 현대음악은 여러분을 잠재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흔들어 깨우기 위해 쓰이는 음악입니다. 듣는 이에게 충격과 흥분을 주기 위한 음악이며, 듣고 나면 온몸이 뒤흔들린 것 같은, 심지어는 온몸에 힘이 쭉 빠진 것 같은 느낌을 주기 위한 음악입니다. 따지고 보면 연극을 보러 가거나 소설책을 펼쳐 들면서 기대하는 자극이 바로 그런 것 아닙니까? 왜 음악만 예외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 p.316
우리가 어느 작곡가의 음악을 듣는다고 할 때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정확히 무엇일까요? 작곡가는 소설가처럼 이야기를 들려줄 의무감을 느끼는 존재가 아닙니다. 조각가처럼 자연을 ‘베껴낼’ 필요도 없습니다. 음악가가 쓴 작품은 건축가의 도면처럼 실제적 기능을 지니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작곡가가 우리에게 주는 건 과연 무엇일까요? 제게는 오로지 하나의 대답만이 가능해 보일 뿐입니다. 작곡가가 주는 건 바로 그 자신입니다. 물론 모든 예술가가 빚어낸 작품은 그 자신의 표현일 테지요. 하지만 음악의 경우는 작품과 창조자 사이의 관계가 한층 직접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작곡가는 외부 ‘사건’에 기대지 않고 본인의 본질적인 부분 - 한 명의 인간으로서 가진, 그리고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서의 경험을 담은 가장 완전하고 깊은 표현 - 을 떼어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 pp.333-334
자신을 흔쾌하게 음악에 내맡길 수 있으려면 우선 취향을 넓혀야 합니다. 관례적으로 좋아했던 면모에만 매달려서 음악을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취향은 감수성과 비슷한 것이어서 어느 정도는 타고나는 자질이지만, 목적을 가지고 꾸준히 연습하면 계발시킬 수 있는 자질이기도 합니다. 즉 옛날 음악과 요즘 음악을 가리지 않고 보수적인 음악과 현대적인 음악을 차별하지 않으면서 모든 악풍의 음악에 동등한 기회를 줘야 한다는 겁니다. 편견을 배제한 듣기가 요구된다는 겁니다. 감상자로서 여러분 각자가 가진 책임을 무겁게 여기십시오. 음악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건 일반 사람이건 우리 모두 음악 예술을 조금이라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영원히 노력하는 자세를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 p.3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