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반 소머스는 부러움과 질투의 차이점을 이렇게 설명한다. “부러움은 갖고 싶지만 갖지 못한 것과 관련된다. 반면에 질투는 현재 갖고 있으면서 앞으로도 잃고 싶지 않은 것과 관련된다.” 또 부러움은 보통 양자 관계(‘나’와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사물)에서 생겨나지만, 질투는 삼각관계(나,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사물이나 사람, 내게서 그 대상을 빼앗아 가려는 경쟁자)에서 비롯된다.
--- p. 21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질투라는 감정을 강하게 느낀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자존감과 수치심은 본능적으로 자기 검열을 하게 만든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질투를 느낀다고 고백하면 약점으로 받아들여지거나 반감을 살 수 있다. 악의적인 질투는 억누르거나, 미연에 방지하거나, 겉으로 드러낼 때 받아들이기 쉬운 감정으로 변형시킨다. 질투하는 사람이 자신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인정할 수 없다면, 그래서 늘 그 감정을 지칭하는 다른 이름을 찾으려 한다면, 결국 은유적인 표현을 쓸 수밖에 없다. 현대 영어에서 질투와 부러움을 대신하는 다양한 은유적 표현에 관해 연구해온 언어학자 애나 오가르코바는 두 감정에 그저 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질투는 언어적으로 더 강하고 폭력적인 것을 연상시킨다. 또 보통 부러움보다 더 센 감정으로 여겨진다. 누군가에게 “네가 성공한 게 질투 나”라고 말하면 상대는 자연히 경계 태세를 취하게 된다. 하지만 생각을 바꾸어 “와, 네가 참 부럽다!”라고 말하면, 말하는 이의 암묵적 의도에서 독기 어린 경쟁의식이 제거되고, 대신 얄궂은 찬양의 어조를 띠게 된다.
--- p. 25~26
노르웨이의 철학자 욘 엘스터는 부러움이 질투보다 더 강하고 억압된 감정이라고 주장한다. 부러움을 받는 사람은 자신을 부러워하는 상대의 감정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할 수 있다. 엘스터는 ‘부러움이야말로 우리가 다른 사람이나 스스로에게 인정하고 싶지 않은 유일한 감정이기 때문에’ 독특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부러움에 관해 매우 흥미로운 역사적 설명을 제시한다. 시대와 장소에 따라 도덕률과 사회 규범은 매우 다채롭게 변하지만, 어떤 사회에서도 부러움을 순수하게 아리스토텔레스 식으로 ‘타인이 얻은 부당한 행운에 대한 반감이며, 그 감정에 근거하여 공격 행동이나 파괴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으로 인정하는 경우는 없다는 것이다.
--- p. 26~27
삼각관계, 손실, 감정적 반응. 이 세 가지는 질투의 스펙트럼을 형성하는 근본 요소이자 기제다. 샤덴프로이데도 질투와 선망처럼 삼각관계를 기반으로 한 감정이다. 경쟁자도 있고, 손실도 있다(이 경우의 손실은 내가 아닌 타인의 손실이다). 상황은 감정적으로 충만해서, 비열한 일이지만 기쁨이 넘친다(경쟁자가 손실을 입었을 때 즐거움을 느끼니 말이다). 우리는 샤덴프로이데를 통해 선망과 질투가 얼마나 밀접하게 연관되는지, 또 (샤덴프로이데에 비하면) 질투가 얼마나 도덕적인 감정인지 알 수 있다. 실제로 질투는 세상을 바로잡고 싶어 한다.
