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다가 문득 ‘그런데 이토록 외국인과의 우정을 갈망하는 이유가 뭐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영어로 의사소통하는 걸 연습하고 싶어서이기도 했고, 새로운 유형의 사람들에 대한 호기심도 있었다. 또 단순히 만인에게 사랑받고 싶은 욕망도 있었던 듯했다. 그 순간 ‘이토록 스트레스를 받으면서까지 외국인과의 우정을 원하고 추구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이 전구가 번쩍하듯 떠올랐다. 이런저런 이유로 막연히 ‘외국인 친구들을 많이 사귀고 싶다.’라고 생각했고, 나는 그 목표에 대한 동기도 잊고서 목표 자체에 매몰되어 고통받고 있었다.
이 사실을 깨닫고 나니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목표라면 그냥 접어 두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목표를 추구하는 게 너무 괴롭다면, 세상이 그쪽으로 가지 말라고 이야기해 주고 있는 건 아닐까? 내가 즐겨 보는 한 미국 드라마에는, “우주가 네게 이렇게 하라고 얘기하고 있잖아.”라는 식의 대사가 자주 나온다. 나의 상황 또한 마찬가지로 우주가 내게 그쪽이 아니라고 하는데도 나 자신의 목표 안에 갇혀서 그 언질을 듣지 못하고 고통 속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 pp.30~31
우리는 실패 속에서 지금까지의 자신에게 부족했던 점들을 발견했고, 그 결핍을 채워 다시 도전하는 발판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 진부하지만 가장 모범적인 답안임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러나 빼놓을 수 없는 전제가 하나 더 있다. 나의 부족함을 메우는 건, 끊임없는 비교와 타인에 대한 열등감 안에서는 불가능하다. 결코 도달할 수 없어 보이는 차이를 실감했을 때 우리는 더 이상 노력해야 할, 다시 일어서야 할 이유조차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그 순간 실패는 가혹하고 사나운 얼굴을 하게 된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실패는 내게 다른 얼굴을 보여 주었다. 사실 제각기 다른 방면에서 나보다 더 뛰어난 사람들, 어떤 부분에서는 이미 나보다 훨씬 앞서 많은 걸 이루어 낸 사람들 앞에서 작아질 필요는 없었다. 나는 언젠가 그들과도 팀을 이룰 것이다. 그때에는 내가 조금 다른 역할을 맡으면 되지 않을까? 내가 그들보다 더 능숙하게 해낼 수 있는 일들도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타인을 열등감의 대상이 아닌 꿈을 공유하는 이들로 인식했을 때 비로소 나는 강박에서 벗어나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을 용기를 얻었다.
새로운 학기는 또 시작됐다.(이 사실은 아직도 적응이 되질 않는다.) 과거의 내가 그렸던, 3학년이 되면 정말로 그렇게 될 줄로만 알았던, ‘사기 캐릭터’에 가까운 완전무결한 내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그렇지만 나는 불완전한 지금의 내 모습이 좋다. 비록 여전히 과제 기한을 아슬아슬하게 넘기고, 불평이 좀 많고, 문제의 그 창업 경진 대회에 와신상담의 자세로 재도전하는 것은 다음 학기로 미뤄 두긴 했지만, 어쨌든 결코 체념하거나 포기하지는 않았다. 제대로 해낼 수 있는 내실 있는 능력을 갖는 게 일단은 우선이다. --- pp.133~134
곧 전역인데 자퇴하고 만화를 그리고 싶다는 내 말에 친구는 욕을 했다. “리오넬 메시가 농구 하러 가는 소리.”라던 조금은 과장된 비유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학교에 갖혀서 잘 모르겠지만 국내 이공계 대학 중 가장 좋은 곳에 다니는 사람이 웹툰을 그린다는 이유로 학교를 자퇴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했다.(중략)
