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제 등에서 돌아가시면 안 돼요!” 에거는 이렇게 말하고 어깨에 맨 가죽끈을 고쳐매기 위해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잠시 소리 없이 내리는 눈의 소리를 들으려 귀를 기울였다. 고요함은 완벽했다. 익히 잘 알고 있지만 여전히 그의 심장을 두려움으로 가득 차게 만드는 산의 침묵이었다. “제 등에서는 안 된다고요.” 에거는 같은 말을 반복하고 발걸음을 다시 옮겼다. --- p.7
그녀가 탁자에 술잔을 놓으려고 몸을 앞으로 숙이자, 블라우스 주름 부분이 그의 위팔을 스쳤다. 접촉은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였지만, 미묘한 통증을 남겼다. 통증은 매 초가 지날 때마다 그의 살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에거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미소 지었다. --- p.12
에거는 밤에도 침대에 머무는 경우가 거의 없었고 대개는 건초 더미에서, 다락방에서, 곁방에서, 외양간 가축 곁에서 잠을 잤다. 때때로 온화한 여름밤이 되면, 그는 갓 풀을 베어낸 목초지 어딘가에 담요를 펴고 반듯이 누운 뒤 별이 가득 찬 하늘을 쳐다보곤 했다. 그러고는 자신의 미래를 생각했다. 정확히 말하면 미래에 대해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 앞에 무한하게 펼쳐진 미래를. --- p.29
저 높은 곳 어딘가에서 소리가 들렸다. 산속 깊숙한 곳에서 어떤 한숨 같은 것이 터진 듯했다. 그러고서 천둥이 울리는 듯한 깊은 소리가 점점 부풀어올랐고, 잠깐 동안 발아래 땅이 떨리기 시작했다. 에거는 불현듯 서늘한 기운을 느꼈다. 몇 초가 지나자 천둥 울리는 듯한 소리는, 무엇이든 꿰뚫을 듯 날카롭고 낭랑한 소리로 바뀌었다. 에거는 꼼짝도 못한 채 산이 부르기 시작하는 노래를 들었다. 그러고서 약 20미터 떨어진 곳에서 검고 커다란 무언가가 소리 없이 쓰러지는 광경을 보았다. 그것이 나무줄기라는 것을 미처 파악하기도 전에, 에거는 달음박질쳤다. --- p.65
“지금 할 수 있어!” 크란츠슈토커는 격앙되어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제 날 때릴 수 있다고! 날 때리라고. 알아듣겠지? 날 때려다오. 부탁한다! 제발 내가 죽을 때까지 날 때려다오!” 에거는 노인의 손가락이 자신의 팔을 움켜쥐는 느낌이 들었고, 얼음처럼 차가운 공포를 심장 속 깊이 느꼈다. 그는 손을 뿌리치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 p.101
에거는 안나 홀러의 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는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머리는 베개에서 미끄러져 내렸고, 머리카락은 가느다란 실타래처럼 침대보 위에 놓여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반쯤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매우 초췌하고 야위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커튼의 가느다란 틈새를 통해 방 안으로 떨어진 밤의 빛은, 그녀의 얼굴에 드리운 수많은 주름에 붙잡혀 있는 것 같았다. 에거는 잠이 들었고, 다시 깨어나 보니 안나 홀러는 몸을 웅크린 채 모로 누워 있었다. 그녀가 베개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 p.132
“정확히 어디로 가고 싶으신 거예요?” 그 남자가 물어보았다. 늙은 에거는 그냥 선 채로, 필사적으로 대답을 찾아내려 안간힘을 썼다. “모르겠구먼. 도무지 모르겠어.” 에거는 이렇게 말하고는 천천히, 거듭 머리를 흔들었다.