1장 [우리 안의 악마 혹은 수호신--- p. 45~46
fMRI 촬영 결과 ...... 남자와 여자가 질투할 때 사용하는 뇌의 부분이 서로 다른 것으로 밝혀졌다. 다카하시 연구팀의 보고에 따르면 “남자의 질투는 대개 시각피질, 대뇌변연계와 관련 영역(편도체·해마·시상하부), 그리고 섬엽과 같은 신체 · 내장 관계 부위의 활성화와 관련 있다.” 여자의 질투는 사뭇 달라서, 뇌 영역 가운데 “자기추론과 마음 이론에 근거하여 타인의 의도를 해석하는 데 관여하는, 이른바 마음읽기(mentalization) 같은 고위 인지 기능을 발휘하는” 부위와 연계된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남자의 질투는 더 ‘본능적’이고, 여자의 질투는 ‘이지적’이라고 할 수 있다.
--- p. 52~53
조사 결과, 친구 사이 질투는 대체로 남학생보다 여학생들 사이에서 자주 나타나며, 5학년(만 10~11세)과 12학년(만 17~18세) 때 가장 뜨겁게 불타오른다. 반면 7학년(만 12~13세)은 이러한 감정이 가장 덜 나타나는 시기였다. 학교 교육 과정상의 과도기(초등 과정에서 중등 과정으로, 중등 과정에서 대학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친구 사이 질투가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점은 상당히 주목할 만하다.
--- p. 59
13세기 이탈리아의 화가 조토 디본도네는 이런 전승을 파도바 아레나 성당에 벽화로 그려냈다. 유다(그림 왼쪽에서 두 번째)가 돈을 받는 장면이다. [루가복음] 22장 3~6절과 [요한복음] 13장 27절의 내용을 토대로, 조토는 유다의 등 뒤에 시커먼 악마를 그림으로써 그 순간 그의 손에 쥐어진 재물의 사악함을 표현한다. 하지만 이 장면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은 사탄만이 아니다. 조토는 〈유다의 입맞춤〉이라는 또 다른 걸작에서 그랬듯 이 작품에서도 유다에게 번쩍이는 노란색 망토를 입혔다. 노란색은 흔히 배신과 질투를 상징한다고 한다. 심리학자 해블록 엘리스는 논고 [노란색의 심리학(The Psychology of Yellow)]에서 “노란색은 질투, 선망, 배신의 색이 되었다. 그림 속의 유다는 노란 옷을 입고, 근대 초기 몇몇 나라에서는 유대인에게 강제로 노란색 옷을 입혔다”고 지적했다. 뿐만 아니라 반역자, 흉악범, 이교도가 사는 집에는 노란 물감을 처덕처덕 칠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그림 속의 유다는 질투하는 사람이다.
--- p. 92~94
2세기 이집트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한 사금파리 조각에는 알루스라는 여자에 관한 글이 새겨져 있다. 신들에게 ‘알루스를 남편 아폴로니오스에게서 떼어놔 줄 것’을 간청하는 내용이다. 여기에는 그녀가 육체적 사랑에서 고통을 느끼기를 비는 가차 없는 기원도 나열되어 있다. “알루스의 음문과 팔
다리 등 성감대를 뜨거운 열기로 지져서 그녀가 아폴로니오스의 집을 떠나게 해주세요. 알루스가 열병이나 고질병, 굶주림, …… 정신병으로 쓰러지게 해주세요. 알루스에게 오만, 증오, 불쾌함을 안겨줘서 아폴로니오스의 집을 떠나게 해주세요.”
--- p. 144
정신분석학의 탄생 과정에 질투는 더 큰 역할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프로이트가 1883년 10월 약혼녀인 마르타 베르나이스에게 보낸 편지에는, 브로이어가 매혹적인 젊은 여성 안나 오를 치료하는 것에 대해 그의 아내가 질투하기 시작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중략) 이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어쩌면 두 남자의 관계 중심에 존재했던 질투의 실상을 보여주는지도 모른다. 전설의 결말에서 브로이어는 나약한 인간으로 그려진다(프로이트가 지인에게 보낸 같은 편지에 “그는 인습적인 두려움 때문에 도망치면서 환자를 동료에게 떠넘겨 버렸다”고 적혀 있다).