사실 꿈은 이룰 수 없다. 수천만 한국인 중에서 꿈을 이룬 사람이 몇 퍼센트나 될까? 아마 1퍼센트도 채 되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꿈을 이루지 못한다면 꿈은 이룰 수 없다고 하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꿈을 바꾸기 때문에 꿈은 바뀌는 게 정상일지 모른다. 그러니까 사실 꿈이란 건 하나의 목표일뿐 이지 꼭 거기에 도달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꿈을 바꾸기 위해 꿈에 도전한다. 내가 생각하는 방향이 맞는지 확인하고, 더 나은 방향은 없는지 돌아보는 과정이다.(중략)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은 더 이상 맞는 말이 아니다. 사람마다 차종이 다르고, 운전 실력이 다르고, 목적지가 다른데 모두가 서울에 도착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꿈의 방향을 계속 바꾸게 해 주는 무언가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실패다. 실패로 인해 우리의 꿈은 바뀐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다.’라는 말의 숨은 뜻이 여기에 있다.(중략)
실패를 계속하다 보면 언젠가는 성공한다기보다는 실패가 성공의 방향을 찾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다. 사람들은 성공을 돈이나 명예 등으로 표현하기 때문에 다들 성공하고 싶어 하지만 쉽지가 않다. 하지만 성공은 애초에 그런 일반적인 것이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성공, 내가 이룰 수 있는 꿈이 누구에게나 똑같은 내용이 아니기 때문에 남들과는 다른 나만의 성공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다.’라는 말은 실패했던 내용으로 도로 성공한다는 뜻이 아니라, 실패했던 것들과는 전혀 다른 성공을 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동안 나는 실패를 두려워했고, 물론 지금도 실패가 한없이 두렵고 힘들다. 하지만 의도하지 않은 실패들 덕분에 나는 내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은 오히려 실패가 고맙다. 남들은 잘하지 않는 실패를 나만 하는 것 같아 운이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사실 나는 실패를 경험한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 pp.199~202
나는 카이스트에 입학한 지금도 과제와 퀴즈에 급급한 친구를 보며 “괜찮아. 쉬어 가면서 해.”라고 말을 건넨다. 물론 마감 기한을 코앞에 둔 친구에게는 터무니없는 소리일지 몰라도 대부분의 친구들은 나의 그 한마디에 “쉴 시간이 없어.”라고 한숨을 쉬면서도 기지개를 크게 켜고 싱긋이 웃곤 한다.
바로 그거다. 모니터를 보면서 열심히 타자를 치다가도 친구와 웃으며 농담 몇 마디를 주고받고 큰 기지개를 켤 수 있는 것. 비록 찰나의 여유일지라도 친구의 그 큰 기지개를 보면 왠지 나까지 개운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이 개운한 느낌을 나뿐만 아니라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모든 학생들이 느꼈으면 하는데 현실은 너무나도 상반된다. 대한민국에서 학생으로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그들이 기지개를 켤 여유마저 앗아 가 버리는 것은 아닐까.
대한민국 대다수의 학생들은 쉴 틈이 없다. 학교가 끝나면 학원에 가야 하고 주말은 곧 특강을 듣는 시간이다. 이들에게 공휴일의 ‘휴’는 쉴 휴(休)가 아닌 그들의 긴 한숨 소리가 되었고, 졸업이라는 해방을 기다리며 숨을 고르지도 못한 채 또다시 달릴 준비를 할 뿐이다.
찰나의 실수로 이들의 성적표에 오점이 기록되면 죽을죄를 지은 것처럼 벌벌 떨고 눈물을 흘린다. 또 이런 약해 빠진 모습에 이들의 부모는 불같이 화를 내며 더 많은 잔소리를 하고 더 많은 학원을 보내려 한다. 모두들 그 오점이 일으킬 수 있는 부정적인 파장만 언급할 뿐, 어느 누구도 “괜찮다, 쉬엄쉬엄 해라.”라는 말을 건네지 않는다. (중략)
노력하는데도 성적이 오르지 않는 시기를 흔히들 ‘슬럼프’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 슬럼프 탓을 하며 자기 스스로를 자책하고 자신을 더 채찍질한다. 더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불안감과 조급함이라는 벽에 막혀 이를 슬럼프라 칭하며 전전긍긍하는 학생들의 모습이
안타까울 뿐이다. 꿈을 꾸는 모든 학생들이 여유를 가졌으면 좋겠다.
한숨 돌리는 여유를 가지며 다시 한 번 크게 도약할 수 있도록 발판을 마련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학생 자신이 생각하는 여유뿐만이 아니다. 학생들의 성공을 응원하는 주변 사람들 역시 여유를 갖고 그들을 지켜보며 격려 한마디를 건네는 것. 바로 그게 학생들이 여유를 가질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 pp.212~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