--- p.208~209
파리 시내에서 밤새 영업하던 술집 ‘딩고 아메리칸 바 앤드 레스토랑’은 1920~1930년대 고국을 떠나온 화가와 작가들이 즐겨 찾던 장소였다. 그중 가장 유명한 고객 두 사람이 어니스트 헤밍웨이(1899~1961)와 F. 스콧 피츠제럴드(1896~1940)다. 두 사람은 『위대한 개츠비』가 출간된 지 2주 만인 1925년 4월 이곳에서 처음 만났다. 헤밍웨이는 피츠제럴드와 처음 만나고 그 후 우정을 이어온 이야기를 회고록 『파리는 날마다 축제(A Movable Feast)』에 자세히 기록했다. 이 회고록의 원래 제목은 ‘어릴 때의 눈과 귀(The Early Eye and Ear)’였는데, 창작에 관한 현실적 질투를 재미있고 절묘하게 그려낸 이야기에 이보다 더 어울리는 제목은 없을 것이다.
--- p. 255
이탈리아의 화가 에밀리오 론고니(1859~1932)의 〈유리창에 비친 굶주린 사내 또는 사회적 격차(Reflections of a Starving Man or Social Contrasts)〉는 공평함을 바라는 질투의 이중성을 그려 보인다. (중략) 화가가 이 그림을 그린 시기는 이탈리아 통일운동(1820~1870)과 러시아 혁명(1905~1917)의 중간 즈음으로, 혁명의 기운이 유럽 전역에 감돌던 때였다. 당시는 니체와 키르케고르가 제기한 대로 이른바 ‘르상티망(Ressentiment, 원한 또는 복수심)’의 시대이기도 했다(특히 니체의 『선악의 피안』과 『도덕의 계보』에서 이 개념이 중점적으로 다뤄진다). 르상티망은 약점이나 열등감, ‘좌절의 원인이라고 생각되는 무언가’에 대한 질투를 알아차림으로써 새로운 가치 체계가 탄생하는 과정을 뜻한다. 이것은 주종 관계에 대해 니체가 말한 것과 비슷하다.
--- p.299~302
오스트레일리아 시인이자 언론인, 방송 진행자인 클라이브 제임스(1939~)는 〈적의 책이 땡처리로 팔리고 있다〉라는 시에서 자신의 문학적 경쟁자에게 찾아온 비운을 기뻐한다. 농담조를 띤 이 시의 화자는 이제 ‘땡처리 서점의 책 더미에 놓인’ 적의 ‘고귀한 노고’를 탐닉하고 있다. 이 시는 “샴페인을 차갑게 준비하고 크리스털 술잔을 윤이 나게 닦아라! / 적의 책이 땡처리되고 있으니 /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말로 마무리된다. 하지만 이제는 잉여가 된 방대한 책 더미에 이처럼 인정사정없이 조명을 들이댄 의도는 지나온 경쟁과 고통의 세월,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승리한 좋은 승부를 말하기 위해서다.
--- p. 310
우리는 감정에 관한 편견에 저항해야 한다. 감정은 제대로 대접받는 경우가 거의 없다. 등급이 매겨지고, 평가를 받는다. 어떤 감정은 신뢰할 만하다고 여겨지지만, 순전히 위험하기만 해서 무조건 피해야 하는 것으로 취급되는 감정도 있다. 전자를 대표하는 두 가지가 행복과 공감이다. 사람들은 보통 이들 감정을 ‘좋은 것’으로 여기고, 따라서 많이 생겨나도록 장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반면 질투와 분노는 ‘나쁜 것’이라서, 가능하면 생겨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이는 완전히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감정에는 좋고 나쁜 것이 없다. 이 감정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모두 같다. 곧 인간이 위험을 피하고, 기회를 활용하고, 사회적 관계를 활성화하고, 주어진 환경에서 번성하도록 돕는 것이다.
--- p. 3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